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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껍데기와 알맹이가 있습니다.
조회수 | 2,561
작성일 | 07.05.04
껍데기와 알맹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껍데기를 가졌어도, 농약과 방부제가 가득한 알맹이를 지닌 과일이 있는가 하면, 껍데기는 벌레 먹은 상처가 나고 못생겼어도 우리 건강에는 좋은 알맹이를 지닌 과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껍데기를 가졌어도 모형으로 만든 사과는 먹을 수가 없으니 사과라 할 수 없습니다. 알맹이가 진짜입니다.  

얼마 전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운전석 앞에 성모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참 보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택시 기사가 신자라는 사실에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기사가 신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기사는 저를 보고 꿈에도 신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덥수룩한 수염. 그저 지나는 외국인 승객의 하나라 생각했겠지요. 보여 지는 것은 달라도 내면의 믿고 있는 하느님이 같다는 생각에 더욱 동질감을 느낍니다. 생면부지의 중국인에게서 느껴지는 이 친근감의 정체. 껍데기의 유사함이었습니다. 그 알맹이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마지막 유언을 듣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알맹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내면에 무엇이 채워져야 하는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신앙을 가지면서 그 그릇 안에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하면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바로 옆에 있는 ‘이’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나와 무관한 ‘그’는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나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고, 나를 귀찮게 하는 구체적인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체적인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팔아넘긴, 구체적인 유다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옆에서 살 부비고 살아가는 ‘너’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성 아우구스티노]

신자의 껍데기, 신부의 껍데기. 그 안의 알맹이는 어떻습니까? 공허한 사랑의 메아리가 아닌, 작지만 알찬 사랑으로 자라고 있는지요? 묵주반지와 로만칼라가 그 이름값을 할 수 있도록 알맹이는 잘 영글어가고 있는지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택시에서 내리며 ‘착한 중국 사람을, 더군다나 그 중국 사람이 신자임을 확인했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정부교구 김준영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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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은 서로 영광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또한 이와 같아야 하겠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이는 예수님의 유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유언과 같은 새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의 영광을 위한 사랑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사랑 실천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의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법으로 사랑 실천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1독서에서 만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수님의 사랑의 유언을 충실히 실천한 참된 신앙인들이다. 이들은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7곳의 도시를 순례하며 자신들의 영광과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처럼, 그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함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의탁하고 믿음에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이들의 생활은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는 제2독서의 예언처럼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 신자들을 보고 당시 안티오키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불렀다고 한다. 자신들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은총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오늘은 ‘이민의 날’이다. 내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처럼, 이주민들에게 사랑을 실천한다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거룩한 일이 실현된다는 것을 묵상해본다. 기쁜 맘으로....

의정부교구 이해일 신부
  |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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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하느님의 사랑 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세계적인 문학 거장 톨스토이는 사랑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말이자 실천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장래에 큰 사랑을 베풀겠다는 명목으로 현재의 작은 사랑을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모두 속이는 셈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사실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미래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늘 현재형의 행위이므로 현재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세상은 사랑에 굶주리는 걸까요?” 이미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압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마태 22:40)라고 단언하십니다.

성경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할 첫째 계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서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은 너무 멀리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실천이라는 언어를 통해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지금-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해야 할 실천이지만, 그것은 지금 행함으로써 준비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무언가 하려면 막막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다른 이보다 작아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내가 작아짐으로써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를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즉위 후 첫 번째 성탄 미사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거대하지만 스스로 작아지셨고, 부유하지만 스스로 가난해지셨으며, 전능하지만 스스로 약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몸소 자신을 낮추는 실천을 보여주십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법은 ‘낮춤·작아짐’, 바로 이것을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법을 따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의정부교구 이상구 토마스 모어 신부 : 2016년 4월 24일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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