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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십자가를 지고"
조회수 | 1,705
작성일 | 04.06.18
오늘도 요셉 형제는 무표정하게 천정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회갑을 일년 앞두고 쓰러져 3년 동안 병원에 있다가 차도가 없어 집으로 옮겨온 지 십 여년, 칠순의 마리아 자매는 여전히 남편 걱정뿐입니다.

요셉 형제는 의사소통은 커녕, 손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합니다. 하루에 여러 번 죽을 쑤어 식도에 연결된 관을 통해 식사를 하는데 이 일을 마리아 자매는 지난 1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단 하루를 마음 놓고 외출하지 못하는 마리아 자매는 주일 오전 급하게 미사 참례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젊어서 밖으로만 돌던 남편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35년 동안 재봉틀을 돌렸는데 이제는 병시중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병든 남편에게 소홀하면 행여 자식이 죄 받을까 두렵고, 말은 못해도 남편은 다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 하나 희생하면 자식들도 자기가 맡은 일 열심히 할테고…, 누워 있는 양반도 편안하지 않겠어요.” 병자 방문 때 들려주는 이 말씀에 가슴이 저려오며 눈물이 핑 돕니다.

오늘도 베드로 형제는 리어카를 몰고 고물을 모으러 다닙니다. 왜소한 체구에 오십이 가까운 베드로 형제는 두 자녀를 혼자서 키웁니다.

10년 동안 병든 아내를 위해 지극 정성으로 공을 들였지만,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 아내를 지난해 봄 멀리 떠나보냈습니다.

아내를 보내고 일주일쯤 후, 정신을 차린 베드로 형제는 리어카를 몰고 거리를 나섰습니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뒤로하고, 열심히 고물을 수집하였습니다.

언제나 입가에 머금은 잔잔한 미소와 친절한 말씨는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 누구보다도 더 많은 고물을 모을 수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잊지 않고 건네주는 음료수 한 병을 두고, “이러지 마십시오! 아이들 키우기도 힘드신데…” “아뇨! 괜찮아요. 오늘 돈 많이 벌었어요. 제가 좋아서 해 드리는 건대…”

꼭 이 말이 오갑니다. 두 아이는 잘 자라고 있고, 베드로 형제는 기쁘게 살면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십니다.

오늘도 요셉 신부는 신경질을 마음대로 부립니다.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거운가 봅니다. 주위에서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일에 짜증을 내니, 다같이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리아 자매와 베드로 형제같이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할건데요.

마산교구 이성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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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즈가12,10-11.13,1
제2독서 : 갈라3,26-29
복음 : 루가9,18-24

묵상길잡이: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당신의 인품을 믿기 때문에, 당신이 한 말을 믿고, 당신의 약속을 믿고, 당신의 요구도 수락하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분의 요구도 받아들여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인가?

1. 이스라엘, 메시아 대망(待望)으로 버티어 온 민족.일찍이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연구한 결과 몇 가지 역사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소수 민족이 열강(列强)의 세력다툼에 오래 시달리다 보면 그 소수 민족은 강대국에 흡수되어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 희랍, 이집트, 로마 등 지중해 연안을 주름잡던 대 제국들의 틈바귀에서 수 없이 시달려 온 민족이었다. 토인비가 말하는 역사 법칙대로라면 이스라엘은 일찌감치 강대국에 흡수되어 멸망했어야 할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도 끈질기게 모든 시련을 이기고 참으로 용하게 역사 안에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주 중요한 이유는, "약속된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라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 기다림은 시련이 가혹해지면 질수록 더욱 팽배해져 갔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도 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면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11,3) 하고 묻게 하였던 것이다.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메시아인가?" 하는 것이었다.

2.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어느 날 예수님의 일행이 가이사리아 지방을 여행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며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제자들은 "대개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마는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당시 일반인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베드로는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자기정체를 알아본 베드로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당신은 메시아이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고통받는 야훼 종'임을 상기시키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3. 나에게 있어 예수는 누구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름난 성인이나 위대한 예언자 아니면 초인(超人)일 뿐이다. 이것은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만을 보는 것이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나자렛 사람,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인 그 예수가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며, '하느님의 아들', '약속된 메시아', '구세주'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 구세주임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철저히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도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아닌가? 신앙인이라면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라는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분께만 구원이 있음을 믿는 참 신앙이 있는가?

많은 현대인들은 예수를 별로 찾지 않는다. 과학기술과 부(富)와 쾌락이 현대인의 메시아이며 우상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개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은 자신부터 환골탈퇴(換骨脫退)하는 자기부정의 아픔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 아픔을, 십자가를 외면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하신 오늘 복음의 말씀이 새롭게 들리는 요즘이다. 우리는 금년에 십자가의 뒷받침이 없는 영광이 얼마나 물거품인가를 배우고 있다. '쉽고 편한 것 = 좋은 것, 어렵고 힘든 것= 나쁜 것'이라는 사고가 만연해 있다.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지만 삶으로는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아직도 내 삶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냥 주위를 맴도는 이방인은 아닌가?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어떤 가치도 창출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임을 잊지 말자.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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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만일 예수께서 저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저는 우물쭈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바르게 대답하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자기를 아는 사람이 예수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 있게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려면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지식(知識)이 아닙니다. 예수는 나자렛의 목수 출신이고, 그분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며 그분의 형제들이 누구인지(마태13,55) 따위를 아는 객관적인 지식으로 박사(博士)가 될 수는 있겠지만,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지식(知識)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을 줍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 안에 귀의처(歸依處)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강영구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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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하면서 그분의 제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예수님을 주님이요, 스승으로 섬기는 것은 그분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넘는 군중을 먹일 수 있는 능력(루카 9,10-17) 있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풍랑 치는 바다를 잠잠하게 할 수 있는(루카 8,22-25) 권능을 지닌 분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그분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은 그분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되살려 내시고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을 말씀 한마디로 고칠 수 있는 치유治癒의 능력(루카 8,40-56)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루카 9,58) 떠돌이 노숙자다. 십자가에 매달린 체, 남의 목숨은커녕 자기 목숨도 건지지 못하고(루카 23,35-37)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무능한 예수님이 나의 스승이요, 주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자신 있게 고백한다. 까닭은 그분이 기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루카 9,18).

만일 예수님이 기도의 끈을 놓으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돌멩이로 빵을 만들어 백성들을 먹였을 것이고(마태 4,3), 슈퍼맨처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박수갈채 받는 인기인이 되었을 것이다(마태 4,6). 그리고 악마와 야합해서 온 세상을 차지하는 권력자(마태 4,9)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오르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마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하고 기도한다. 무능하지만 기도하는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틀림없다. 나도 유능하고 힘 있는 사제가 아니라, 무능하지만 기도하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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