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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있는 삶은 아니다.
조회수 | 2,458
작성일 | 06.12.01
전례력으로 새해(다해) 첫날이다. 아무 준비 없이 기다리는 것은 참된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나 바쁘게 바동그리며 정신 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것이 참으로 깨어 있음은 아니다.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함' 이것이 참으로 깨어있는 방법이다. 내 안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하자.

1. 세상 종말은 무서운 파멸의 날인가?

세기말(世紀末)이 되면 항상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외침과 그런 것을 떠들어대는 여러 사상이 판을 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요즘은 1년이 옛날의 백년 못지 않게 빠르게 변화하고 불안하다보니 세기 말이 아니라도 근원적인 가치전도와 변혁을 꿈꾸고 외치는 종말 현상이 끊일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희망도,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들은 맷돌처럼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자학적인 원한을 쏟아내는 이들이 우리 사회엔 그만큼 많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가21,25ㄴ-26)고 하신다.

이런 말을 들으면 죄 많은 우리들은 오금이 저리고 그저 무서운 생각부터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세말(世末)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자지러지기부터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세말의 진정한 의미는 '비극적인 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있기 때문이다. 세말의 대 재난은 완성을 위한 진통이요, 정화의 과정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가21,28)고 하시는 것이다.

2. 주님의 세 가지 오심

우리는 대림절을 맞으면서,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해마다 또 오시는가?"하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면서 해마다 그냥 기념하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이에 대해 성 베르나르도께서는 "첫 번째 오심은, 말구유 위에 나약한 육신으로 오심이고, 두 번째 오심은, 마지막 날 재림 시에 영광과 위엄으로 오심이며, 첫번과 마지막 사이의 세 번째 오심은, 영(靈)과 권능으로 오심이다."고 하셨다.(대림 제1주간 성무일도 제2독서 참조)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도 재림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남이 계속되다보면, 친구를 더욱 새롭게 알게 되듯이, 우리도 신앙의 여정에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에 눈뜨는 그만큼 새롭게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기에 해마다 맞는 대림시기는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이며, 성탄도 단순한 2000년 전의 첫 성탄의 기념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님의 재림은 이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재림은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가 사는 이 역사의 시간은 종말(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그 시간'은 참으로 예상치 못한 때, 바로 오늘 닥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우리의 삶 속에 항상 함께 하고 있듯이 재림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숙히 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시간 속에서 영원을 희망하며 사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의 삶의 차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깨어 있어라."는 말씀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3.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 있는 삶은 아니다

일찍이 우리 국민들이 적이 아니면, 동지라는 식으로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라 이렇게 극명하게 분열되었던 때는 없었다. 소위 대선 주자들은 일회용 당을 또 만들고, 철새 정치인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도 이어질 것이다.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대치를 갱신하며 끝간데 모르게 치솟는 요즘, 취업을 희망하는 졸업생들은 신발이 닳도록 쏘다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깨어 있어라."는 말씀을 들으면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바쁘게 뛰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며 허둥대는 삶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가?"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 몫을 다하고 바로 서있는가?" 하는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없이는 '바쁜 삶'은 곧 허둥대는 삶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고 그분과 함께 계획하고 그분과 함께 매일을 가꾸어 가는 삶이 참으로 깨어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조용히 주님 안에 한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자. 그리하여 언제나 '그분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자.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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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행복

아름다운 동화 『어린 왕자』를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여우는 왕자에게 친구가 되는 방법을 일러 줍니다. “난 너의 친구가 될 수 없어.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이렴.”

여우는 서로 길들여지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비밀을 가르쳐주지요.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분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분을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다음날 어린 왕자는 다시 여우가 있는 곳을 갑니다. 여우가 다시 말합니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게 좋아.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길들임 이후에는 설렘이 존재합니다.

어린 왕자는 여우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여우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었습니다. 여우는 왕자를 친구로 삼았으므로 세상에 하나뿐인 왕자로 다시 태어났지요. 여우는 말합니다. 기다림의 시간도 소중하다고, 기다리는 순간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오후 네 시에 오기로 약속했다면 세시부터 마음 가득 기다림의 즐거움이 퍼져 나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미 그분의 삶에 길들여졌을 때만이 그분을 기다림이 설렘이,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써 버린시간이란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어버렸어. 네가 길들인 것에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여우는 마지막 비밀을 알려 줍니다. 바로 책임입니다. 그것은 내가 길들이고 길들여진 상대에 대한 예의이며, 무언의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쓴 시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일부 혹은 전부를 예수님께 기꺼이 내주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그분의 향기에 익숙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께 대한 책임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친구 됨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그분의 가르침에 더욱 충실한 삶이 아닐까요?

기다림의 시기인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길들여진 삶을 통해 행복 속에서, 설렘 속에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도록 해야겠습니다. 길들여진 이후로는 서로를 기다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행복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산교구 김국진 가우덴시오 신부
  |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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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ㄴ)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면서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ㄴ).

