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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그리스도를 입는 사람
조회수 | 1,859
작성일 | 04.06.18
신부가 되고 싶어서, 신부가 되려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신학교 시험 후 면접을 보았습니다. 면접 도중 신부님께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좋아하는 성서 구절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준비해 갔던 구절을 이야기 했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24) 나보다 먼저 신학교에 입학한 형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서구절을 미리 준비해 갔던 것입니다. 선배 형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성서를 들고 멋있는(?) 구절을 찾았지요. 어떤 구절을 이야기를 하면 교수 신부님들이 나를 잘 평가해 줄까? 어떤 구절을 이야기하면 높은 점수를 줄까? 뭔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그러한 구절을 이야기를 하면 교수신부님들도 감동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24) 저의 답을 듣고 교수신부님께서 물으시더군요. '왜 그 구절을 택했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죠. '예수님을 위해 저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 저의 대답 덕택인지 저는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그때의 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겠다는 마음보다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교수신부님들께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모습.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 마음으로 이 구절을 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오늘 독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으로서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부족하고, 못나고, 더러운 나의 모습들, 우리는 주님 앞에 너무나 부족한 존재들이기에 부족하기도 하고, 못나기도 하고, 더러운 모습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지금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나의 모습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 바로 오늘 1독서에서 이야기하듯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연인의 마음으로 그분 앞에서 눈물 흘린다면 주님은 그 모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참 좋으신 분이니까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봅시다.
다시금 제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안토니오! 넌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원주교구 배현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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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1차 수난 예고 / 지속적인 신앙성찰.변화 필요

피아제에 의하면 인간은 동화와 조절이라는 과정을 통해 지적능력을 발달시킨다고 합니다. 여기서 동화란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구조에 맞추어 융합시키는 과정이고 조절은 현재의 인지구조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새로운 이해구조를 만드는 과정인데 인간은 이러한 동화와 조절을 통해 지적능력을 발달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현재의 인지구조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 때, 다시 말하면 조절이 필요할 시기에 사람들은 평형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때 새로운 인지구조를 형성하느냐 못하느냐가 인간의 발달을 가름하는 표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지구조」란 말이 어렵다면 「이해의 틀」 혹은 「이해 방식」 정도로 이해하면 되고 요는 새로운 이해를 위해 계속적인 자기 변화가 발달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는 부분만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다른 부분을 받아들임, 나의 생각과 다른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자기변화,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과 배치되는 타인의 그것을 존중함, 새로운 사실을 찾기 위한 열려있는 마음과 자신의 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 이러한 자세가 발달과 성숙을 가져오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 5000명을 먹인 빵의 기적에 이어지는 베드로 사도의 메시아 고백과 예수님의 1차 수난예고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당신이 장차 고난 받고 배척받을 메시아란 사실을 알려주고 제자들도 자신들의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오늘 복음을 보면서 시선이 가는 부분은 베드로 사도의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실 이 두 부분은 미묘합니다만 대립되는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도란 말은 매우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용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그리스도라 함은 로마의 지배에서 그들을 구해 줄 정치적인 메시아, 즉, 세상의 권력자를 뜻하는 영예로운 칭호로 세속적인 부귀와 화려함, 그리고 성공과 양지라는 느낌이 흠씬 묻어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말이 세속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5000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전하는 요한복음 6장 14절, 『이분이야 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라는 구절을 참조한다면 베드로 사도의 대답 안에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상이 들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그리스도란 말과 대립되는 의미, 다시말하면 베드로 사도가 의식하지 못하는 새로운 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올바른 신앙 고백이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개선하고 옥좌에 앉는 메시아가 아니라 수난 받고 고난 받는 메시아, 영광의 길 승리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이 그리스도가 가야할 길이란 사실을 천명하면서,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의 양지를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을 각오를 하라는 말씀으로 베드로 사도의 잘못된 기대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오늘 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도 머리로는 받아들이려 하지만 몸이 거부하는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베드로 사도의 이해 틀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이 말을 듣고 안 된다고 펄쩍뛰었다』(8, 32)고 적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 사도의 일생은 자신의 이해 틀로써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받아들이기 위한 자기 변화가 바로 그분의 일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베드로 사도와 예수님의 대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길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과 「우리 욕망과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길」, 그러나 「그분이 추구하고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이기 위한 계속적인 자기변화가 바로 신앙의 길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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