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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조회수 | 2,432
작성일 | 06.11.30
기다림, 그 영원한 설레임

주님 오시기를 깨어 기다려야 하는 설레임의 대림시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진정 환희와 찬미의 마음으로 전례력의 새해를 맞으며 아름다운 시 한편으로 글을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아침, 그대를 맞으며… 조희선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이야
하루를 산다는 건
그물을 싣고 바다를 향해 떠나는 싱싱한 희망이야
어젯밤의 졸린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건 싫어
지난날의 어둔 습성으로 아침 창을 여는 건 싫어
살아간다는 건 설렘이야
하루를 산다는 건
인연을 따라 운명을 건져 올리는 황홀한 만남이야’

집없는 사람들을 돕기위한 <엠마우스>운동의 창시자이신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1912~ )’신부님은 ‘죽음’에 대한 당신 일생의 명상을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해서 이별을 말한다. 남겨진 이들에게 죽음이 이별로 경험된다면 죽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죽음이란 모든 상상을 뛰어 넘는 환상적인 만남이 주는 눈부신 순간이다. 하느님과, 천사들과, 이 땅에 살았던 무수한 사람들과의 만남! 그렇다. 죽음은 우리네 삶에서 황홀한 순간일 수 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 되는 그 두 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대림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교회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복음을 읽습니다. 자못 심각하며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종말은 다시 오시겠노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인 것이며, 교회는 2000년 동안 그 약속을 기다리며 구세주께서 빨리 오시도록 노래 하였습니다.

때문에 종말이 오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오게되면 맨발로 뛰어나가 환희로 맞이해야 하는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러나 구세주의 재림을 그토록 환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베 피에르신부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황홀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인생에 있어서 절대로 망쳐서는 안되는 두 가지 일, 즉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하는것과 아낌없는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 34. 36)

거지 구유

전 세계의 모든 성당에서는 이즈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뉘일 구유를 만들기 위해 부산한 움직임들이 벌어지리라 생각됩니다.

저 자신은 본당 주임신부가 되면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성탄 구유를 좀더 아기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은 것으로 만들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주임신부가 되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교우들에게 만약 우리 마을에 아기 예수님께서 오시면, 어느 집에 오실까를 생각해 보게 하였습니다.

2천 년전 집도 없이 짐승 마굿간에 초라하게 탄생하셨던 예수님,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헐벗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셨던 예수님, 그분이 이제 우리 마을에 오신다면 어느 가정에 오실지 생각하여, 우리 주변 이웃 중 가장 헐벗고 고통스러운 이웃, 큰 슬픔 중에 있는 이웃을 찾아가 작은 성탄 선물을 드리고, 혹은 위로와 말벗이 되어 주고, 그 가정을 나올 때 버려진 물건을 가져와 구유를 꾸미자고 제안 하였습니다.

매번 수많은 자금과 몇 사람의 수고로 만들어지는 구유가 아닌, 전 교우들의 사랑과 정성이 깃든 구유를 꾸미는 일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잘 실천해 주었고, 저 또한 그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대림 1주일부터 온갖 쓰레기(?)들이 성당에 쌓였고 그것으로 지저분한 거지 구유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성탄 자정 미사때 아기 예수님을 그 거지 구유에 안치하던 저는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비록 초라하여도 전 교우들의 사랑의 실천이 깃든 구유, 모두가 동참하여 함께 만든 사랑의 구유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성바오로의 말씀대로 그것이 대림 준비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 12~13) 거룩한 성탄을 사랑으로 준비하는 대림시기이길 저 또한 기도 드립니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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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사태 선포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라든가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고들 한다. 또 한 일도 없이 한 해가 넘어가는구나 하며 아쉬움이 담긴 말을 한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며 아쉬워 한다.

신앙의 달력으로는 새해(다해)가 시작되는 오늘이지만, 세상 달력으로는 아직 한 달이 남은 12월 초이기에 자연스럽게 지난 11개월을 되돌아 보며 착잡해 한다. 후회되는 일들이 없을 수 없으니까!

