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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성삼위 하느님과의 친교를 열어주시려
조회수 | 2,362
작성일 | 07.05.10
우리는 말만 앞세우고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공동체나 사회에 도대체가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만 있고 행동은 없는 모습이 식구들 속에 생겨나면 그 가정은 무책임한 가정으로 변합니다. 또한 그러한 모습이 공동체 속에 많이 생겨나면 그 공동체는 생명력과 끈끈한 연대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동은 없고 말뿐인 사람들을 비난하고 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만 있고 행동은 따르지 않는 신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라고 하심으로써 말로만의 사랑으로 그치지 말고 주님말씀을 지키는 것까지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만 있고 행동은 없다’고 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과 실천이 따로 가지 않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 말씀을 지키는 것’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주셨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예수님이 물으실 때 “예, 주님,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기는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에는 부도를 낼 가능성도 다분히 있습니다. 그것을 익히 잘 아시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하심으로써, 말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당신 말씀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을 차단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에 당신 생명까지 바치시어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좀 쉽게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시지, 왜 당신 가르침과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조건을 달아 까다롭게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꼭 전해 주고 싶은 특별한 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은 바로 “성삼위 하느님과의 친교”를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와 나는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라는 말씀과 뒤에 언급되는 성령까지 함께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삼위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열어주고자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친한 친구를 집에 데려와 가족들에게 인사를 시켜 서로 관계를 트도록 하기도 하고, 더 친한 경우는 의형제를 삼아 더 깊은 가족관계에로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삼위의 친교와 사귐에 인간을 초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성삼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로 오셔서 인간과 함께 사시는 신비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예수님과 참된 사랑의 관계에 놓여야 합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성삼위 하느님과의 사귐도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고 따르기를 그렇게 강조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 천국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부터 바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려 하셨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할 때 천국의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 성삼위 하느님과 친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삼위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삶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을 지킴으로써 당신을 사랑하라 하신 것은 우리에게 성삼위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천국의 삶을 세상에서부터 열어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제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함으로써 이승에서부터 성삼위 하느님을 모시고 천국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봅시다. 아멘

안동교구 김학록 안셀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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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갑시다!

미국에 ‘수잔 앤더슨’이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눈 수술을 받다 실명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아내의 직장 출퇴근을 도와주었습니다. 얼마 후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계속 이럴 수 없으니 내일부터는 혼자 출근해요.” 그 말에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혼자 출퇴근했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며 서러워 눈물도 흘렸지만 점차 출퇴근이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게 보름쯤 지날 무렵, 그녀가 버스를 탔을 때 운전기사가 무심코 말했습니다. “부인은 좋겠어요. 좋은 남편을 두셔서요. 매일 한결같이 부인을 살펴주시네요.” 알고 보니 남편은 매일 아내가 버스를 타면 같이 타 뒷자리에 앉으며 아내의 출퇴근길을 말없이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스승 예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처형되시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 도망쳤던 사도들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그들이었습니다. 이제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 떠나신다고 하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보호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것이고,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당신의 삶을 이제 이어가라고, 흔들리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맡기고 살아가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사도들은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갔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켰던 유다인들과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의 혼란을 해결해가는 사도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칫 분열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짐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하고, 이방인들은 유다인들이 혐오하는 행위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전통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야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혐오감을 주는 행동들을 피해줄 것을 가르칩니다. 복음의 가르침과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겼던 사도들은 이렇게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의 어려움을 극복해가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웁니다. 올바른 판단력과 윤리, 건전한 상식 등을 배우면서 성인으로 성장해갑니다. 때로는 실수도 하겠지만 실수도 값진 경험으로 삼아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언제까지나 모든 것을 다 결정해주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기를 앉아서 기다리는 신앙인을 기도하는 신앙인이라고, 믿음이 깊은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곳으로, 세상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나서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 홀로 배부르게 살고자 정신없이 달려가는 세상에서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재물과 편리만을 쫓는 세상에서 작은 것의 소중함,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지켜가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삶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 받은 신앙인이 되어갑시다.

▶안영배 요한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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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평화를 잃지 않으려면

부활 제6주일이며 생명주일이다. 한국 주교회의는 우리 시대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인간 존엄성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1995년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주일로 반포했다.

