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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조회수 | 2,027
작성일 | 07.04.27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고 표현되던 하느님의 모습은 예수님에게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나서 마침내 양을 찾고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루가 15,5)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일반적으로 양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목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양떼를 돌보며 보살피는 이였습니다. 물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양을 돌보는 ‘척’하는 삯군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착한 목자라고 부를 때에는 삯군과는 달리 자신을 희생하며 양들을 지키는 끊임없는 보살핌과 사랑의 정을 담고 있습니다. 나아가 양떼들이 마음껏 뛰놀고 양껏 풀을 뜯어먹을 수 있도록 풀밭으로 인도하듯,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4주일인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은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양들을 잘 안다고 말씀하신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양떼인 우리들이 겪고 있는 삶의 애환을 비롯한 아픔과 고통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며, 저마다의 처지와 상황을 잘 알고 계신 분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그분을 따를 때 비로소 우리 각자는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를 누군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장 빛나는 부분, 하나의 ‘꽃이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이미 하나의 꽃이 되었습니다. 다만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하나의 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기 위해서 믿음과 사랑을 갖고 부르심에 대한 확고한 응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나아가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 주도록’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소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나를 살리고 또한 남을 살리는 ‘그의 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심원택(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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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초기 교회가 그분이 어떤 목자이신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시편 23장을 노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고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을 인도하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계셨고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은 그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체는 태어나면서부터 살기 위해 또 성장하기 위해 힘씁니다. 식물이 햇빛을 향해 뻗어나가고, 동물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현상이 모두 생명체가 지닌 개체유지 본능의 발로입니다. 인간에게도 그 본능이 있어서 재물을 비축하고, 권력을 얻어, 강하게 살고자 하며, 노후 대책을 마련하여 오래 동안 무사히 살 것을 바랍니다. 인간은 공부하여 그 사회가 인정하는 자격증을 취득하여 그 분야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되고자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로 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 안에서 개체유지를 효과적으로 하겠다는 본능적 욕구가 작용하여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입니다. 이 욕구는 인간이 사회 안에서 떳떳이 또 활발하게 사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 욕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욕구를 긍정하고 칭찬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그 욕구가 자유롭게 충족되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어 보호합니다.

신앙인은 인간 욕구를 충족시키는 질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다른 질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신앙인은 그 나라의 질서를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욕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를 살아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가치관으로 된 질서, 곧 하느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인류 안에 있는 개체유지 본능은 이기적 욕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만 열심히 살아서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가 권장하던 것이 각자 율법을 잘 지켜서 자기 한 사람 잘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이웃을 돌보고 가엾이 여겨야 한다는 이스라엘 초기의 신앙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적 믿음이 되었습니다.

인류 안에 있는 개체유지 본능은 또한 자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망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율사와 제관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역할을 빙자하여 스스로를 과대평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종교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는 권위주의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오는 망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그런 이기적 신심과 지도자들의 권위주의를 배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아버지의 생명이 열어주는 질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베푸셔서 이 세상에 생명들이 살아있게 하십니다. 하느님에게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하느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버리지 않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친 몹쓸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말씀으로 그 사실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그분의 질서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바로 그 자비의 질서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개체유지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만자족할 수도 없고, 자화자찬할 수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과대 망상할 수도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낮추어 대가 없이 봉사하는 질서를 가르치셨습니다.

개체유지만을 생각하는 좁은 자기의 세계를 벗어나 대가 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열어주는 넓은 질서를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개체유지에 골몰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질서의 세계를 향해 나선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그들은 나를 따른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좁은 세계는 인간 개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잘되어 보겠다고 이해타산하며 전전긍긍하는 세계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면서 환희에 젖는 체험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우리의 지상 생존이 끝나면서 함께 없어지는 세계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대중가요의 한 마디가 그 세계의 허무를 대변합니다. 이웃과 경쟁하고, 미움에 젖고, 분노에 시달리다가 빈손으로 떠나야 하는 세계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의 세계에는 ‘내어주고 쏟음’이라는 질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또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살기에 그분과 더불어 지속되는 세계에 삽니다. 예수님이 사셨고 또 부활하여 사시는 세계입니다.

한국 교회는 오늘을 성소(聖召) 주일로 정하였습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와 수도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관심을 기울이자고 제정한 날입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는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대가 없이 ‘내어주고 쏟는’ 하느님이 중심이신 질서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이 길은 생존 경쟁에 자신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도 받고 생계도 유지하고자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한 사람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 신앙인 모두는 각자 자기의 능력대로, ‘내어주고 쏟음’을 삽니다. 예수님이 펼쳐놓으신 하느님 중심의 세계로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서공석 신부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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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지금은 아득히 오래된 기억으로 낡은 사진처럼 가물가물해졌지만, 어릴 때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해가 저물 무렵, 각 집에 저녁식사가 차려지면서 동네는 한순간 부산해집니다. 식탁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이름을 부르는 목청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 때문이지요. ‘영찬아!’ 만화방에서, 골목 한구석에서 놀이에 몰두하던 저를 찾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셨던 부모님은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 있던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들게 고생하며 마련한 음식을 자식에게 먹이려는 어버이들은 이렇게 자식들의 이름을 불러 그들을 생명의 식탁으로 모읍니다.