바로 이때, 많은 영혼들을 놓고 양 진영 - 하느님 편, 사탄 편 -의 영혼들을 뺏느냐 뺏기느냐 하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작전 회의가 열린다. 하느님 편에서는 대리자들을 통해서 영혼들을 연말연시 사탄의 총 공세(?)에서 보호 받도록 판공성사를 보게 한다. 지난 11개월을 잘못 살았어도 지금이라도 회개하여 남은 한 달이라도 잘 살면 된다고 판공성사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그래서 부활을 준비하면서 보는 봄 판공서때보다는 성탄 판공성사 때 훨씬 더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본다. 연말이 가까워오면 무언가 아쉽고 후회되고 쫓기는 기분이 되기 때문인가 보다.

사탁 측에서는 비상이 걸린다. 비상사태가 선포된다. 지난 11개월동안 열심히 유혹하여 이제 조금만 더 유혹하면 마귀의 진영으로 확실하게 끌어 넣을 수 있는데, 그만 판공성사로 놓치게 되었으니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으리라. 그래서 비상회의(?)가 소집되어 새로운 작전을 짜게 된다. 그냥 물러설 마귀들이 아니니까!

이제 그들의 계획을 알아보자.

1단계 : 아주 바쁜 일들을 만들어서 고해성사 볼 시간을 못 내겠다는 생각을 심는다.
2단계 : 혹시라도 판공성사를 보면, 성탄 준비하는 가운데 의견 차이로 불평하며 평화와 일치를 깨도록 유혹한다.
3단계 : 성탄 전야 행사 후에 이런저런 모임으로 분위기를 만든다.
4단계 : 연말 망년회 등등으로 영혼과 육신이 망가질 기회를 자연스럽게 제공한다.
5단계 : 마귀가 최종 승리를 확인 하는 작업으로 '역시 나는 작심삼일이야, 난 안돼!' 하면서 자포자기 하게 만든다.

그동안 우리는 매년 연말 연시를 어떻게 보내고 어떻게 시작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2006년 올해의 마지막 12월에 들어섰다. 성실하게 준비하여 판공성사를 보고, 남은 이 한달만이라도 알뜰하게, 열심히, 뜨겁게 살아보자. 또 마귀에게 속지 말고!

"사랑하올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여, 의지가 약한 제 힘으로는 불가능하오니 도와 주시옵소서."

▶ 오상철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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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기다림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시기이다.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주님의 날이 무서움과 공포의 날이 아니길 준비하라고 하신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에 따름이 곧 준비이다. 그렇다면 그날! 주님이 오시기로 된 그날은 언제인가? 그날은 예년에도 그랬듯이 그냥 지나갈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미래의 그날이 아니다. 말씀을 전해 듣는 바로 오늘이 그날이어야 한다. 오늘이 그날일 수 있는 것은 준비된 사람에게는 언제이든 그날이 당당한 오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준비해야 한다.

매일 매일의 삶이 타성에 젖어 있음에 놀라게 된다. 매일 바치는 기도 생활과 미사가 습관적인 행위였음도 보인다. 교우들과의 만남도 형식적이다. 또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로 성당에 앉아 있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세상사에 찌든 고통이 보인다. 무슨 잘못이 그리 많은지 '사는 게 죄' 라는 어느 할머니의 고백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이들의 슬픈 모습이 보인다. 그런 교우들을 위해 매주 강론을 준비하면서 전국 교구지에 실려 있는 강론 말씀들을 살펴본다. 정말 감동이 없는 틀에 박힌 말씀들이다. 나도 그런 흐름에 동참하며 힘겹게 주일을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오히려 더 힘이 있게 들려온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하고 외치신다. 더 이상 의욕 없는 삶이 아니라 이제라도 살맛나는 의미를 찾으라는 말씀으로 들려온다. 더 이상 타성에 젖은 생활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한다. 부족했던 것을 발견하는 만큼 속량의 시간이 가까워 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이 대림절이 새로운 시작일 수 있도록 당당하게 머리를 들자. 더 이상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 앞에 책임질 수 있는 마음과 생활로 머리를 들자. 미사에 오는 이, 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힘찼으면 좋겠다.

