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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조회수 | 2,549
작성일 | 07.05.10
오늘도 지난 주일의 천상 예루살렘의 이야기(묵시 21,1-5)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21,2 참조). 찬란히 빛나는 열두 대문 위에 씌어진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12절)- 이것은 모든 민족들이 그 도성을 건설하는데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과 그 성벽을 받치고 있는 열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14절)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사이의 사상적 연속성이 있음을 뜻한다.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

그러나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22절). 천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세속도시’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성스러움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깊이 들어와 계시어 그들과 하나를 이루고 계심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미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정화에서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구원된 모든 사람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며 또한 만물이 하느님께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공통 사제직이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 모두가 예배를 드리며 거룩하게 삶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또한 천상 예루살렘은 성전이 필요 없듯이 빛이 필요 없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이다(23절). ‘세상의 빛’(요한 8,12)이신 예수께서는 당신 빛으로 선택된 이들을 감싸시며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2고린 3,18). 그렇게 되면 구원된 자들은 자신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드러나 보이는 삶이 될 것이다.

복음: 요한 14,23-29: 성령은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여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오늘의 교회 역시 되어야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우리 모두가 ‘종말론적 교회’를 예견할 수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시다. 신앙의 종말론적 차원은 어떠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일어나도록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 거처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14,23-24).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처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삶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천상 예루살렘으로 기어오르지 않으면 결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갈라지고, 그리하여 참된 목적지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갈망을 대신하지 못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탓이다. 이제 또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23절). 즉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1요한 4,8.16 참조).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할 수 있고 그분과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모든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에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1고린 2,12 참조)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예수께서 약속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25-26절). 즉 성령은 모든 선물의 ‘완성’과 같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보다 철저하게 들어가게 하신다. 반복적인 되새김만이 아니라 ‘깊이 있게’ 함으로써 구원적 체험을 항상 새롭게 하는 창조적 역할을 한다. 시대는 변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기에 충실해야 한다. 계속적인 ‘새로움’ 속에서의 ‘충실성’,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 안에 끊임없이 이루어주시는 기적이다. 이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제1독서: 사도 15,1-2.22-29: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제1독서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교회에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성령께서 주인공으로 개입하시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사랑의 ‘충실성’과 ‘새로움’의 지침이 제시된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선교사명(마르 16,15)에 충실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하신다.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시오.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런 몇 가지만 삼가면 다 잘 될 것입니다”(28-29절).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지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께서 비추어주시고 굳게 일치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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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 !’(Peace be with you)

부활의 마지막 주간에 서서 사순시기부터 부활축제의 기쁨까지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시작이다’, ‘끝이다’하는 말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다른 의미로서 다가올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안에서, 진정한 시작과 끝의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시작과 끝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부활시기들이 일회적이 아니며, 매년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고 변화시키는 은총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부활 제 5주 복음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새로운 계명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 제 6주일,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받고 믿고 사랑할 때, 세상의 평화, 그것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평화를 받고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대에서 신자공동체를 바라볼 때 행복을 느낍니다. 저들이 바로 교회!

복음을 읽으며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 지금 이 자리가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군중들이 함께 하는 세상이 됩니다. 아남네시스.

우리 곁에 살아계신 주님, 하느님과 함께 할 때 교회는 행복합니다. 이 행복은 세상의 평화로 번져 나아가야 합니다. 어둠에 잠겨있던 세상이 새벽에 떠오르는 아침 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열고 내어보이듯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부활 제 6주일, 우리들도 나의 모든 것을 열고 하느님께 맡겨드립시다. 내 안에 주님의 평화가 넘치도록 나를 열고 주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월요일 밤에 하는 방송 중 개그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는 터프함을 내세우나 전혀 터프하지 않은 ‘죄민수’라는 개그캐릭터가 나옵니다. 그는 반항, 터프함을 내세우며 ‘슈레기’,‘아무 이유없어~’등의 유행어를 만들고 있지만, 개그프로의 맨 처음에 외치는 그의 유행어가 맘에 듭니다. 그것은 ‘피스~!’라는 것입니다. 평화라는 것이지요. 저는‘피스~!’뒤에 ‘비 위드 유~(be with you)’를 붙이고 싶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라는 우리의 인사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넘치도록 우리들도 웃음과 행복을 담아서 ‘피스~!’하고 외쳐보는 것을 어떨까요.

