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9 52.4%
[서울] 서로 사랑하여라
조회수 | 2,370
작성일 | 07.05.03
인도의 대표적 인물, 마하트마 간디에게는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 탄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철로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어서 간디는 신발을 주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함께 동행 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역시 간디는 따뜻한 사랑을 지닌 큰 사람인 것 같습니다. 기차가 떠난 후에도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남의 탓만을 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요?

평상시에는 큰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하다가도 정작 실천이 요구되는 결정적 순간에는 아주 편협한 소인배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 일반적 모습이지요. 주저하지 않고 남은 신발 한 짝마저 떨어뜨리는 간디의 모습에서 우리는 몸에 밴 이웃 사랑의 깊이를 실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전혀 새롭게 들리지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며, 사랑 때문에 아파하며 사는 인간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난의 기나긴 밤이 시작되는 이때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하게 들려주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이 우리가 알고 바라는 사랑과는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는 우선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 때입니다. 나보다 잘생기거나 예뻐야 하고, 남부럽지 않은 배움에 재산도 제법 소유하여 무엇인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모든 중심이 나이지요.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이렇게 나 중심의 사랑이기에 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사랑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거나 사랑을 하다가도 미워하고 분노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사랑하고 싶어하는 대상이고 우리들의 사랑 방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나 중심의 사랑이 아닙니다. 나에게 무엇인가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에 한한 사랑이 아니라 전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었으며, 버림받고 소외되어 무엇 하나 도움 될 것이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손해 보는 일 같지만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새 계명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그 방식대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예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흐름대로, 또 나의 욕망대로 살아간다면 사랑하기를 원하면서도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미워하며 원수 같은 관계로 끝나버리는 끝없이 공허한 관계만을 겪을 뿐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품고 실천하며 살아가면 그 풍요로움에 내가 놀라고 세상이 놀라며,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하신 예수님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욕망에 따른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을 먼저 헤아리는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이 우리 가슴에 심어져 자라고 열매 맺게 되는 때는 그 말씀을 실천할 때입니다. 그 때 우리들의 사랑도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449 52.4%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명’

198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장인 고(故) 마더 데레사 수녀를 영국의 방송기자가 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기자는 데레사 수녀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평생을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왔는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데레사 수녀는 주름진 얼굴을 들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버림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다만 살아 있는 몇 시간만이라도 느끼게 해 주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지요.”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이란 말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많이 노래하고 가장 많이 바라고 꿈꾸는 낱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마도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아닐까요?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참사랑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 보잘것없는 이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을 본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고 포기해도 하느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 사랑의 원리를 깊이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사랑의 참모습을 보였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요한 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바로 사도들을 통해 이어진 교회 공동체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정신을 계승한 교회가 사랑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며 부활의 신비를 가장 힘 있게 증거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가정은 작은 교회이기도 합니다. 내 가정이 비록 가난하고 초라할지라도 그 곳이 사랑의 계명이 시작되는 곳이며 은총의 장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다니는 직장이 비록 고달프고 힘든 곳일지라도 그 곳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원리가 새롭게 적용되는 은혜로운 장소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감지영 사무엘 신부
  | 05.01
449 52.4%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계명

부활 5주일을 맞이하는 교회공동체는 그 둘째 독서로 요한묵시록 21장을 읽게 됩니다. 앞선 20장에서 묵시록의 저자는 사탄의 멸망과 생명의 책에 따른 심판이라는 어둡고 두려운 주제를 다루고는, 이제 21장부터는 마치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이 동터오는 듯한 밝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2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미 등장합니다. 먼저 이사야서 65장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그리고 66장에서 이 표현은 또 한번 사용됩니다: “정녕 내가 만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서 있을 것처럼 너희 후손들과 너희의 이름도 그렇게 서 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이사야서에서 예언되고 묵시록이 이어 받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하늘과 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의미하는 바는 ‘온 세상’이며,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새로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새’ 세상이 전제로 하고 있는 ‘헌(?)’ 세상은 어디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창세기 1장 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창세기의 서두에서 우리는 이사야서와 묵시록이 말하는 헌 세상을 만납니다. 그 ‘헌 세상’이란 바로 태초의 창조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만들어주신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해 그 하늘과 땅의 질서가 무너지자 이제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를 희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사야서와 묵시록이 꿈꾸는 ‘새 하늘과 새 땅’, 즉 성경의 종말신학입니다.