오늘 복음에도 이런 심정으로 이름을 부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들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요한 10, 3). 목자와 양들 사이에 이뤄지는 이런 광경은 삭막한 도시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낯설지만, 양들이 각자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이름을 정겹게 불러주는 목자가 있고, 게다가 그 목자의 목소리를 즐거이 알아듣는 양들의 모습이 훈훈하게 다가옵니다. 바로 이 포근한 정경 안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우리를 매일 살게 하는 생명의 흐름이 보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주며 사랑해주는 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 이 목소리를 듣고 응답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행동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과정이며 결과입니다. 나를 부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살아 있는 연결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물론 이 소통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같은 존재등급인 사람끼리도 서로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목소리만 크게 질러 대는데,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그 고유한 존재 치를 존중하며 정성스럽게 부르면, 그 목소리에 하느님의 부르심도 함께 있다는 것! 이 하느님의 목소리가 어둠과 혼돈으로 방황하는 어리석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큰 울림으로 퍼져야 함을 각성하는 것! 오늘 기념하는 성소주일은 이런 부르심을 자질구레한 내 일상에서 찬찬히 경청하면서 충만한 삶을 일구자고 말합니다.

노영찬 세례자 요한 신부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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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성소의 삼각끈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예전 우리 어릴 때에는 성당 다니는 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부님, 수녀님이 되는 것을 꿈꿔보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신부님, 수녀님은 커녕 아이들이 결혼이라도 제대로 할 지 걱정이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사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가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지고 희생을 힘들어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희생이 기쁨이고 행복이며, 먹고 사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기를 기도해 봅니다.

하루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와글거리는 성전에서 아이들과 성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성소라는 어려운 단어 속에 집중하지는 못하였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단어 속에 숨은 거룩한 부르심을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바빴습니다. 사제 성소! 수도 성소! 결혼 성소!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그 어떤 성소를 택하더라도 모두 하느님과 하느님의 양들을 위한 일임을 설명하여야 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얘들아!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우리들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란다. 쉽게 말하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들이라는 이름의 양들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늘나라야.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데 그 노력의 방법을 세 가지로 나누면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 결혼 성소가 된단다.

성소란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는 뜻이야. 그럼 사제 성소는 뭘까? 바로‘하느님, 당신의 양들을 보살필 목자를 보내주세요!’라고 우리가 기도하고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목자를 보내주시는 일이겠지? 그럼 수도 성소는 뭘까?‘하느님, 당신의 양들과 목자를 위해 기도할 사람들을 보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봉사자들을 많이 보내주시는 일이겠지? 그럼 결혼 성소는 뭘까? 목자가 많고, 목자랑 양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자가 아무리 많아도 양들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는 완성될 수 있을까? 없겠지. 그래서‘하느님, 당신 우리 안에 양들이 넘쳐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일이란다.”

사제가 부족하던 시절 우리는 사제 성소를 강조하다 보니 마치 성소란 사제 성소에 국한된 이야기처럼 되어버렸고, 수도 성소도, 결혼 성소도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소란 완벽하게 세 가지 사랑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길을 택하든 하느님 나라는 이 세 가지 성소의 방식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산교구 김기태 신부 : 2016년 4월 17일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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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양떼와 착한 목자

이스라엘 광야에 나가면 베두인족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양떼를 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강한 햇볕에 물도 찾기 힘든 광야에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우물이 광야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우물은 생명,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는 우물이 있는 위치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목자가 우물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면, 양떼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당신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우물인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당신의 양떼를 그분께로 이끌어 주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그들을 알고 그들이 당신을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도 목자들의 삶의 체험이 잘 녹아 있습니다.

광야의 우물은 그 수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함께 모여 물을 먹이곤 합니다. 이런 모습은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는 장면(창세 29,1-14)과 모세가 우물가에서 미디안 사제의 딸들을 만나는 장면(탈출 2,16-22)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함께 양떼에게 물을 먹이다 보면, 양떼가 섞여 어느 목자의 양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양떼들에게 표식을 해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양떼를 일일이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목자들에게는 이 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양들이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주인이 부르면 그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떼가 주인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면 양떼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양떼는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우물물, 곧 생명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이들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거나, 목소리를 알아듣더라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영원한 생명의 물을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당신에게서 양떼를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를 늑대나 적들의 손아귀에서 항상 지키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양떼를 버리고 도망치는 나쁜 목자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떼를 지키는 참된 목자이십니다. 더 나아가 행여 길을 잃은 양이 있다면 마지막 하나까지 찾아 나서서 데려오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의 양떼 가운데 생명의 물을 마시지 못할 양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양떼를 아끼는 이유는 당신이 남의 양떼를 맡아 기르는 직업적 목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맡기신, 곧 당신의 소유이신 양떼를 직접 기르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을 하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양떼를 당신의 양떼로 여기며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놓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참된 목자이며,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기억합시다. 아울러 성소주일을 맞아 선하신 예수님을 닮아 진정으로 양떼를 사랑하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태어나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간청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4월 17일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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