▶ 이재욱(요한세례자) 신부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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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평화”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신부님, 제가 점을 봤는데요. 그것도 죄가 되나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점괘는 어떻게 나오셨나요? 잘 나오셨어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저는 ‘죄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떠나서, ‘평화’라는 단어에 시선을 두려 합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평화이니까요. 우리의 시선을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에 맞추어 봅시다. 그리고 생각해 봅시다. 운세나 점 등을 통해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점을 보았을 때 점괘가 좋게 나온다 하더라도, ‘점괘대로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반대로 점괘가 좋지 않게 나오면 매우 불안해집니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 두렵습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그것 때문인 것 같아 더욱 불안해져 참지 못하고 또 다른 곳을 찾아다닙니다. 내가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오히려 마음과 영혼은 지쳐버립니다. 운세나 점괘를 통해서 우리는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면 평화를 얻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선택입니다. 때론 우리 자신조차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매 순간을 어떻게 선택할지 알 수 없기에 사람의 미래는 어떤 용한 점쟁이라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물론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조정하지 않으시고 그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든 어떤 처지이든, 그 선택이 옳든 그릇되었든지 간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게 옆에서 희망과 구원의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우리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조차도 그분은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의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선택조차도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로 바꾸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그분을 사랑하는데 힘쓰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그분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사실 것이고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이규현(가롤로보로메오)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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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5월, 생생한 기억의 유무

가장 좋은 계절, 성모성월에 들어서는 첫날입니다. 가정마다 본당마다 여러 기념과 축일, 그리고 행사로 설렘과 동시에 몸살을 알아야 하는 5월의 첫날답게 따라붙는 수식어도 즐비합니다. 우선, 오늘은 ‘부활 6주일’이면서 ‘생명 주일’이고 ‘근로자의 날’이면서 ‘이민의 날’입니다. 그 이후로 어린이날(5/5), 어버이날, 주님 승천대축일(5/8), 석가탄신일(5/14), 스승의 날, 성령 강림 대축일(5/15), 삼위일체 대축일(5/22),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5/29), 성모의 밤, 본당의 날, 그리고 사이사이 성인들의 축일과 기념일이 있고, 마지막으로 우리 각자의 애경사까지 합하면 5월은 그야말로 ‘정신없는 달’입니다. 일찌감치 빨간 펜으로 둥글고 크게 표시해둔 이런 기념일과 약속들을 하나씩 눈여겨보며 걱정이 앞서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기다림과 설렘으로 마냥 행복해지기도 합니다. 과연 그 기념일 하나하나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까? 손꼽아 기다려집니까? 아니면 되도록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설렘으로 기다려지는 ‘기념’에는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이 자리하는 법입니다. 머리와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 기억은 바로 ‘오늘 일’처럼 살아 움직여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미소 짓게 하는 순수한 삶의 계기를 마련해주지만, 망각 속에 희미해진 기억은제대로 된 기념을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비록 기념을 한다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념이 아닌 ‘행사’로 전락하게 됩니다. 행사를 치러야 하는 입장은 마냥 행복할 수 없습니다. 책임감이나 의무감 따위가 그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신학생들이 생활하는 신학교도 어김없이 5월이 되면 개교기념일과 발표회, 그리고 수일간의 축제를 지내곤 합니다.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와 만나 그 의미가 새롭게 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생기 넘치고 가슴 벅찬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망각에 쉽게 익숙해지려는 우리를 끊임없이 일깨우시며 ‘가르쳐주시고’ ‘회상시켜주시어’ 그 힘으로‘생활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직접 뵐 수 없었던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부모이신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그분과 재회를 이룰 때까지 이와 같은 ‘영적 회상’에 도움을 주실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성령께 의탁하며 신뢰를 두는 이들은 ‘영적인 회상의 신비’ 속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뵐 뿐 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닫히고 굳어진 마음도 풀리어 약동하는 신앙을 체험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오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이를 공동체의 이름으로 함께 기념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5월에 유난히 기념일이 많다고 불평할 이유도 없습니다. 역으로, 기념해야 할 마땅한 기억조차 없다는 것이 더 서글픈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수원교구 박현창 베드로 신부 : 2016년 5월 1일
  |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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