그러다가 2011년부터 '생명의 문화'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기 위해 생명주일을 5월 첫 주일로 옮겨 지내도록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 죽음의 문화가 잔뜩 도사리고 있고 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죽음의 문화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 주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다. 죽음의 세력은 개발과 경제성장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를 내세워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병들어 죽어가게 만들고, 마침내 인간 생명마저 손쉽게 앗아가려는 음모를 끊임없이 꾸미고 있다.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생명이신 당신을 향해 죽음의 세력이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고 말씀하신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은 생명이신 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과 함께 그분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반대로 생명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신 분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께서 마련해주신 부활의 삶을 거부한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문화라는 덫에 걸려 결국 죽음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참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 없는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창세 2,7). 생명의 숨을 통해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셨다. 또 때가 되자 생명이시면서 죽을 몸으로 오신 분이 당신 몸을 죽음과 맞바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삶으로 옮겨 놓으셨다.

생명이시며 부활이신 분이 건네주신 부활의 삶은 궁극적으로 '평화'로 나아간다. 생명의 문화는 평화를 지향한다. 평화 없이는 결코 부활의 삶을 살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다. 그러나 평화의 삶은 십자가 없이, 자기 고통 없이, 자기 포기와 비움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별의 만찬석상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고 하신다. 이제 참 생명이신 분이 그 생명을 간직하도록 평화를 건네주신다. 참 생명을 건네주시는 분은 곧 참 평화의 주님이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참 생명을 누리고 싶고, 참 평화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타인 생명을 빼앗고, 평화를 지키려는 일꾼들을 무참히 억누른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참 평화를 짓밟고, 생명을 원하면서도 참 생명을 거부한다.

대신 그들이 만들어놓은 거짓 생명과 거짓 평화를 강요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이 나라 심장부 서울에서는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꽃을 심어 사람을 꽃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 얼마나 반생명적, 반평화적 행태인가!

심장부에서도 이러할진대 변두리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겠는가? 참으로 한심스러운 세상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권리를 소중하게 여긴다면서도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열심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사람들마저도 죽음의 문화에 팔짱을 끼고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서글픈 세상인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28).

생명은 거저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거저 일궈지지 않는다. 우리가 생명의 일꾼, 평화의 일꾼이 되지 않으면 결국 죽음의 문화에 의해 생명과 평화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참 생명으로 부활하신 분은 평화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분을 온 몸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참 생명과 평화를 온전히 지켜나가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도 바오로는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 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3-14)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또 갈라진 모든 것을 일치시키시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에게서만이 참 생명과 평화가 샘솟고, 그분만이 참 생명과 참 평화이시다. 그리고 생명과 평화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그분이 마련하신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안동교구 신대원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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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성령과 세상 안의 주님 현존

주님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있는 부활 제6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성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부들이 교회 내부의 의견충돌과 논쟁을 해결하는데 성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묵시록의 저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았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사의 일부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될 성령의 역할에 대해 미리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견될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가르쳐주어 제자들이 구원사업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시는 협조자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예수님의 구원업적을 이어가고 완성하는데 원동력이 됨으로써 세상 안에 주님의 현존이 드러나게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환시로 본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그 도성의 중심에 있어야 할 성전을 어린양이 대신하고 성벽의 주춧돌에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묘사하면서 지상 교회의 모델이 천상 교회임을 암시하고,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는 성전이지만, 신명기 사상에 따르면 하느님의 머무시고자 선택하신 장소는 외부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바오로 사도는 신명기의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라고 선언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모토가 된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표현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회심을 반영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하나니아스의 안수로 성령을 받고 다시 보게 되었으며, 세례를 받은 후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도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만남에 따른 변화는 성령이 그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다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상징적인 행위로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즉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삶의 결정적인 방향전환은 인간 개인의 결단만으로 불가능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견된 협조자이신 성령의 도움에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 곁을 떠나려 하실 때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과 예수님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평화를 그들에게 남기셨지만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주님의 평화가 사도들에게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자리 잡은 각자의 역할을 발견하고 책임감을 자각하며,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받아들이게 되는 일상의 크고 작은 모든 희생은 십자가의 희생제물과 합해져서 영적 제물이 되고, 성령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영적 예배가 됩니다. 성령께 순종하며 매일 영적 예배가 바쳐지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주님 현존의 표지가 됩니다.

▦ 안동교구 권용오 마티아 신부 : 2016년 5월 1일
  |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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