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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원주] 간절한 통회의 마음
조회수 | 2,460
작성일 | 07.06.13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모든 생명체가 암수 짝이 있었으나, 남자인 아담(사람)만이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 옆에 아리따운 여자가 서있게 됩니다. 하와가 탄생된 것이지요. 그때 아담이 기쁜 나머지 목청껏 부르짖은 탄성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 23)

아마도 아담의 탄성 뒤에 또 다른 말을 덧붙이라면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구나!”가 제격일 것입니다. 이렇게 기뻐하였던 아담은 뱀의 꼬임에 넘어간 사랑하는 하와가 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함께 먹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느님께서 아시고는 분명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창세 3, 11)

이쯤 되면 사내대장부가 나무숲 사이에서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제가 따 먹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를 고발합니다. 방금 전 사랑과 기쁨의 탄성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곰곰이 묵상하면 인간이 지은 첫 번째 죄인 원죄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따먹은 뒤의 잘못된 처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았던 죄, 자신의 죄를 남에게 덮으려 하였던 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 같은 죄를 끊임없이 짓고 있습니다. 자신은 깨끗한 척, 아무런 죄가 없다는 듯이 살면서 남을 단죄하는 성향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가 위대한 것은 이 같은 사실에 부끄러움 없이 그대로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은 단연코 다윗 왕입니다. 그 위대한 임금의 더러운 치부도 그들은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둘도 없는 충신이었던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한 사실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 다윗이 위대한 까닭은 아담과 같은 치사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회개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 13)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내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참회하는 기도를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51, 3~5)

내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거라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성인 성녀나 위인들까지도 용서받지 않고 생을 살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용서 받음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도 용서하며 살았기에 그 위대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의 단점을 살펴보면 내 자신 안에는 더 추악한 같은 단점과 잘못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신학은 눈물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가 예전에 지었던 수많은 잘못에서 용서받은 기쁨과 회개의 끊임없는 눈물에서 비로소 신학이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성 바오로의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25)

내 안에 있는 죄를 내 자신 스스로 볼 수 없으므로 이웃을 통하여 볼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 그분께서는 나의 잘못에 대하여 탓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간절한 통회가 있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감격의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 50)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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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할 텐데…”

“우리 역시 자신을 죽이는 개인의 십자가를 통해 천국의 은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천국’에 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본당 교우들에게 질문을 하면 “죽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일단 ‘죽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알면서도 삶으로 실천하기를 머뭇거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내 욕심에서, 이기심에서, 세속에서 나 자신을 죽여야 부활할 수 있고 천국의 영광도 누릴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 죽음 뒤에 부활할 수 있었고 많은 성인들도 십자가 뒤에 숨겨진 부활을, 천국을 체험하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자신을 죽이는 개인의 십자가를 통해 천국의 은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오늘 복음은 한 여인이 죄의 용서를 청하는 과정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바리사이들은 또 우리들은, 그 여인을 용서하질 못합니다.

자신의 죄보다는 그 여인의 죄를 바라봅니다. 자신은 죽질 않으면서 그 여인의 죽음, 즉 그 여인의 회개를 받아들이질 못합니다. 그 여인이 청한 용서는 자신의 지난 삶을 이제 죽이고 새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죽이질 않았다면, 또 무릎을 꿇고 지난 삶을 버리지 않았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천국의 삶, 용서의 삶을 받아 얻은 것입니다. 용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아집과 편견, 이기심 그리고 욕심으로부터 ‘나’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용서받은 여인은 바로 자신을 깨부수고 자신을 죽이는 용기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이는 네 ‘죽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얻은 것은 ‘평안(천국)’이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께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로부터의 자유와 자신을 버리는 온전한 포기 즉 내적인 죽음을 통한 그분과의 일치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버리는 과정 안에서 얻는 평화는 바로 이웃에 대한 용서의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회개한 여인은 사회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기에도 너무나도 부끄러운 그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인이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준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을 우리가 삶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다른 이웃들을 가슴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최혁순 요셉 신부
  |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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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이번 주 복음말씀은 그 유명한 "예수님발에 향유를 붓는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드라마틱한 이 장면을 통해 참으로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고 싶으면 하느님이 만들어준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러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다가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후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이때 모든이들은 그여인을 자기가 만든 눈으로 바라보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이 만들어준 눈으로 바라 보셨습니다.

