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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성탄은 새로운 출발
조회수 | 2,210
작성일 | 06.12.02
해마다 성탄 때가 되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대림초, 별, 구유, 아기, 목동, 천사, 크리스마스 트리, 동방박사….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도 이내 잃어버린 어린시절에 대한 아쉬움이나, 의무감과 타성에 젖어 이 축제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해 저편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져 갈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해지기까지 합니다.

대림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인간으로 이 땅에 이미 오셨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고계)시며, 우리의 시간이 끝나는 세말의 영광 속에 오실 것을 기다림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깨어 기다려야’한다는 말씀을 이맘때만 되면 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정작 깨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또 왜 그래야만 하는 건지도 모른 채 여전히 엉뚱한 곳만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과연 대림초에 불이 차례로 밝혀지는 것도(기다림), 미사 전례 중 사제의 제의색이 자색이며, 대영광송을 하지 않는 것(회개와 정화)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저 무작정‘깨어 있겠다’며 힘주어 두 눈만 부릅뜬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을까요?

왜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와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까요? 삶의 목적과 관심이 다른 곳에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지 않고 오로지 인간적인 희망, 현세적인 욕심에만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면 말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은 물론, 과부들과 많은 병자들, 고아와 죄로 인한 고통 중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고백한 사람들은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하느님께서 어찌 죄 많은 나에게 오실 수 있겠는가?’라며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절대 포기 할 수 없었던‘희망’이 낳은 기적과도 같은‘새로운 출발’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구원을 희망하며 충실하게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세말에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을 것”(루카 21,28ㄱ)입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희망을 거슬러 구원의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3-5).

올해 성탄에도 예수님께서는 어김없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속량이 가까웠기 때문”(루카 21,28ㄴ)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참으로 친절하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그 답을 던져주십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올해 성탄이 우리 모두의‘새로운 출발’이길 기도합니다.

인천교구 김지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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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 마음의 눈을 뜰 때"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주일 복음말씀에는 늘 변함없이 주님이 오시는 날을 위해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늘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와 함께 주님이 오시는 날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5-28).
 
복음 내용은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주님 오심이 묵시문학적 종말사상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의 표현법은 독특한 의미와 색채를 띤 낯선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오역해, 많은 종교집단에서는 공포와 두려움의 상태로 신앙인들을 몰아넣어 신앙인들에게서 종교집단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오히려 주님 오심에 대한 희망과 구원을 내용으로 합니다.
 
사실 하늘과 땅을 비롯한 그 안의 모든 것은 하느님 창조물입니다. 그런데 늘 우리가 보아서 익숙했던, 그래서 안전하고 확고하다고 여긴 창조물들이 그 기반을 잃고 흔들립니다. 이런 표징들이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가져와 마음을 동요시킵니다. 복음의 내용은 외적으로는 주님 오심을 표현하고 있지만, 내적으로 그 당시에 일어났던 박해의 고통과 주님 현존 앞에선 모든 창조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표현된 불안과 두려움이 바로 절망에 빠져 낙담하고 있는 인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늘 안전하고 확고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때가 인생에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태양과 같은 빛이 없어지고 어둠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태, 기쁨이 없는 상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상태에 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여정에 앞서서 복음이 이런 말씀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주님의 십자가 수난 여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여정에서 기대했고 마땅히 받아야 했던 것만을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될 것들을 기다리고 그것에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기다림을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움켜질 것에만 삶의 가치를 둔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다림은 주님의 오심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향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쳐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림 속에서 원하는 바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완전히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만의 이기적인 잠에 너무 취해 있지 않나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움켜질 것에만 빠져 있다면 이제는 깨어나 마음의 눈을 뜰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주님 사랑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 불안과 두려움은 아물고 우리 삶은 기쁨과 행복으로 넘쳐 뛸 것입니다. 주님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 홍승모 신부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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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찬미예수님, 오늘부터 기다림으로 표현되는 대림시기가 시작 됩니다. 대림시기는 새로운 시작,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기다림으로 표현되는 시기입니다. 대림시기는 전례상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시작의 시기이자 앞으로 우리에게 아기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께서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부족하신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이 끝나는 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셨던 말씀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과거에 이미 우리에게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앞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던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이기에 이 대림시기는 기쁨과 희망의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성탄이나 부활을 맞이하며 느끼는 환호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쁨입니다. 기쁨과 희망의 시기인 대림시기에 사제가 회개와 절제를 상징하는 자주색 제의를 입는 것은 예수님을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그동안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꿈에 그릴 정도로 반가운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그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옷도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우리도 대림시기동안 사랑하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돌아보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손가락질을 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보내면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님을 맞이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이 대림시기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쁜 시기가 될 것입니다.