거룩한 성찬미사 안에서 더 밝은 모습을 서로 확인하는 대림절이면 좋겠다. 그럴 때 변화되는 너와 나를 통해 오시는 주님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림절에는 평화의 인사를 반갑게 나누며 다가오는 성탄을 알려보도록 하자. 내 옆에 앉아 있는 이들은 마음속으로 나를 반겨주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기다린다면서 옆에 다가와 있는 형제자매와 형식적인 인사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순간만이라도 애써 옆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따뜻한 마음을 전해보자.

▶ 송병철 야고보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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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량의 날을 준비하며

기다림의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림으로 깨어 준비해야 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은 ‘기다림’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모든 것이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 낳기를 기다리고, 어서 자라 주기를 기다리며, 학교 가기를, 졸업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취업하기를 기다리고, 시집 장가가기를 기다립니다. 식당에서는 밥 나오기를 기다리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도 기다립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의 기다림도 있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역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돌아서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시고 또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서의 주제와 예언자들이 외쳤던 외침은 한결같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문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그런가 하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마침도 기다림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원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추방에서부터라고 봅니다. 그들이 쫓겨날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구세주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 3,15 참조). 그로부터 구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무려 4천 년 가까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약속대로 메시아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고 그들과 33년을 함께 사셨습니다. 당신의 구원사업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문에 신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2천 년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은 공심판의 날이며, 세상 종말의 날입니다. 사이비 종교에서는 종말을 선전하며 교세와 착한 신도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금품을 갈취하는 악용으로 이용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의 참된 종말은 예수님 약속의 재림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어서 오도록 2천 년을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교, 그 모두가 기다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때문에 진정 참된 기다림과 기쁨으로 그날을 깨어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 기다림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신다.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련한 이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신다.”(시편 25,8-9)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다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왕좌왕할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이제는 한 눈 팔 것이 아니라, 정해주고 알려주신 그 길을 따라 충실히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어머님을 여의고 가슴 아파하며 어머님의 무덤을 찾고 돌보다가 이민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민을 떠나기 전 아들은 어머님 무덤 가까이 사는 동네 사람에게 큰 돈을 주며 어머님의 무덤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였고 매년 돈을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수년간 고국을 찾지 못했던 아들은 문득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그리워 갑자기 귀국했고, 어머님의 무덤부터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덤을 돌보는 사람은 아들이 영영 오지 않을 줄 알고 몇 년을 돌보지 않아 무덤은 이미 잡초 무성한 풀밭으로 버려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의 무덤이 폐허가 된 것을 본 아들은 오열하였고 무덤 관리인을 경찰에 고발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 같은 무덤 관리인이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대림, 기쁨과 설렘으로 깨어 기다리는 이 시기에 우리는 버마의 민주운동가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저명한 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에 인용 되면서 널리 알려진 부패에 이르는 네 가지 길에 관한 초기 불교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첫째, 사람들은 욕망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둘째, 사람들은 싫어함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셋째, 사람들은 망상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넷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우리는 진정 욕망과 미움, 망상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기쁨으로 오시는 주님을 깨어 영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배광하 신부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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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 복음말씀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는 종말에 대한 선포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종말에는 이 세상이 사라지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즉 태양이 희미해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다고, 사람들은 마침내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했던 타락과 증오·질투·탐욕·차별·전쟁·살생의 세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때에는 새 세상, 더 나은 세상, 다른 세상이 오리라고, 우리를 새롭게 할 하느님의 나라가 오리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종말은 ‘새 시작을 위한 종말’ 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세상은 바로 여러분 가운데 있다는 것, 세상에 가서 설교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 우리도 지속적으로 방에서 빵을 쪼개고 포도주를 나누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당신을 되새기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단지 종말이 되어야 새 하늘이 온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이룩된’ 새 세상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성령 안에서 온 세상이 재창조되었다고, 또한 새 세상이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밤이 다 지나, 먼동이 밝아 온다! 어서 가자, 빵을 쪼개러!” 하시며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올해는 ‘신앙의 해’ 입니다. 신앙의 해를 맞이하여 모든 교우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굳게 결심하여 영·육간에 필요한 ‘참된 믿음을 더해(+)주는 일’ 을 한 가지라도 꼭 실천하여 하느님 자녀로서의 수준(level)을 한 차원 들어 높이는 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라는 에디슨의 명언이 사실 명언들 중 가장 뜻이 잘못 알려진 것 중 하나라고 합니다. 보통 이 명언은 1%의 천재성이나 영감보다는 99%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이 발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신문기자에게 말한 것은 1%의 영감, 즉 믿음이 없으면 99%의 노력은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에서는 1%의 영감이 중요한 게 아니라 99%의 노력에 중점을 두고 보도했습니다. 내 메시지와 진실을 잘못 전달한 것이지요.” 1%의 직감, 즉 믿음이 없으면 99%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99%의 노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1%의 직관과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끝까지 지치지 않고 청할 수 있게 만드는 밑거름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춘천교구 이유수 신부
  |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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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깨어 있다는 것

