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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서로 사랑하여라!
조회수 | 2,161
작성일 | 07.05.04
다음 글은 한 병원의 간호사가 쓴 글입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의 일이다. 젊은 처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내가 막 출근하자마자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사람은 왠지 무척 초조하고 창백해 보였다. 그들은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마침내 처녀의 어머니가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저 의사선생님, 제 딸이 다음 달에 시집을 가는데...” 그녀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옆에 앉아 있는 딸의 손을 감싸 쥐었다가 펴더니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제 딸이 어렸을 적에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잘못해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그런데 손가락 네 개는 어릴 때 이식을 시켰는데, 나머지 한 손가락은 아직 이식시키지 못했어요. 저, 선생님, 지금도 이식 수술이 가능할까요? 딸이 시집 갈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어서 저 애나 저나 매일 눈물이에요. 저의 손가락이라도 이식시키고 싶어서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 왔습니다...” 어느새 그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네. 이식 수술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떤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결혼 할 날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반지 낄 손가락이 없는 딸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이식시키려는 어머니의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고 말았다.

방금 소개해 드린 글은 “손가락을 이식시켜 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시집보낼 딸을 생각하며 자기 손가락을 이식시켜 주고자하는 어머님의 마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입니다. 딸을 그토록 사랑하기에 자신의 신체의 일부라도 아까와 하지 않고 내어주어 딸의 행복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이것이 진정 사랑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이 아니라 당신의 몸과 피를 송두리째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람을 느끼셨는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성체 안에 현존해 계시면서 몸소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신 예수님, 스승이시면서 어떻게 그토록 겸손하십니까? 몸 둘 바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스승인 내가 본을 보여 주었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라”하시며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설득력이 있으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사랑의 계명이 새 계명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랑 자체가 새로운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곧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이 세상에 현존하신다는 징표이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참사랑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 위에서 당신 생명을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하신 사랑, 조건 없이 다 내어 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딸을 사랑하기에 자기 손가락이라도 잘라 이식시켜주고자하는 그 어머님의 마음, 그것이 참사랑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만큼 우리도 서로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실천할 때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합시다!

안동교구 정상업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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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면서도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

얼마 전 성당에 어떤 남자분이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복장에 가방을 짊어지고 오신 그분은 몇 일전에 교도소에서 출소를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출소 전에 알아두었던 직업훈련소에 막상 가보니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받아주기가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왔다고 합니다. 그곳을 다녀오느라 출소할 때 주머니에 있던 돈도 다 써버리고 다시 다른 직업훈련소를 찾아서 가려고 하는데 차비는 없고 배도 고파서, 답답한 마음에 성당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얘기를 한참 듣고 어디에서 무슨 잘못을 저질러 다시 교도소 신세를 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가서 적응 잘하고 건강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말을 해드리며 차비와 식사비를 드렸습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릴 거라면 미련 없이 드리고 말 것을 왜 그리 고민을 했었을까?’ 사실 그분과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제 머리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습니다. ‘이 사람 말이 사실일까?’, ‘돈 생겼다고 술 마시는 것은 아닐까?’, ‘정말 새로운 마음으로 살 의지가 있을까?’, ‘내가 지금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혼자서 머리를 굴렸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 뒤통수를 한 대 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야 이놈아! 나는 너한테 한두 번 속은 줄 아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온 생을 바치셨던 분, 깨우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분,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분, 스승의 마지막 수난 길을 보면서 두려워 도망친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으셨던 분, 스스로를 십자가 희생 제물로 내어 놓으시면서 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셨던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실망과 좌절도, 원망과 증오도 타올랐을 삶에서도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실망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셨던 당신의 마음, 제자들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셨던 그분의 마음을 알고 닮아서, 이제 서로 사랑하라고, 그것이 제자다운 삶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또 속을 것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사랑을 부어줌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자라날 수 있음을 확신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예수님의 희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춘 것도 아닙니다. 제자로서 살아가겠다고 말하면서도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실수하는 우리들이지만, 믿어주시고 일으켜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그 사랑으로 남을 살릴 수 있음을 깨우쳐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한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내가 아닌가, 조건 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베푸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조건을 요구하고 있는 내가 아닌가. 속을 것을 아시면서도 다시 한 번 더 속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음을 묵상해보고, 우리가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며, 그리스도 제자가 되어가는 길임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안영배 요한 신부
  |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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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에는 참 잘 어울리고 정이 넘치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맞벌이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서로를 위해 주는 모습에 다들 부러워하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게 되면서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에 맞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한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봐도 다들 전혀 그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여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느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한 형제님께서 찾아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자기들을 부러워하고 참 행복한 것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심하게 다투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사제관으로 찾아 왔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갈등의 시작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것이었습니다. 형제님은 모든 것을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데 아내는 단 한 번도 고마워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가 큰 맘 먹고 해준 선물들조차도 그냥 버려둔다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반찬 때문에 싸웠다는 겁니다. 자기는 생선이 싫은데 아내는 생선을 너무 자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꼭 생선 머리는 자기를 준다는 겁니다. 그동안은 참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또 생선구이를 해서 머리를 주기에 안 먹고 있었더니 혼자서 다 먹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밥도 안 먹고 싸움만 하고 출근했다는 겁니다. 사소한 이야기 같긴 한데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기분이라도 풀어주려고 내가 자매님께 잘 이야기 해보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달래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미사 후에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매님 이야기는 달랐습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은 생선 머리가 제일 맛있다고 잘 먹기에 자기는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양보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은 뭐든지 자기 식으로 한다는 겁니다. 옷을 사도 자매님께 색이나 모양을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비싼 것을 사오고, 또 그것을 바꾸면 자기가 한 선물을 성의도 모르고 바꾸었다고 뭐라고 하면서 자기가 사준 것을 입고 다니라고 강요하니 미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맞벌이를 하다 보니 주말에는 같이 외식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가족이 함께 하면 좋은데 남편은 주말만 되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니 싫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교우들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답답하다는 겁니다. 결국은 두 사람을 같이 불러서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두 분이 서로 배려해 주는 것은 좋은데 무엇인가를 해 주기 전에는 반드시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어떻게 하는 게 당신 마음에 드는지 꼭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단 한 번만이라도 이게 좋은지 물어보기만 했어도 다툴 일이 없었을 텐데 그게 문제였던 겁니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맞춘 사랑을 한 것이지 결코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랑은 반쪽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나만의 희생으로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을 위한 나의 희생이 있어야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상대방을 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이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또 다른 사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을 하도록 합시다.

