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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조회수 | 2,240
작성일 | 07.05.12
오늘 제1독서는 첫 번째 사도 공의회인 예루살렘 공의회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이방인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러자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해왔던 할례의 전통을 이방인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직도 유다인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은 이방인들을 한 형제라 부르며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할례라는 의식을 거쳐 유다인으로 귀속됨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와 야고보 사도는 그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을 할례의 율법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상기시키며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이는 누구나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임을 설명합니다. 결국 사도들은 이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한 분파가 아님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나 유다인에게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그 출신보다 더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자렛 출신이라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이나 겉모양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풍토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신분이나 자격을 정하고 그것이 깨어지면 마치 사회가 혼란스러워져 평화가 깨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울타리를 만들고 경계를 그어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종교가 다르다느니, 지역이 다르다느니 해서 내 편, 네 편을 만듭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거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스스로 만든 장벽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담이 높아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다릅니다. 담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것이며,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평화입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지만 하늘에 쌓은 재물은 도둑맞을 걱정도 잃어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까지도 책임지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부산교구 윤정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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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새로움을 발생시켰습니다

오늘 복음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명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여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말씀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신앙인 안에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일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실천한다고 주장하셨기에 초기교회는 하느님이 그분 안에 살아 계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하고 그것을 배워 자기들의 삶 안에 실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안에 예수님은 부활하여 살아 계시고, 그들이 기억해내어서 실천하는 예수님의 일은 성령이 그들 안에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교회는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인간 안에 또 인류 안에 일어나는 변화와 삶의 새로움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초기교회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도 성령이 하신 새로운 일이었고,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신 새로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교회가 발족한 것도 성령강림과 더불어 일어난 새로움이었습니다.

성령은 인간 안에 또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새로움을 발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사회가 외면하던 병자들을 예수님은 고쳐주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병고(病苦)는 죄에 대한 대가라고 믿던 유대교사회였습니다. 반신불수와 나병환자를 포함한 모든 장애인은 자기 죄 값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절망하던 그들을 고쳐주면서 하느님은 인간을 단죄하고 벌주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교 사회에서는 가난도 죄의 결과이고 하느님이 주신 벌이기에 감수해야 하는 불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런 일들은 유대교 사회에서는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가 인류 안에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교회는 그 새로움들 안에 성령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움이었습니다. 통치자의 땅에 사는 사람은 통치자의 법을 지켜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땅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도록 초대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와 같이 맹종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인식도 새로움이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유대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회중 앞에 세워 놓고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마르 3,4). 회당의 회중은 침묵만 지킵니다. 유대교는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금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일도 노동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선한 일,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새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난한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가난한 이, 병든 이들을 위해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버린 이들이라 그들도 버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죄인이라 부르고, 간음한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와 그들의 권위가 우선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희생당하셨습니다. 오늘도 자기 권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교회법으로 사람을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대죄니 조당이니 말할 때,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고 깨달은 제자들은 그분이 보여주신 새로움을 실천합니다. 초기 교회는 이 새로움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율법과 제도로 경직된 유대교를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이 살아 숨 쉬시는 유연한 성령의 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법과 제도는 그 시대에 필요하여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이 살아 계시게 그런 것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넘어 예수님에게 부활의 미래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우리의 신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십니다. 새로움을 거부하는 것은 희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역사 안에 우리를 새롭게 가르치고, 예수님의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움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시대에 따라 새롭게 표현하고, 새롭게 실천하게 하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성령은 과거의 법과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하는 일에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법과 제도에 얽매인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그런 것을 절대적이라 강요합니다. 인간이 만든 것을 절대화하면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숨결은 사람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섬김이 실천으로 기억되는 곳에 살아 계십니다.

▶ 서공석 신부
  |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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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하느님께서 사신다는 것은

우리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1차 고별사를 13-14장으로 한정할 때,
고별사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계명 선포,
② 아들의 자기계시적 정체성과 아버지와의 일치성 공개,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순서대로 다루어지거나 독자적인 단락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고별사 전체를 오가는 흐름을 주도한다. 2차 고별사(15-17장)에서는 이 주제들이 더욱 심화된다. 오늘 복음은 1차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된다. 오늘 복음으로 봉독되지는 않지만 14장의 마지막 두 구절을 들어보자. "너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14,30-31) 어떤가? 이만하면 예수님의 고별사가 얼마나 다급한 분위기 속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는 고별사가 좀 길긴 하지만 예수님 공생활의 요약이며, 유언(遺言)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별사가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요 주제들이 다루어지는 가운데 덤으로 주어지는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를 언급한다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이 그렇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 제자들에게 사랑의 새계명을 내려주신 예수께서는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을 당신께 대한 사랑으로 간주하신다. 이 말씀은 이미 앞서간 21절에서도 언급되었다. 새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하고 사랑 받는 그 사람에게 와서 함께 산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파견임무를 완성하시고 이제 오셨던 곳으로 가려하신다. 물론 쓰라린 고통과 죽음이 남았다. 그분의 파견임무는 인간과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그 본래의 품위를 돌려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영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다시 돌아오실 것이며, 그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사람들 곁에 사시려는 것이다. 물론 영적(靈的)으로 말이다.