저는 원래 아침잠이 많은 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 시절 에는 잠이 모자라서 방학이 되면 ‛집에 가서 실컷 잠이나 자야 되겠다.’ 하고 방학이 기다려질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아침잠 때문에 새벽 미사를 하려고 일어날 때면 참 으로 힘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잠깐 유혹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렇 지만 일어나서 새벽 미사를 마치고 나면 언제 그런 마음이 있었는가 합니다.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의 문제라 고 봅니다.

깨어있다는 것이 잠을 적게 자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는 물리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잠을 적게 자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면 그건 병일 것입니다. 잠을 잘 때는 푹 자고, 잠을 자지 않는 시간 그 때는 정신 차리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만 불안하면 오히려 잠이 오질 않습니다. 깨어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한 삶을 살고 있기에 오히려 잠을 제 대로 못자고 있습니다. 잠을 충분히 잘 자는 사람은 불안과 걱정이 없기 때문에 푹 잘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크고 작은 일로 걱정하며 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이나 재난이 닥쳐와서 우리는 불안해하거나 안절부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기에 불안해하지 않는 것 이 우리의 삶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지 못하고 세속적인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의 희망을 주님께 두고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대림 시기뿐만 아니라 1년 365일 전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항상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혹 걱정이 생겨 불안해질 때가 있으면, 항상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은 누가 하는 것이냐? 바로 이방인 즉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 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고 세속의 것에 잠시나마 마음을 둔 것에 대해 잠시 반성해 봅니다.

부모 품에 안긴 어린 자녀는 제일 행복합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 앞에서 잠을 잔다 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어른들도 세속 안에서 근심 걱정 으로 피로해진 상황에서 아버지이신 주님을 만나면 어린이가 되어 그 피로가 눈 녹 듯이 사그라지듯이 하느님 안에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그라져 잠이 소로록 오 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간혹 성당 안에서 조는 분이 계십니다. 마음이 얼마나 편하면 자겠는가 말입니다. 미사 때 강론을 한참 하고 있는데 앞에서 웬 분이 꾸벅꾸벅 졸고 있기에 옆에 있던 분에게 깨우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 “잠은 지가 재워놓고 나보고 깨우래” 하는 우스갯말처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 간이 너무나 편안해서 그러지 않았는가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기에 잠도 잘 오고 건 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서 말씀하신 깨어있는 삶이 아닌가 합니다. 아멘.