인천교구 박성수 요한 신부
  |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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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청년들 중에는 노총각 노처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제가 물었습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느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대부분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말합니다. 돈 많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외모도 빠지지 않는 사람, 자기 인생 설계를 확실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미래가 확실한 사람 등등……. 이렇게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과연 행복할까요? 나보다 나은 사람을 통해서 받는 것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받는 것을 통해서만 행복을 느끼는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는 것을 통해서 행복을 체험할 때가 더 많은 법입니다. 따라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기란 어쩌면 하늘의 별 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라는 표현을 곧잘 씁니다. 이는 곧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사랑을 자신의 의지 안에 맞추려고 할까요?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에만 맞추니 사랑을 찾기가 더욱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고 실천하는 것이 과연 사랑이 맞을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을 주님께 맞추고 있다면 절대로 사랑이 아닙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이 채워져야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며, 주님께 그러한 기도만 하고 있으면 절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방에게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듯이, 주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 역시 주님께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주님과 함께 함이 좋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봉사와 희생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에 기쁨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과연 주님과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일까요?

이 주님과의 사랑은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안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은 더욱 더 지금 당장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했던 사람만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말하고 실천하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정말로 나중에 주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일까요?

어떤 유명 작가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사랑에 푹 빠지게 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즉, 늘 미소를 짓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삶을 즐기는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띄게 되어, 다른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지금을 살고 있는 내 모습에 푹 빠져드실까요?

새로운 전례력이 시작하는 오늘 주님을 떠올리며 더 큰 사랑의 실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만이 주님께서 오실 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방법이며, 주님께서 내게 푹 빠져드실 것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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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림초가 뭐 이래……?

2007년 12월 어느 날,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날의 수업이 끝나고 머물고 있던 수도원에 도착해서,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체조배를 위해 잠시 성당에 들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저 자신을 위해 주님께 위안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감실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제 시야에 제대 밑에 있는 대림환이 보였습니다. 정신없던 유학 첫해, 머리로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대림시기의 의미를 잘 느끼지 못했던 와중에 대림환과 그 안에 놓인 대림초를 본 후에야 ‘아! 정말 대림시기가 왔구나!’하고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림초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그 대림초는 한국에서 봐왔던 것처럼 네 가지의 색(짙은 보라색, 연한 보라색, 분홍색, 흰색)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보라색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때 ‘대림초가 뭐 이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림환은 구약의 4천 년을 상징하는 초 네 개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새로운 생명을 의미하는 ‘사철나무’로 꾸며지고, 초 네 개는 각각 통회와 보속을 상징하는 두 가지의 보라색 초와 기쁨과 즐거움의 뜻을 지닌 분홍색 초, 그리고 영광과 기쁨을 상징하는 흰색 초로 구성 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보라색 초 네 개만 놓여있는 대림환을 본 후 의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눈에 보이는 대림초의 색은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대림시기 동안 차례로 대림초에 불을 붙이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준비 자세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 34),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 36)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외적인 자세와 내면의 노력,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림시기 동안 만큼은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준비하기 위한 내면의 준비가 우선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의 준비는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번 대림시기 동안에는 하루의 분주함이 끝나는 저녁시간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대림환에 촛불을 켜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요?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켜놓은 대림초의 불빛은 각자의 가정에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주님의 은총이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이현종 세베리노 신부 - 2015년 11월 29일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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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대림시기이지요. 이 시기의 시작인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가져야 하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요즘에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안식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내년에 어디로 가세요?”