안동교구 김원현 신부
  |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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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일이며 4월 마지막 주일이다. 어떤 시인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자연에는 한없는 풍요로움이 시작되는 달이지만, 물질에 점점 노예가 되고 정신마저 황폐해져 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산과 들의 생명 있는 온갖 것들이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날마다 푸른빛을 더해 간다. 하지만 '꽃보다 아름답다'는 우리네 인간은 생명의 빛을 점점 잃어가고 어느덧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는 못된 욕심의 그물에 갇혀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다. '아생연후살타'는 약점을 살피지 않고 무모하게 상대의 돌을 공격하다가는 오히려 해를 입는다는 바둑 격언이다. 그러고 보면 4월이 잔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못된 심보가 점점 잔인해져 가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잔인함은 무자비한 것이다. 무자비함은 인정도 사정도 없다는 뜻이다. 인정과 사정이 없다면 거기에는 일말의 믿음도 없게 된다. 믿음이 없다면 사랑도 없을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정의와 평화도 없다. 정의와 평화가 없다면 희망도 없어지게 된다. 결국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없어져 가는 곳엔 잔인함만 남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점점 잔인하게 돼가고 마침내 황폐해져 갈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부활이시고 생명이시고 희망이신 분이 점점 잔악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건네시는 새 계명은 곧 '사랑'이다. 흔히 인간이 만든 수많은 언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나 또는 그런 관계나 사람' 혹은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마음을 베푸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의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만 좋아하고 아낄 뿐, 여전히 잔인함이나 무자비함 등을 극복해낼 수는 없다. 좋아하거나 아낌이 없는 사각지대에는 여전히 무자비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건네주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사랑이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 이하)라고 하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2,34)하고 이르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에 관한 정의에 대해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1서에서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1코린 13,6).

요즘 사람은 흔히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곧 사그라지고 말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가장 어설프고 추잡스런 언어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실 사랑은 영원해야 하며,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 관계는 물론이고 남녀 관계에서도 영원해야 한다. 영원하지 않다면 더는 사랑이 아니다. 사람들은 욕심에 의해 마음이 굳어져 가고 정신이 황폐해져가고 있는 것을 두고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느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 안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1요한 4,16-17)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 사랑의 약속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된다. 다만 깨어지고 부러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의 나약한 마음이다. 그의 양심은 나약하고 못된 욕심 때문에 가려져 버리고 무뎌버렸을 따름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오히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1요한 4,18).

지금 우리는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참된 사랑을 모른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날마다 늘어나는 것은 이기적 욕심과 질투, 시기, 증오, 교만 같은 못된 마음이다. 이는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 학벌과 재벌과 권력과 명예를 사랑보다 더 중시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랑을 모르니 믿음이 사라진다. 믿음이 사라져가니 희망은 점점 절망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자리에 전쟁, 불신, 불목 등이 자리하게 되니, 참된 의미의 정의와 평화는 퇴색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찾아내기란 점점 어려워진다. 사랑이시면서 사랑을 위해 돌아가시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분이 건네주신 그 사랑을 회복하는 길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다.

그 사랑의 길을 우선 그분을 믿는 이들이 먼저 살아야 한다. 사랑의 삶이야말로 이 땅에서 참으로 부활을 사는 삶이다.

안동교구 신대원 신부
  |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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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사랑의 새 계명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유언(testamentum)을 전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신 긴 고별사의 일부에 속하는 이 유언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말 속에 들어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처럼 제자들도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제자들을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그리고 그 하느님의 영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이 끝나는 시기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은 당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완성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자신들의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사도로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이 유언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도 지난주일 주제였던 하느님의 부르심의 연장선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신자들의 생활 속에서 거의 들어보기 어려운 말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각자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가 방을 나간 다음에야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유다가 예수님의 유언을 전달 받지 못했다는 것과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유다가 행동을 시작한 시점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광스럽게 되기 시작한 순간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의 시작이 곧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의 시작임을 공언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자연과 역사 안에 하느님의 지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충만한 하느님의 생명의 빛이 드러날 때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고, 그 결과로 세상의 모든 죄가 깨끗해졌음을 선언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세상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새로운 세상 안에 살게 되었음을 알려주신 것이며, 이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옛 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삶의 규범인 십계명의 전제였습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 즉 자신과 동등한 인격으로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령이지만,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은 자신을 돌보는데 몰두하느라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 자신’이라는 기준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이라고 바꾸신 것은 단지 말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킬 능력을 당신이 몸소 주셨음을 상기시키십니다.

우리는 각자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와 같은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유언이 전달될 수 없었습니다.

▦ 안동교구 김권용오 마티아 신부 : 2016년 4월 24일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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