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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조회수 | 2,186
작성일 | 07.04.27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목자와 양떼의 관계를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 관계는 주님께서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를‘안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주님께서 우리를‘안다’는 것은 분명 우리 개개인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닌, 보다 특별하고도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 눈에는 다 같이 털이 하얗고 복슬복슬한 양떼로 보일지 모르지만 목자는 그 수많은 양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목자가 어떤 양이 힘들어 하는지, 혹은 어떤 양이 목말라 하는지를 아는 것과 같은 ‘단순한 지 식’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들과 수많은 밤을 함께 지내며 얻어진 ‘사랑에서 나오는 지식’이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 속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안다’는 것은 바로‘함께 있다’, ‘서로를 깊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나는 그들을 안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깊이 헤아리고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하셨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양들은 그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충실히 알아듣고 잘 따르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한없는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혹시 주님을 떠나려고 하거나 지극한 실망감에 빠져 우리 어깨를 감싸 안으신 주님을 떠밀지는 않았는가? 목마르고 지친 양에게 시원한 그늘과 물을 주기위해 우리를 품에 안으신 주님께 발버둥이라는 것으로 응답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늘 또다시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은 ‘성소(聖召)주일’이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사명을 나누어 주기 위해 목자의 목소리로 부르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주님은 우리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시고 그것을 교회와 사회, 그리고 가정에서 많은 열매를 맺길 바라신다. 모세에게는 언변과 용기를, 사무엘에게는 하느님의 영을, 바오로에게는 회심과 지식을 주시고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 각자에게도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부르셨다. 우리도 생활 안에서 성소를 되새겨 보면서, 우리가 받은 소명을 충실히 삶 안에서 실현해 갈 것을 다짐하자.

정진성(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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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목자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 부르심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미사가 되도록 하자.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기리는 착한 목자의 주일을 맞아 또한 교회의 목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 하는 날이다.

복음: 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를 입증해 보여 달라고 한다(요한 10,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탓하시면서 그들이 당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10,25-26 참조). 이 유다인들의 요구는 진실하지가 못하다. 예수님의 말씀이든 업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양떼에 속하고 속하지 못하고는 그분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집이나 판단을 주님께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는 데 달려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주님 앞에 단일한 양떼를 이루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 따르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양떼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으로 시작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는 말씀에서 기쁨과 평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은 악의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보루의 역할을 한다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이다. 이 관계로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진실한 양떼가 되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단일한 신앙, 단일한 사랑, 단일한 행동, 일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성삼위의 일치의 모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들 상호간에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은 그들을 알고’ 그래서 ‘그들이 그분을 따른다’(27절)는 사실을 세상에 입증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목자는 ‘권력’을 가지신 분의 모습보다는 ‘사랑’을 가지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2독서: 묵시 7,9.14b-17: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옥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묵시 7,14.17). 그분은 어린양으로 살해되셨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분’이 되셨으며, 나약하게 되셨기 때문에 인간들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셨다. 이 ‘어린양’이 어떤 점에 있어서 자기 양떼를 보호할 힘과 권능을 행사하시는 ‘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요한 10,11) 사람들을 지배하려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까지 사랑과 봉사를 베푸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15).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당신 양떼를 다스리는 목자가 되신다.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계신 하느님! 이것이 살해당한 어린양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렇게 해서 그분은 당신 양떼의 목자가 되셨다.

제1독서: 사도 13,14.43-52: 당신들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현존의 형태는 세상에 ‘목자’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교의 지름길일 것이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전교의 성공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49절). 그리고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들을 거슬러 주어진 박해를 당하여 이고니온으로 갔을 때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52절).

만일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형제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들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에게로 항상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조욱현 신부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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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생명에로의 부름”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이루는 ‘사제직’과, 교회의 생명과 성덕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봉헌생활’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받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성소(聖召)’는 ‘거룩한 부르심’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모든 이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창조’입니다. 왜냐하면 부르심은 죄로 멀어진 인간을 다시 당신 품으로 모아들이시기 위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고, 그 어떤 것에게도 우리를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간절한 외침’이며, 우리가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는 ‘생명에로의 부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소를 직무에만 연관지어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특별한 부르심만 생각하다가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고 또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단순한 ‘무지’는 부르심에 대한 외면과 응답에 대한 망각을 가져오며, 망각은 말씀에 대한 무관심을, 무관심은 생명과의 단절을, 단절은 우리의 삶에 죽음을 가져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각자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지나치지 않고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대한 자각’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로이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 안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는 이들에게 강한 사랑과 열정을 보이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며, 우리 자신은 하느님 앞에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삶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고 내면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쁨으로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생각하여 행하고 더욱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마음과 몸과 정신과 힘과 영혼을 다해 응답하시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첫 사람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부활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열매이며, 하느님의 부르심은 부활, 즉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니 그 초대에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에 마음을 다하여 귀 기울입시다.

이건희(안드레아) 신부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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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꽃이 되고 싶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 주일입니다. 부활의 은총을 충만히 받는 이때,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요한 10,27-30 참조)이 진정한 부활의 삶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시(詩) 중에 김춘수(1922-2004)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를 읽으면서 가만히 묵상하다보면,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이렇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신앙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게 여기고 있는지, 다른 어떤 신이 아닌 하느님을 알게 해 주신 이 신앙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됩니다.

살다보면 이 세상에서 나를 인정해 주고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부족한 것이 많고,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누군가 쓸모 있고, 필요한 존재라고 여겨 불러준다면 그것만큼 기쁘고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며, 분명 그러한 상황이라면 난 엄청난 노력과 열정으로 그 부름에 대한 보답을 쏟아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아무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지만, 그러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제자로 부르셔서 나만의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나의 생각을 아시고,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삼아 그러한 나의 소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나를 의미 있는 존재로 불러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 채 닫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내 현실이라면 하루빨리 이 어둠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활해야 하겠습니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 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4월 17일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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