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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대전/군종] 참 평화
조회수 | 2,436
작성일 | 07.05.10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꽃들이 태양을 향해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내적 갈망은 늘 하느님을 향해 있다.”고 하시며, “내 마음이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내게 참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인의 말씀을 통해서 보더라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남겨주시고자 하신 참 평화라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도,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 생애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나의 신념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나 자신이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나의 인생을 지탱시켜 줄 아무런 힘도 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중에 잠자리에 들 때면 밤중에 서까래에 목을 매어 죽고 싶은 충동에 끌리는 일이 없도록 집안에 끈이라는 것을 모두 다 없애도록 했고, 또 내 인생의 불행을 순간적으로 끝장내려는 유혹을 느끼는 일이 없도록 사냥 가는 일도 중지했다.” 그가 신앙을 갖기 전에는 이런 절망적인 고독감과 공허감에 몸부림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 찾게 된 인생의 참된 의미와 참 평화를 통해 그는 러시아의 대문학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화가 무엇일까요? 환자 분들 봉성체를 합니다. 척추암, 치암에 걸려 고생하시는 분, 교통사고로 평생을 누워 지내는 분,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여 수술하셔야 하는 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이 고통중에 신음하고 계십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세상에 더 어려운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하느님께 기도하세요. 그 분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등등

그런데 그런 고통 속에서도 참 평화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드리면서 살아가는 분들을 뵙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고통에 앞서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의 처절한 아픔을 이겨 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지요. 지금은 너무나 힘들고 아프더라도 그 분께서 그 모든 것을 보상해 주시리라는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가지도록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의 평화는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재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희망 속에 가능하다는 것을 그 분들을 통해 보게 됩니다. 우리 교우 여러분들께서도 세상의 많은 고통과 불행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와 믿음, 그리고 무엇이든지 그 분께서 채워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현세의 모든 어려움을 지혜롭게 잘 이겨나가시고 늘 평화 속에 생활해 나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의정부교구 이한수 안토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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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1846년 임치백은 감옥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의 집전자는 김대건 신부였고, 둘은 모두 수인(囚人)이 된 상태였다. 누추한 감옥의 초라한 예식이라도 천사들의 찬송가만큼은 하늘을 온통 울렸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루는 판관이 임치백 요셉에게 묻기를‘십계명을 대어 보라’하였단다. 낯선 기도문이 아직은 입에 붙지 않아 서툰 것이 당연할진대, 판관이 조롱하며 비난하자 요셉이 이와 같이 대꾸하였다. “자식이 유식해야만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 비록 무식하지만 천주께서 내 아버지이심을 잘 알고 있소이다.”자신의 대답처럼 요셉은 천주를 아버지로 여기며, 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순교로 고백했다.

성경은‘계명’과‘말씀’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의 말씀들이 십계명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그러니 계명을 따르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곧“나(예수님)를 사랑하는 일”이다. 기도문과 계명들을 입버릇처럼 외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말씀의 뜻을 충분히 깨달으려는 노력이 그래서 귀한 것이다. 다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겸손함을 간직하면서, 이 귀한 노력들이 실현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평화가 아닐까. 적당한 타협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사랑이 실현됨으로써 그분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현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교자는 평화를 누리고 있다. 비참한 모양으로 목숨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어도 거기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말씀을 지켜 가기로 다짐을 하자. 뜻하지 않게 닥쳐오는 어려움이 우리의 희망까지 장악하지 못하도록 성인들의 모범과 전구에 의탁하도록 하자.

대전교구 김성대 요한 신부
  |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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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평화

강론을 쓰기위해 저녁 무렵 성당에 앉아 묵상을 하고 나올 때였습니다. 이 때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겁쟁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세상을 더 헤매어 봐도 눈을 더 크게 뜨고 찾아도 당신은 단하나란걸 알아서 내가 꼭 갖고 싶지만~~”

본당 사목을 하는 중에 여러 가지 일들로 겁을 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군대에서 사목을 하는 도중에 걸림돌도 많이 생기곤 합니다. 그 때마다 그 걸림돌을 없애보려고 나름대로 노력도 해보고 안간힘도 써보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걸림돌은 더욱 커져 저를 억누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저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또 하나의 해답을 마련해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평화를 찾는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평화를 깨우치는 과정이라고 말해야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전쟁을 하지 않거나 내가 편안하다고 느낄 때 평화롭게 느낄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라고 하기는 무엇인가 2%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그것을 뛰어넘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내가 믿는 예수님을 위해 자신 있게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용기가 주는 마음의 평화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물론 인간적인 평화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것을 뛰어넘는 기본이 되는 예수님의 평화를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군종교구 손해락(멜키올) 신부
  |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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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요한은 천사의 인도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속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록 21,11.23)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곳이 천국이요, 예수님의 희생으로 등불이 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습니까?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그런 천국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원하는 천국은 지상낙원입니다.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즐겁고, 지금 칭찬받는 것을 더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24)

