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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평화와 미소
조회수 | 2,512
작성일 | 07.05.10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

생을 마치는 날,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생을 마감하는 날에도 한가로운 미소를 보여줄 수 있을지, 썰렁한 농담을 던질 수 있을지…. 생을 마감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힘든 순간순간 삶에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인가 십자가의 길 4처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미소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정신이 아득하도록 충격적인 상황 앞에서 미소라니, 당치도 않아 보이지만 성모님의 눈물을 위로하는 예수님의 미소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평화의 미소, 육체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평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평화는 미소 속에서 발견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  시쳇말로 ‘썩소’가 되어버리니 조심해야 합니다. 미소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 자신에게 미소 지어 줄 마음이 있습니까?   나의 부끄러웠던 기억에 미소 지어 줄 수 있습니까?  불투명한 미래, 불안하게 마주친 지금의 상황에 미소 지어 줄 수 있습니까? 내 남편이나 아내에게 미소 지을 마음이 있습니까? 내 부모, 내 아이에게 미소 지어 줄 마음이 있습니까? 신부님, 수녀님, 신자들에게 미소 지어 줄 마음이 있습니까? 실망을 준 친구에게 미소 지어 줄 마음이 있습니까? 이 세상을 향해 미소 지어 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눈길 한 번 건네고픈 마음도 생기지 않는 곳이 있습니까? 사실 미소 지어 줄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돌파구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누구나 미소를 보낼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황,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유야 다양하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아직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기면 좋을 것입니다. 그 부분을 충분히 고민하고 성찰하면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주님의 평화 안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완전히 제압하고 얻으려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미소로 따뜻하게 안음으로써 얻는 주님의 평화가 우리 안에 머물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인천교구 이경일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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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할을 본받고 살아야"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시는 당부와 약속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탁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과 실천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는 이 결속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세 번째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늘 함께 한다는 약속의 징표로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우리의 문제는 주님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량으로 모든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내적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한 주님의 현존은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평화는 매일 일상생활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징표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신비에서 내면 평화를 체험합니다. 이 내적 평화는 매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주님은 우리 내면에 평화를 불어 넣으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모든 공동체는 주님 평화와 현존을 체험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사명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리토'는 보호자, 위로자, 협조자라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생에서 하느님의 올바른 길을 찾고 선택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조언하는 역할을 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신앙 때문에 겪어야 할 어려움과 번민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끊이지 않는 성령 사랑의 불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이 주시는 은총에 안주해 그것만을 자신의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부끄러운 평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외면한 채, 일시적 안정만 바라는 피상적 치료 구실밖에 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실천을 동시에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파라클리토'라고 부르는 데는 단지 성령의 역할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우리가 본받고 살아야 한다는 사명이 내포돼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듯이, 우리는 또 다른 보호자(요한 14,16)가 돼 아픔과 상처, 수치와 분노,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 형제들에게 진정한 내면 평화를 주는 '파라클리토'의 사랑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 1,3-4).
 
이런 사랑의 역할은 우리의 능동적인 선한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작은 노력을 갖고 사랑을 부어 줄 대상이 어디 있는지 시선을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홍승모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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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하느님의 개입

‘기다리는 동안 보려고 가벼운 책 한 권을 갖고 가지만 / 내용은 머리에 안들어오고 자꾸만 문쪽으로 눈이 가는거 / 누가 들어올 때마다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거 / 그 사람이 도착할 때쯤 심장이 먼저 알고 울리기 시작하는거 / 만나면 환하게 웃어주는거 / 당신을 사랑하나봐요.’

작년 3월쯤 女환자(?)가 나에게 선물한 러브레터이다. 병원에서 주일 미사를 마치고 미사에 함께 하지 못한 환자들에게 봉성체를 하러 나간다. 매주 앙상한 몸으로 누워 밝은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시던 할머니 한 분이 ‘봉헌금이에요!’하며 넣어준 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봉성체를 기다리는 마음이래나. 어디서 본 듯한 글이지만 내가 받아 본 러브레터 중에 제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편지였다. 물론 나도 더 찐한 편지로 복수해 드렸다.

이렇게 환자들과의 만남이 원목사제로서 늘 편했던 것은 아니다. 병원 근무 3년여 동안 제일 힘겨웠던 것이 환자들과의 면담과 고해성사였다. 특히 현대의학으로는 치료 불가능한 호스피스 환자들과의 만남은 곤욕스러웠다. 어떻게 도움을 드려야 할지 방법을 찾을 길이 없었고 당황하다가 그냥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머리를 빡빡 깎은 나이 어린 호스피스 환자들과 부모님을 만나게 된 날은 하루종일 우울해지고 힘도 빠지고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내 자신의 무능력, 무기력을 한탄하곤 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탈리타 쿰’을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런 일 들을 몇 번 겪은 후 내 살길을 찾았다. 그런 환자들을 안 만나는 것이다. 피해 다녔다. 수녀님들께 미루고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최소한의 성사적 만남만을 가져 왔다. 그렇게 지낸 병원 원목사제 3년, 몸과 마음은 편해졌지만 늘 허전한 부분이 있었다.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자책은 늘 내 자신을 괴롭혀 왔다.