이번 주부터 대림절이 시작된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성탄 축제를 준비한다는 의미이며, 둘째는 이 세상 끝날에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 곧 세상의 심판관이신 당신이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시면서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이 말씀에 우리의 설렘과 기쁨과 기대가 담겨 있다.

‘속량’이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에게 자유를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신분상 구속을 받는 경우가 생길 때 가족 또는 친척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를 속박에서 해방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 하느님께 그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신앙의 관점에서 ‘속량’은 온갖 형태로 하느님 백성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것에서 해방시켜 주는 하느님의 구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구원’ 또는 ‘해방’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신다.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고 최종적인 속량이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와 힘을 준다.

‘구원’에 대한 말씀보다 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물질문명에 익숙해지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고리타분하고 비생산적인 이야기로만 들린다. 때로는 신앙인들도 영원한 생명이나 천상복락 등에 대한 말씀보다는 세속적인 관심사를 충족시켜 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이기도 한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구원 불감증’ 상태에 놓여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속량의 날’인 동시에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심판의 냉혹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고하신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루카 21,26ㄱ). 하지만 구원을 희망하며 충실하게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은 그날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루카 21,28ㄱ).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4-­36)고 가르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자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남이 해주어야만 하는 일도 있다. 후자를 ‘구원’이라고 한다면, 전자는 구원을 위한 우리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라는 표현이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이 말은 우리에게 ‘선택’의 결정권이 있음을 암시한다. 구원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아닌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갈수록 세상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심지어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대부분 그렇게 한다’, ‘어쩌다 한 번쯤은 괜찮다’, ‘하느님도 이해해 주실 것이다’라는 식의 핑계나 논리로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정당화한다. 필자도 그러한 허물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여하튼 그러한 사고방식의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이들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종교인이 아닌 참 신앙인이 되라고 가르치신다.

오늘 복음에서 제시되는 참 신앙인의 첫번째 생활방식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ㄱ)이다. 일상의 근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는 일이 있고 삶의 목표가 있고 계획이 있으면 크고 작은 생각(근심·걱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근심이 깊어지면 때로는 방탕으로, 때로는 자포자기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현세)’의 근심이 ‘영원(내세)’의 행복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두번째 생활방식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이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도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 없이 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일이 아니라 종교인의 일일 뿐이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한 기도,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한 기도가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의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께서 제시해 주시는 참 신앙인의 생활방식을 삶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묵상과 기도

▷ 주님의 성탄과 재림을 잘 준비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주님, 저희는 때로 의무감으로, 때로는 타성에 젖어 당신 축제를 준비하고 맞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대림절에는 저희가 ‘무엇 때문에’ 성탄과 당신의 다시 오심을 정성껏 준비하고 기쁘게 기다려야 하는지 생각하고 준비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여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성탄과 다시 오시는 당신을 맞이하게 하소서.

▥ 마산교구 김정훈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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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기에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약속장소에서 혼자 기다려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무슨 일 때문에 늦어지는지 알 수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핸드폰이나 삐삐(무선호출기)도 없었기에 약속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마냥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특별히 할 것도 없고, 또 마땅히 시선을 둘 곳도 없을 때는 혼자 있는 것이 어색했고, 그래서 자꾸 시계만 쳐다보지만 지루한 시간은 빨리 지나가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있으면 지루했을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렸음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관심은 지루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해줄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대림 시기는 교회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때이며, 누군가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 누군가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고,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이 세상에 오셨고, 언제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루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할까요?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주어진 삶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오시기로 약속한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이며, 이러한 준비의 시간은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며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려야 하는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준비된 삶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있는 삶의 자세가 될 것입니다. 준비된 삶은 나에게 기쁨을 줄 것입니다.

▥ 이정근 요한 신부 - 2015년 11월 29일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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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다리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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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림1주일을 시작하면서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이때에 모든 교우분들이 끝나가는 2018년을 여러 가지 아쉬움으로 18(?), 18(?)하며 한 해를 보내려 하신다면 새로 맞이하게 될 2019년은 더 친절하고 싶고(19), 더 배려 하고 싶고(19), 더 용서하고 싶고(19), 더 사랑하고 싶은 한 해가 되시길 바라봅니다.

대림 시기의 기다림은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 세상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몰랐기에, 삶의 지침이 되고 구원을 위한 참 스승으로서의 메시아, 곧 하느님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첫 번째 기다림은 하느님의 육화로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신앙인이 된 우리는 이제 두 번째 기다림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기다림은 여러분들도 아시는 것처럼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다림처럼 마냥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언가를 원하시는 기다림은 아닐까?’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이런 생각이 들도록 도와준 시 한 편을 소개해 봅니다.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 윤제림 ▬

지하로만 다니던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변화가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나의 변화가 하느님과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이 시는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내 남편이 바뀌지 않는다고, 내 아내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내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그들을 위해 조금 더 받아주려고, 조금 더 배려하려고, 조금 더 인내하려고, 조금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변화가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두 번째 기다림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나에게서 분명 작은 변화라도 찾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하며 가끔 지상으로 올라오는 변화를 통해 주위의 어둠을 밝히는 대림 시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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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교구 임해원 안토니오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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