관심과 간섭의 차이를 아십니까? 관심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알아주는 것이고, 간섭은 자기의 입장에서 알아주는 것입니다. 관심은 배려이지만 간섭은 강요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간섭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관심을 가지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강요하시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계명을 지키도록 배려하시는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신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께서 간섭하고 강요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분과 함께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분의 계명이 뭡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기도와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주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눔과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선이 제일 중요합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자선을 베푼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소유를 통해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갖기 위해 서로가 싸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나눔을 통해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베풀기 위해 서로가 희생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굶주리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집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돈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모두가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야합니다. 부정과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그분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재미없고 힘듭니다. 그런데 재미없고 힘든 일을 왜 해야 합니까? 천국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도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합시다. 천국을 위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군종교구 손용환 신부
  |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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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하나 되려면 주님 안에서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1ㄱ)

부활 제6주일, 우리는 주님 승천을 앞두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드리신 마지막 기도를 듣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유언(劉焉)이 된 이 기도는 이제 제자들을 관통하여 그들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될 이들, 곧 지금 각자의 우리에게까지 유효한 말씀이 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지칭하셨던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인 우리의 삶 가운데에 주님의 이 기도가 실현되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제껏 우리 각자의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과정은 서로 다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데, 공동체의 규모가 작게는 부부나 가정, 크게는 직장이나 신앙공동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군대에선 생활관이나 부서를 하나의 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 규모가 어떠하든 한 공동체 안에서 같은 사안을 두고도 개인에 따라 떠오르는 생각과 밀려오는 감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신앙공동체인 성당에서조차도 서로 다른 의견들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도하셨던 ‘하나 됨’은 무엇이며, 또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기도 안에 한 가지의 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ㄴ) 예수님의 기도대로 먼저 우리 자신을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 있도록 두는 것입니다. 나의 뜻도 너의 뜻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로써 누구의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함께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뜻을 찾아 나설 때, 어느덧 상대와 나 자신은 아버지를 향하고 있는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향해 있고 상대가 아버지를 향해 있는 것, 그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 곧 일치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단순히 상대의 의견에 맞추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머물다 보면 자신의 것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 안에 일치를 이루어나갈 때, 예수님의 기도 안에서 가장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ㄱ)

▦ 군종교구 박종석 요셉 신부 : 2016년 5월 1일
  |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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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우리는 희생자이자 공범입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에 한국학을 가르치는 러시아출신 ‘박노자’(한국 이름, 본명:Vladimir Tikhonov) 교수가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가진 그가 칼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OOO 시절 저곡가 정책에 신음하고 군대에서 실컷 구타당했음에도 OOO를 비판한 필자에게 호통을 쳤던 농촌 아저씨. 외유나 일삼는 국회의원들이 더럽고 밉다 하면서도 데모하는 민중을 가리켜 아주 역적들이야, 잡아가서 잘 패야 정신 차릴 거야, 말하던 택시기사 아저씨….’ 우리는 이들 안에서 ‘체제의 피해자임에도 체제의 사고를 받아들여 수구적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기층 민중의 모습에서 희생자의 측면과 공범의 측면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들이 과연 지배자들에게 끌려 다니는 처지에서 벗어나 계급적인 연대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생각하는 백성이 될 수 있을까?’ 참으로 공감되는 표현입니다.

102차 세계 이민의 날을 맞아 위의 박노자 교수의 비판을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적용시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가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현실에 살면서 세월호 사건을 향해 그만 잊자고 말하면서도, 조선족 중국인 오원춘 살인 사건을 두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모든 조선족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 얼마 전 통과된 테러방지법으로 인해나 자신이 잠정적 테러범으로 억울하게 지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132명이 사망한 파리 테러 사건을 계기로 모든 외국인을 이 법으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 그 위험성으로 전 세계적으로 점점 사양세인 원자력 발전소를, 정작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어 자칫 일본 후쿠시마처럼 사고로 인해 살지 못하는 땅이 되어 어쩌면 우리도 난민이 될 수 있음에도, 정작 살기위해 국내로 이주해 온 난민에 대한 인정률은 세계 평균인 30%도 안 되는 고작 2%에 머무는 우리나라.

이렇듯 우리는 나 자신도 정치라는 지배자, 매스 미디어 라는 지배자, 사상과 이념이라는 지배자에게 끌려 다녔던 희생자였음을, 동시에 그러한 지배자 앞에서 침묵하며 그들의 행동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공범이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2016년 이민의 날의 주제를 ‘이민과 난민의 도전에 대한 자비의복음의 응답’으로 정하시며, “이주의 흐름은 이제 구조적인 현실이기에 계획을 세워 현재의 위급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황님께서 권고하신 ‘계획과 대처’의 핵심에는 ‘자비의 복음’이 있어야 하고, 우리신 앙인은 그 복음으로 이주민과 이주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를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가 세상 체제와 지배자들의 희생자였음을 자각하며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하여 마스크를 벗고 외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베풀어진다고, 모든 이주민과 난민들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 마땅한 소중한 인격이라고,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사람으로서 형제인 그들의 인격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 대전교구 이진옥 미카엘 신부 : 2016년 5월 1일
  |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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