오늘날 물적(物的)인 것을 더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하느님께서 영적(靈的)으로 함께 사신다함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깊은 곳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계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요,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여기서 부활은 시작된다. 우리의 생명이 죽음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바로 그곳에서 부활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체험에 큰 믿음이 필요하거나 대단한 수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사랑함으로써 일어나는 그런 일에 순응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지속적인 모험이며 늘 좋은 놀라움을 준비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때때로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둔다. 사랑의 호흡은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여정(旅程)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아니, 다 알 필요는 없다.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사람 안에 영적으로 함께 사신다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왜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 살려 하시는가에 대한 물음과 같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그 사람의 변화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아들 예수를 통하여 다시 가져온 인간 본래의 품위를 따라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박상대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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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평화를 우리의 것으로 누리는 행복한 신앙의 삶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 23∼24)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께 대한 온전한 의탁과 신뢰 속에 완전한 사랑을 하기를 명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보통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사이일 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고 무슨 청이든지 다 들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이 아닐 때 의심하고 상대가 시키는 대로의 말을 다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우선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어떤 일을 행하고 그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더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합니다. 중요하고 꼭 해야 될 일은 먼저하고 덜 중요하고 안 해도 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순서가 뒤 바뀐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고 행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없는데, 실제 우리 삶의 모습을 보면 신앙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충돌하고 대립할 때, 주님의 뜻과 신앙의 가치들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신의 뜻과 세속적인 편의와 유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우리 삶의 모습임을 봅니다.

모든 것은 공과 정성을 들이는 만큼 그 대상에 대한 소중함이 더해지는데 우리가 주님께 공과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서 말로만 주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 일 수 있습니다. 자기 위안과 자기 만족만을 구하며, 자기 희생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며, 이런 신앙을 살 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요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 것을 많이 가지고 확보해서 상대를 누르고 지배할 힘을 가지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주어집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쟁취하고 획득해야하고 지켜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자신의 고집과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님의 성령이 우리마음을 다스리고 지배할 때,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임하고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매일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자애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께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써,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선물로서 받아 누리는, 행복한 신앙 안에서의 삶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께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이기정 안드레아 신부
  |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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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모두 죄인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우리네 속생각들이 하느님 뜻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솔직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면면을 살피면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다 생각됩니다. 이렇듯 당신의 뜻에서 어긋난 까닭에 엉망진창으로 죄에 얽혀 지내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 스스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져 탕감시키는 구원프로젝트를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온 인류에게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것이 되는 은총이 선물된 것입니다(2코린 5,17 참조). 오늘 묵시록에 펼쳐진 “새 하늘과 새 땅”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례로써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야말로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주님의 것으로 새 단장되었다는 선포라 믿어집니다.

그런데 문득, 오늘 주님께서 유다가 “방에서 나간 뒤에”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는 사실이 유난해 보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당신을 팔아넘기려는 유다의 속셈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당신과 함께하는 만찬자리에서 제외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손수 빵을 적셔서 건네시며 한층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오로지 사랑으로 당신의 뜻에 반대되는 제자의 마음이 돌이켜지기를,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에서 돌아서기를 원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유다의 죄 된 생각을 강제로 꺾어 버리지 않고 억지로 조정하지 않는 사랑의 기다림을 헤아리게 됩니다. 아마도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느라고 애간장이 녹으실 것이라 어림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날처럼 지금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당신을 배신할 인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뜻을 캐게 됩니다. 하여 “사랑의 계명”이 ‘유다를 뺀’ 제자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봅니다. 이야말로 당신의 제자라면 세상이 어떠하든 상대가 어떠하든 상관치 말고 오직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일깨움이라 싶은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걸핏하면 ‘세상의 유다들’에 마음을 쓰는 통에 걸리고 넘어지는 우리 모습이 보였습니다. 늘 ‘유다’와 비교하며 상심하고 ‘교회 안의 유다’에게 마음을 뺏겨 수없이 요동치며 산란해지는 우리 마음을 보았습니다.