작년에 안식년을 준비한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안식년의 막바지에 서 있습니다.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부임지에서 힘차게 살 것을 생각하면서 기쁘게 빠른 시간의 흐름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어디로 갈 지는 모르겠지만, 일 년 동안 공부를 했던 것과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새로운 곳에서 펼쳐보기 위해서 계획을 오랫동안 세워두고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안식년이 끝났다는 것이 절대로 아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빨리 시간이 지나서 내년의 인사이동 날이 다가왔으면 하는 마음이 커집니다.

생각해보니 잘 준비를 하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학창시절에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해서 자신이 생겼을 때에는 빨리 시험 시간이 다가왔으면 하는 마음이었지요. 그러나 차일피일 시험공부를 미루면서 공부를 하지 않다보면 어느 순간에 다가온 시험 시간에 너무나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준비를 한다는 것은 ‘다가올 미래를 기쁘게 맞이하는가? 아니면 피하고 싶은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정적 미래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는 어떨까요? 당연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잘 준비한 사람에게 죽음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고,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 죽음은 하느님을 뵙기에 너무나도 힘든 최악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과 함께, 사람들이 하늘의 표징들을 보면 구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표징은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두려움이 생기고 있다는 것은 끝 날이 가깝다는 징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두려움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회, 경제 등의 문제를 포함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두려움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끝 날이 가깝다는 징조라고 하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방탕과 만취 그리고 일상의 근심은 세상의 종말을 경계하는 마음을 흐리게 만들어서 우리의 준비를 소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교회 전례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 스스로를 조심해서 잘 준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끝 날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5년 11월 29일
  |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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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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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 곧 세상의 마지막 때에 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님의 재림에 관해 의문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때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언제 오는가? 그 때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희망과 두려움의 감정이 서로 뒤섞여 있는 이런 미래에 대해 복음 저자는 주님의 재림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란 인간을 비추고 인간의 시간을 가늠해 주는 우주적 질서입니다. 거기에 표징들이 나타난다는 의미는 인간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하느님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십자가 죽음으로 과거의 죽음의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과 희망의 시간이 열려졌다는 의미입니다. “다시는 밤이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2,5)라는 예언처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루카 21,26)이란 결국 혼돈 속에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창조의 질서가 아니라 혼돈과 죽음이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수난의 여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보게” 될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사람의 아들”(다니 7,13)의 모습으로, 어둠을 비추는 주님이며,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28)는 의미는“나를 둘러싼 원수들 위로 이제 내 머리를 치켜들어 나 그분의 천막에서 환호의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주님께 노래하며 찬미드리리라”(시편 27,6)는 고백처럼, 세상에만 중요한 가치를 두고 살아가기에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땅만 바라보지 말고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갈증을 충족시켜 줄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박해와 순교 속에서도 생명의 주님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데 애쓰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속량(贖良)’하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복음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요점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식별이 우선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에 대한 ‘기억’을 통해 희망의 미래를 열 수 있는 바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신앙 행위가 기도입니다. ‘기도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주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고백이며 주님이 나와 함께 삶의 여정을 걸어간다는 응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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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홍승모 미카엘 몬시뇰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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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이 친구에 대한 기억은 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입니다. 솔직히 하는 행동들을 보면 별로 똑똑하지 않은 것 같았고, 또한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공부만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공부하고 있는 이 친구를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죽어라고 공부만 하니? 좀 놀기도 해야 하는 것 아냐?”

친구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될까봐.”

친구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에 가족 부양을 위해서 힘든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종종 “너희 때문에 마지못해 이 일을 하는 거야.”라는 푸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지만 가족 때문에 하고 있다는 말이 너무나 듣기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가족 부양을 잘 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다는 것이었지요.

졸업 후에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였으니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노력은 필수 조건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노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내 멋대로 살아간다면 또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에 대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과연 자신이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은 필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시고 이를 위한 준비로 한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바로 “늘 깨어 기도하여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있으며 그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을까요? 혹시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할 생각이 없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주님께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력으로 새해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우리는 각종 결심을 세우게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새로운 결심을 한 번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노력을 말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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