“영적 돌봄은 고통 받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불안한 심리 상태에 개입하고, 지옥과 같은 고통에서 끌어 내리는 것인데, 그것은 고통을 최소화 하거나 경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이 그 고통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원목자가 환자의 병상에서 돌봐주는 것은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구체적이고 특별한 하느님의 개입인 것이다.”(유진 피터슨, 병원사목)

이런 대전제를 가지고 시작한 임상사목교육에서 환자에 대한 이해, 대화기법을 배우고 원목자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해나가면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환자들이 원목자인 사제에게 원하는 것들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외침이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갑작스런 죽음의 병마 앞에 당황하며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것을 기대하며 원목 신부, 수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 환자들을 찾아나서고 대화와 경청을 시도하면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점차 환자들과 그전까지 가졌던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격적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환자 개개인이 안고 있는 감정들과 만나면서 공감하게 되고 그 안에서 환자들과 함께 기쁨도 희망도 발견하게 되었다.

요즘 병원에서는 전인 치료를 이야기한다. 환자는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영적인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인적 돌봄을 줄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음에서 약속한 평화만이 환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기에 병원사목은 교회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고 가장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사목이라고 생각한다.

▶ 성제현 루카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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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서명해 달라는 교우들을 자주 만납니다. 흔히 ‘평화’ 또는 ‘주님은 평화’라고 히브리 문자로 써드립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살며시 웃으며 부탁합니다. “신부님, ‘평화’ 말고 ‘건강이나 행복’도 써주시면 안 됩니까?” 그럴 때면 저도 살며시 미소 지으며 응답합니다. “형제, 자매님, 히브리말 ‘샬롬’ 안에는 그런 축복 인사가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 성체를 모시기에 앞서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평화의 인사 직전에 사제는 인류의 평화와 일치를 간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이 기도문은 오늘 복음에서 그대로 따왔습니다(요한 14,27ㄱ). 요한복음서에서 평화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관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16, 33ㄱ)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20, 19. 21. 26)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주시니 그분을 만나면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저자는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2, 14) 여기서 평화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히브리말 샬롬은 본디
‘충만함, 모두다, 평안한 삶, 우정’ 등을 뜻합니다. ‘평화(샬롬)’는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이요 축복이며 구원입니다. 기드온은 판관으로 부르심 받을 때 주님의 천사를 뵙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안심하여라(=너에게 평화가!).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판관 6, 23)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은 평화’라고 하였다.”(판관 6, 24)
주님은 당신을 뵈었다 해서 죽음이 아니라 평화를, 생명력으로 가득 찬 평화, 곧 건강과 장수와 승리와 영원한 행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동안, 티로 임금 히람은 솔로몬에게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를 보내오고 솔로몬은 답례로 밀과 기름을 보내줍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지혜를 내려주시어, 히람과 솔로몬 사이에는 평화가 자리 잡았고, 그 둘은 조약을 맺었다.”(1열왕 5, 26)

행복이 그윽했던 이스라엘 왕정초기의 한 장면입니다. 남쪽나라 임금 솔로몬과 북쪽 나라 임금 히람 사이에 평화 가득한 모습은 읽고 또 읽어도 신이 납니다. 우리 한반도에도 그러한 평화의 날이 찾아오도록, 평화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오늘 ‘생명주일’ 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인천교구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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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수많은 일을 하면서 다가오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직장 안에서, 가정 안에서 우리는 평화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갈등과 번민을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힘들고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주셨는데 왜 우리는 그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의아함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주시지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한 달은 저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시간은 없는데 시험은 준비해야 하고, 더군다나 실습을 나가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간 마음속으로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한숨만 나왔습니다. 그 당시의 마음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들만 해야 하는 제 자신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고, 입에서는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욱 싫었던 것은 아무도 제가 처한 상황을 마음 속 깊이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이해하는 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싫었습니다. 자꾸만 우울해져 갔고,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방에 있는 예수님의 환히 웃고 있는 성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성화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음이 저도 모르게 굉장히 평화로워졌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수 없는 힘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빛처럼 다가오면서 그동안의 불평과 불만이, 어려움과 힘든 것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느꼈던 것은 ‘주님은 나에게 평화를 주시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과연 얼마나 예수님께 시선을 두려고 했었는지, 그분을 바라보려고 했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시려고 매일 매 순간 기다리시지만, 사실 우리 편에서 그분을 바라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정말 마음속을 다 보여드리며 편하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내지 않는 것이 우리 자신의 현주소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분을 만나야 그분의 평화가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부활 6주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평화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비추도록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하겠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 인천교구박종훈 요셉 신부 : 2016년 5월 1일
  |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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