사탄의 작업입니다. 우리에게서 사랑을 뺏으려는 사탄의 술수입니다. 사탄은 최고의 행복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우리 안에서 사랑을 훔쳐내고 그 자리에 죄를 넣어주기 위해서 무진 애를 씁니다. 이기적이고 편파적인 생각을 쑤셔 넣어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도록 일을 꾸밉니다. 우리가 지닌 사랑의 능력이 맥을 못 추도록 갖은 수를 부립니다. 더러 행하지 않고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하는 줄로 착각하는 일도 틀림없는 사탄의 영역이니, 적극적인 탈출이 필요합니다.

삶은 추상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과 신앙도 결코 추상적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살아가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실천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스스로 희생하심으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의 피를 쏟고 살을 찢어 우리를 먹이심으로 증거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해서 피와 살을 나누어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제자들처럼 이웃을 위한 땀과 눈물을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들처럼 주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능을 복음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높아지지 않고, 강해지려 하지 않고 세상을 살리셨던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느님과 화해토록 하는 고귀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꺼이 환난까지도 주님의 은총인 줄 깨닫는 믿음의 용사로 살 수 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마음 안에 보배처럼 귀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당신의 것을 양껏 꺼내어 후하게 사용할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새겨진 주님의 것을 키우고 경작하여 사랑을 살아내는 기쁨이야말로 ‘유다를 뺀’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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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평화

가끔‘주님을 몰랐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러면 참으로 모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두려움을 만나곤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 저는 권력이나 명예나 돈이나 혹은 온갖 세상 환락에 빠져서 앞뒤 좌우 가리지 못하는 인생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신부로서 살아가는 지금도 가끔 그런 욕구들이 용솟음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절절한 가슴으로 그저 예수님께‘알려주셔서, 사람답게 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되뇌며 기도하는 날도 있습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하느님께서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저에게 오시어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안아 주시고, 씻겨 주시고, 입 맞춰 주시며(에제 16, 9 참조) 아무것도 아닌 저한테도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겁내거나 산란해지지 않는 평화까지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토록 가득히 안겨주신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불평화의 아픔을 곱씹는 순간이 많음을 고백합니다. 제 안에 있는 게으름과 방종, 거짓과 오만 그리고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속 좁은 고집들이 그 원인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저를 속입니다. ‘그게 인생이라고’하지만 제 마음 깊은 곳은 압니다. 그것은 핑계이고, 위선일 뿐 모든 것은 제 탓임을.

그럼에도 저에게는 제가 누릴 평화의 희망이 있습니다. 자비의 아버지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기다려 주시며 외치시는 하느님의 침묵과 사랑의 고백을 듣기 때문입니다. 참 세상이 평화로우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저도 평화로우면 좋겠습니다. 힘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이 살기 좋은 거짓 평화가 아니라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도, 소외되고 약한 이들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참 평화. 그 가운데 하느님의 아들인 제가 그분의 평화와 위로와 자비를 실천하는 작은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 14) 참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라고.

▦ 부산교구 김영환 로사리오 신부 : 2016년 5월 1일
  |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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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인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2] 1219
127   [의정부] “예수님!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1] 1096
126   [서울]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  [2] 1177
125   [안동] 살리시는 하느님  [2] 1070
124   [부산] 함께 계시는 예수님  [4] 1201
123   [대구]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1] 1137
122   (녹) 연중 제10주일 독서와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2] 1026
121   [수도회] ‘평화를 주고 간다.’   2000
120   [광주/전주] 사랑이라는 평화  [1] 2208
119   [마산] 두 부류의 삶  [1] 2246
118   [수원]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3] 2549
117   [춘천/원주] 세상 속에서 자유, 평화 나누자  [2] 2368
116   [청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702
115   [의정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431
114   [인천] 평화와 미소  [4] 2511
113   [안동] 성삼위 하느님과의 친교를 열어주시려  [3] 2362
112   [서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  [5] 2501
  [부산]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5] 2240
110   [대구] 우리의 평화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3] 2406
109   [의정부/대전/군종] 참 평화  [5] 2436
108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3] 1855
10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 1663
106   [수도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 1639
105   [군종] 예수님은 내게 행복을 주시는 분  [2] 2152
104   [수원] 새로운 계명  [3] 2308
103   [전주/제주/광주] 그것을 보고  [4] 2282
102   [의정부] 껍데기와 알맹이가 있습니다.  [2] 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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