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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자유로운 결단
조회수 | 1,825
작성일 | 04.06.18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에 대한 이웃들의 반응이나 평가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삶의 여정에서 건네지는 이웃들의 생각과 반응은 종종 싱그러운 향기처럼 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제공하기도 하고, 마음을 지치게 만들어 의욕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 누군가가 나를 과소평가하는 태도나 행동이 엿보이면 심사가 뒤틀리고, 평상심을 잃고 미움과 분노를 폭발시킬 때도 있다. 반면에 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의 경우, 약간의 부담은 되지만 솔직히 미운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는 왠지 나를 인정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처럼 양쪽의 반응이 모두 문제가 있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반응은 공정하지 못하고 치우쳐 있음을 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일정을 마무리 하시며 새로운 시간을 향하는 길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셨다. 예수께서 무슨 이유로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당신이 야훼 종으로서 걸어야할 여정 전반을 있는 그대로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려는 뜻이 엿보인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신 이유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며 환호와 기쁨이 넘쳤던 갈릴래아를 떠나 이제는 반대받는 표적으로 고난과 죽음의 힘이 짓누르는 저승에 까지 가야하는 당신의 길에 제자들이 동참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기회를 주신다. 그분께서 제안하신 삶은 강요되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달콤한 말로 제자들을 꼬드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적인 자유로움을 통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식별의 시간이 끝난 제자에게 다음 단계로 향할 수 있도록 하신다. “먼저 자신을 버리라, 그리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 얼마나 황당한 요구인가! 언제 어디서나 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가능한 한 주인 노릇을 하고픈 존재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비우라는 요구가 말이 되는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당신이 맡겨 줄 복음의 멍에, 곧 십자가를 지고 그 험한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정말 바보 멍청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무모한 요구에 응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결론은 간단하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이 충만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구원자라는 내적인 확신과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을 비우며, 복음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투신의 단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 길은 잠시 따르다가 쉽게 내팽개치는 길이 아닌 전 생애를 걸고 응답해야 하는 길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신 질문은 그냥 궁금해서 한번 툭하고 던져본 말이 아니다. 시공을 넘어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깊이 헤아려야할 화두인 셈이다. 그렇지만 걱정 마시라! 보증수표 한 장 주시지 않았던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인천교구 이용길(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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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중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주님이 누구이신지 명확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 질문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이 어떤 모습의 메시아를 계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복음 내용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해답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라는 질문의 핵심은 다른 사람 생각이 아니라, '내 자신'이 과연 어떤 모습의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과 자신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곧 주님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간접체험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체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떤 메시아를 바라고 있습니까? 자신과 가족들 행복과 평안과 건강을 어김없이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아입니까? 슈퍼맨(Super Man)처럼 인간 능력을 초월해서, 기도 중에 끊임없이 바라고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아입니까?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한 영적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여정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초월한 신적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인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만, 묵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모든 것을 다 갖고 완벽하다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과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 중에, 그 부족한 사람은 늘 허전하고 불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고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허전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그 허전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뤄지지 않고 아직 부족한 상태, 그 부족한 빈 공간에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말은 우리의 빈 공간을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안주하던 자리를 떠나기를 꺼려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를 떠나서 낯선 곳으로 움직일 때, 공허함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공허한 빈 공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우선시 하는 숨겨진 자아를 벗어 던지고 주님을 옷 입듯이 입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갈라 3,27). 움켜진 것이 중요치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머무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다보면 주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빈 공간을 주님이 활동하시도록 내맡기면, 주님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홍승모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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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끙끙대고 있는데, 교리 선생님이 탐스런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이 빨간 사과 한 개에 다 담겨 있단다. 갖고 싶지 않니?”

소년은 벌떡 일어나 사과를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소년의 손은 사과에 닿지 않았습니다. 펄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키 큰 선생님이 들고 있는 사과까지 닿기에는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더 높이 뛰었습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과까지는 닿기에는 자신의 키가 너무 작았던 것이지요.

미친 듯이 뛰던 소년은 이제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움켜쥔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벌려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과를 소년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뜨렸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손을 가지런히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취하고자 계속해서 뛰었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나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능력의 많고 적음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시지요.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는 의견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정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 옆에 있었고, 예수님 뜻대로 실천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곧바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생각만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정답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한 마음으로 손을 앞으로 쭉 내미는 것임을 오늘 아침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명연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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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 달에 한번 있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음악피정을 한다고 공지를 했기에 날짜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가위 연휴 바로 다음 날이었거든요. 더군다나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저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음악피정이 시작하는 10시경. 저의 불안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더군요. 너무나도 적은 교우들 그리고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 피정 강의를 해주실 신부님께서는 일찍 오셔서 강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이에 반해서 좌석을 채우는 숫자는 너무나 적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찬양을 시작하면서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함께 큰 소리로 찬양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나는 이 음악피정을 단순히 한 달에 한번 치루는 일로써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 더 가까이 체험하는 것이 목적인데 어느 순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치러야 하는 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에 연연하게 되고, 날씨가 안 좋으면 안 좋아서 불만이고 날씨가 너무 좋으면 사람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놀러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단 한 사람이도 이 음악피정을 통해서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피정을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지요.

“저 역시 피정에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강의 때마다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드리겠습니다. 성사를 보실 분은 조용히 고해소로 오셔서 성사 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에게 고해성사를 드렸습니다. 저 역시 고해소에서 기도를 하면서 처음의 불편한 마음들을 하나씩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큰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고, 놀라운 것은 점점 사람들이 오셔서 음악피정의 빈자리를 채우시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재주와 능력이 중시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커 보이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주님 앞에서는 얼마만할까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인 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하는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이 보이는 예수님에 대해 들리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의 이름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 호칭을 받는 예수님에 대해 한껏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인기도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곧바로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려는 욕심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진정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해 봅시다.

조명연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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