▥ 춘천교구 최일호 라우렌시오 신부 - 2015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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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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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3번 맞이합니다. 대림 제1주일은 우리 영혼이 한 살 더 먹는 날이고, 1월 1일은 우리 정신이 한 살 더 먹는 날이고, 설날은 우리 육체가 한 살 더 먹는 날입니다. 설날에 떡국을 먹으면서 새해에는 나잇값을 하는 맘으로 새 출발 하듯이, 1월 1일은 우리 정신이 새해의 도전 앞에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출발을 준비합니다. 대림 제1주일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례 받은 날로부터 많은 세월을 살았으니, 이제 신앙인답게 보다 성숙하고 성덕에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새롭게 결심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대림시기를 맞이하도록 ‘기다림’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도록 인도합니다. ‘기다림’ 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입니다. ‘과거’란, 이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기다립니다. ‘현재’란, 온갖 문제들로 고통 중에 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미래’란, 장차 만민을 심판하시러 다시 오실 예수님을 우리가 기다립니다. 여기서 ‘과거’에 오신 예수님을 현재에 있는 우리가 기다린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건’이 과거에 시작되었지만 현재에도 진행 중이고,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사건, 즉, ‘현재 진행 중!’ 인 사건으로 이해하면 쉬워집니다.

즉, 이천 년 전에 벌어진 ‘예수님 탄생 이야기’ 가 이천년이라는 시간 여행을 하고, 베들레헴에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 전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해봅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 들이 타성에 빠져서 ‘예수님의 탄생’ 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면서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뱀(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비참한 운명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사람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기가 막힌 사연을 이번에는 진지하게 경청해 보면 좋겠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 이란, 세상이 너무나 혼탁하고 부조리하고 끔찍해서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즉 절망이 극에 달한 인류가 이제 우리가 희망을 가질 분은 오직 ‘메시아’ 뿐이라며 메시아가 반드시 오셔야 한다는 간절한 기다림이 하늘 끝에 닿아있는 사상입니다. 사람들의 기다림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난 예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라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되고 어리석은지 깨닫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고백하며,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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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교구 최원석 마리아넬로 신부 : 2018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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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청주] 너무 일찍 터트린 축포  148
142   [수도회] 사탄은 반드시 있습니다.  [7] 1830
141   [수원] 우리의 삶은 "대림"의 삶  [6] 2456
140   [대구] 준비 됐나요♪♪  [4] 2150
139   [인천] 성탄은 새로운 출발  [7] 2204
138   [의정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4] 2476
137   [부산] 종말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6] 2021
136   [서울] 대림초에 불을 붙이며  [6] 2691
135   [안동] ‘신앙의 해’와 늘 깨어 있는 신앙  [2] 1407
134   [마산]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있는 삶은 아니다.  [4] 2458
133   [원주] 희망과 기쁨의 시기  [1] 211
  [춘천]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6] 2432
131   [전주] 아름다운 길  [2] 1948
130   [광주] 구름아  [1] 201
129   (자) 대림 제1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6] 2041
128   [수도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4] 1833
127   [전주] 우리들의 신앙고백  1905
126   [수원/기타] 사랑의 콩깍지  [1] 2091
125   [원주] 그리스도를 입는 사람  [1] 1865
124   [인천] 자유로운 결단  [3] 1831
123   [대전] 너는 누구냐?  754
122   [서울] 주님과 함께 사는 삶  [1] 2403
121   [대구]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인가?  2077
120   [마산] "십자가를 지고"  [3] 1704
119   [안동]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1884
118   [부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3] 2086
117   (녹) 연중 제12주일 독서와 복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1] 1532
116   [수도회]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3] 2242
115   [광주/전주/청주] 내가 살아가는 이유?  [4] 2482
114   [마산]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2] 1884
113   [의정부] 오직 사랑만이  [3] 2312
112   [군종] 용서의 삶  [4] 2290
111   [대구] 용서와 사랑  [3] 2188
110   [춘천/원주] 간절한 통회의 마음  [4] 2459
109   [인천] 작은 사랑  [7] 2400
108   [안동] 예수님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3] 2329
107   [부산] 이런 저런 생각  [4] 2127
106   [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8] 2541
105   [대전] 참회  [4] 2365
104   [수원]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5] 2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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