자기눈으로 바라본이들은 "저 여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구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구나"등으로 생각하였고 하느님 눈으로 바라본 예수님은 "저 여인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주어야지"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천당에 간다는 것은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나라의 손님이 되는것이 아니고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어 하느님의 생명,존재,사랑을 몽땅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만이 하느님의 생명, 존재, 사랑을 몽땅 누릴수 있습니다. 이런이유로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기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되어야 하느님의 생명, 존재, 사랑을 몽땅 누릴수 있는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되는 비결은 바로 "모든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내육체, 내직위, 내명예, 내재산, 내지식등이 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이들이 존재로 더나아가 이세상 전체가 환영,그림자, 물거품, 지나가는 바람, 말라버리는 아침이슬 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하느님만이 모든것의 모든 것으로 생생히 보입니다.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또 생각을 전환시키고 끊임없이 하느님 생각으로 전환시킬수있습니다. 기쁨을 하느님의 미소로 보고 감사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고 고생을 '조금 있으면 휴식'으로, 슬픔을 '조금있으면 기쁨'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가난한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봅니다.

하느님 눈을 가지면 하느님처럼 됩니다. 다같이 하느님의 눈을 가져 지금 여기서부터 "대자유인, 구원받은이" 로 살아 갑시다.

원주교구 김규한 신부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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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자비, 용서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생명 안에 머물기 위한 신앙인의 삶의 조건이 무엇인가 묵상해 봅시다.

먼저 복음을 보면 ‘죄 많은 여인’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만납니다. 즉, 율법적인 시선과 틀 안에서 여인을 바라보는 바리사이 시몬과 사랑과 용서라는 관점과 시선에서 여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즉, 시몬은 여인에 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고, 예수님은 죄보다는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그 여인이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잘못을 통회의 눈물로 뉘우치는 여인의 행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결국 시몬은 편협한 시각, 율법주의 때문에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결국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율법주의, 편협함 안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시각과 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길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조건이 있다면, 믿음과 실천입니다. 복음을 보면, 하느님을 향한 서로 다른 마음도 보게 됩니다. 즉, 바리사이 시몬과 죄 많은 여인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시몬은 지식과 이론, 즉 율법적인 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틀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하지만 죄 많은 여인은 다른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형식과 틀보다는 죄인을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의탁, 그리고 눈물로서 그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그리고 그 하느님의 생명 안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죄 많은 여인과 같은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 (집회서 28,2-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죄 많은 여인과 같은 삶이 아닐까? 진정한 구원은 다른 이의 허물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물을 통해 먼저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원주교구 윤종민 신부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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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그 어려운 것을 자꾸 해내지 말입니다.

미사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밀림 속 원주민들은 숲속 여기저기서 나와 작은 양철지붕 성당으로 200명 가까이 모여들었다. 이중에 세례를 받은 사람은 100명 가까이 되지만, 영성체 하는 사람은 고작 20명 남짓인데, 이유는 그 원주민들은 일부다처제 부족이고, 그래서 결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인장애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선교사제는 밀림의 원주민들이 성체도 못 모시는데 뭐하러 이렇게 성당을 나올까 하며 의아해하다가 어느 한 날 물어보았다. 성사생활을 못하는데 성당을 나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냐고…. 그러자, 그 원주민은 더 의아해하며 답변한다. 신부님!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하느님이 그것 때문에 저를 사랑하시지 않는 건가요?

이 원주민의 답변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을 죄인이라 일컬으면서, 율법에만 매달리며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겠지만, 예수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읽으셨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여인의 믿음에 더 집중하시고 그 여인의 죄를 사해주신다. 율법과 계명 본래 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없고 그 계명 자체에만 매달려서 그것을 지키는 것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듯이 타인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 메시지를 행동으로 표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이 오늘 2독서에 잘 나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로움이다. 본래 의로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상 그 대상은 공익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공익을 위해 의롭게 산다는 것이 희생을 동반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자주 질문해야 한다.

나는 의로운가? 우리 가족은 의로운 사람들인가? 내가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로움에 민감한가? 우리 사회는 의로움에 목말라 하는가? 이 세상은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가 있는 여인에게 눈치를 줄 때 예수님은 주저 없이 의로운 모습을 보여주셨다. 물론, 예수님을 직접 목격 한 사람들조차도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겠지만, 본래 의로운 일을 행한다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더러, 행할 때는 어차피 싫은 소리도 듣고, 왜곡도 당하고, 모두에게 공감 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드는 생각인데, 예수님께서 주변을 의식하시면서 의로운 행동에 인색하신 분이었다면, 내가 과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가졌을까 라 는 생각을 한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예수님은 그 주변의 잡다한 시선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전혀 흔들리지도 않으시면서, 뭔가 지혜로움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할 때는 참으로 의롭게 그 상황을 헤쳐 나가시는데 그 모습에서 가슴이 아주 후련한 통쾌함마저 느끼곤 한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얼마 전 인기리에 끝난 어떤 드라마의 유행어가 떠오른 다. 그 어려운 것을 자꾸 해내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 춘천교구 권오준 베네딕토 루치아노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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