오늘의 독서인 묵시록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선포한다면, 오늘의 복음인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새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성경을 찾아보면 의외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임을 분명히 밝히는 신약성경의 몇 대목이 있는데, 바로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이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옛 세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옛 생명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종말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옛 세상에는 옛 질서가 있었듯이, 새로운 세상에는 새 질서가 요청됩니다. 그 새로운 질서를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요약하십니다. 이렇듯 부활 5주일을 맞이하는 공동체는 새로움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말씀들과 맞닥뜨립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희망이었고, 요한의 희망이었으며, 오늘 부활 5주일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최승정 신부
  | 05.01
449 52.4%
오래전 선배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본당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활동하시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침 일찍부터 매일같이 새벽미사에 오셔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성당의 여러 봉사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성당의 모든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살아 있는 성녀’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할머니의 장례미사를 치르고 난 후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성당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할만큼 열성적인 신앙인이었으니 며느님도 그분의 뜻을 받들어 예비자 교리에 나오세요.”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흔들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싫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겠습니다. 제가 성당에 나가게 되면 죽어서 천국에서 시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될텐데, 생각만 해도 정말 싫습니다.” 집 밖에서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던 그 할머니가 정작 함께 살고 있던 며느리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행위는 사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말씀은 없지만, 이것만큼 실천이 어려운 말씀도 없습니다. 미움과 증오에 빠지기 쉬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 입니까? 그래서 사랑에는 의지가 필요하고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웃 사랑은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질 때에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말처럼 쉬운 것은 없습니다. 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며 거짓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의 마음과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어떤 사랑의 행위라도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강요되는 계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당신들, 그리스도인이 우리와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삶,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으로 보여 줄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간디가 남긴 유명한 말을 한번 쯤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04.27
449 52.4%
[서울]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쉽게 실천할 수 잇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바오로 사도는 율법주의를 추구하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공동체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로 자기가 박해한 주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신 주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르나바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한 후, 주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깨닫고 바오로와 함께 주님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새 하늘 새 땅이 된 안티오키아를 방문하는 영광을 갖게 됩니다.

안티오키아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방인의 교회 탄 생을 확신하기 위해 방문한 곳입니다. 그들의 방문 전,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미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체험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신앙의 문이 열린 공동체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이 공동체는 묵시록에 기록된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증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 하늘 새 땅이 주님에 대한 믿음 이 형성된 안티오키아 이방인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처럼 사랑의 실천을 나누었기에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인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과 성삼의 사랑을 체험한 공동체와 사도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열망으로 불타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느낀 풍요로운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발전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이 곧 새 하늘 새 땅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기 쉬워집니다. 또한 자신의 생활에서 하느님이 주시 는 감동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미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임을 체험하고, 감사하는 삶,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 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 서울대교구 김창훈 베드로 신부 : 2016년 4월 24일
  | 04.23
449 52.4%
[서울]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

1. 부활 시기에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기

예수님의 부활을 집중적으로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는 약 두 달의 기간이지만, 잠시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하기야 우리는 십자가를 항상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냥 십자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십자가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더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제10처의 기도에서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니다. 스스로 옷을 벗으면 몰라도, 남이 옷을 발가벗기니 얼마나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을 당하다니 말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그분의 어머니와 남녀 제자들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하던 정치범에게 내려지는 사형 집행 방법인 십자가 처형은 죽어가는 사형수에게 극도의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고통스러워서 정신을 잃으면 신 포도주를 먹여 정신을 차리게 해서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고통을 겪도록 했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누구든 독립을 꾀해서는 안 된다는 로마제국의 잔인한 엄포가 담겨 있습니다. 집안에 사형당한 사람이 있으면 일가친척까지 움츠러들어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속한 단체도 크게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2.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분이 있으니, 바로 요한 성인이십니다. 그분은 요한 복음서를 집필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확신에 가득 차서 설파하셨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1-32).

예수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께서 술이 떨어졌다고 사정하자, 냉정하게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5).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때에는 각오를 다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

3.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

그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부활입니다. 죽음에 승리를 거둔 생명의 영광입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다.” 요한 복음 17장에서 요한 성인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의 때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였습니다. 부활의 영원한 생명이 십자가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미사에서 진지하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4.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은?

그 생명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흔히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 진실성은 영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활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4월 24일
  | 04.2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28   [의정부] 오직 사랑만이  [3] 2293
127   [군종] 용서의 삶  [4] 2269
126   [대구] 용서와 사랑  [3] 2171
125   [춘천/원주] 간절한 통회의 마음  [4] 2427
124   [인천] 작은 사랑  [7] 2370
123   [안동] 예수님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3] 2310
122   [부산] 이런 저런 생각  [4] 2110
121   [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8] 2518
120   [대전] 참회  [4] 2342
119   [수원]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5] 2456
118   (녹) 연중 제11주일 독서와 복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4] 1873
117   [전주] 매일 체험하는 기적의 삶  1238
116   [마산] 젊은이야, 일어나라  864
115   [수원] 주님을 만난다  [1] 833
114   [대전] 우리의 힘  [1] 1063
113   [수도회]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며...  [1] 786
112   [인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2] 1219
111   [의정부] “예수님!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1] 1096
110   [서울]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  [2] 1177
109   [안동] 살리시는 하느님  [2] 1070
108   [부산] 함께 계시는 예수님  [4] 1202
107   [대구]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1] 1137
106   (녹) 연중 제10주일 독서와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2] 1026
105   [수도회] ‘평화를 주고 간다.’   2000
104   [광주/전주] 사랑이라는 평화  [1] 2208
103   [마산] 두 부류의 삶  [1] 2247
102   [수원]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3] 2551
101   [춘천/원주] 세상 속에서 자유, 평화 나누자  [2] 2369
100   [청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702
99   [의정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431
98   [인천] 평화와 미소  [4] 2512
97   [안동] 성삼위 하느님과의 친교를 열어주시려  [3] 2362
96   [서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  [5] 2501
95   [부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5] 2241
94   [대구] 우리의 평화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3] 2406
93   [의정부/대전/군종] 참 평화  [5] 2437
92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3] 1855
91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 1663
90   [수도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 1640
89   [군종] 예수님은 내게 행복을 주시는 분  [2] 2152
 이전 [1]..[11][12][13][14][15][16] 17 [18][19][20]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