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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조회수 | 2,532
작성일 | 07.06.14
루카 7,36-8,3 또는 7,36-50

두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 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는 그 사실을 모래에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떼니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죄인으로 유명한 ‘여인 한 사람’(요한 7,37)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죄 많은 이 여인이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으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기억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여인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는 이 여인은 말도 없이 오직 행위로써 자신의 진심을 예수님께 보여 줍니다.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더니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이 모습에서 여인은 자기 자신의 잘못과 죄를 ‘용서’ 청하는 가장 겸허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할 때 주님은 우리의 잘못을 모래 위에 기록하시고,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였을 때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며 당신의 자비와 은총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겸허히 고백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성덕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제의 죄인이 진심어린 참회로써 오늘의 의인이 되는 교회입니다. 과거 행실이 좋지 못했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오늘 성녀가 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진심으로 뉘우침으로 천국으로 초대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을 받은 우리가 이제, 그 사랑과 자비를 가족과 이웃 안에서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지영 사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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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사랑

오늘 복음은 신약성경 중 가장 스캔들이 될 만한 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점잖은 식사 자리에 갑자기 죄 많은 여인이 나타나 흐느껴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더니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까지 발라 드립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사람들이 당황한 것은 물론 집주인 시몬은 왜 예수님께서 더러운 여인을 가까이 하시는지, 더구나 그녀를 용서하고 따뜻한 사랑의 말까지 건네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시몬의 속내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빚진 두 사람의 예를 들어 그녀의 마음을 전하며 시몬에게도 더 큰 사랑의 삶을 제안하십니다.
 
그러나 자기는 의롭고 깨끗하다고 생각한 바리사이 시몬은 부정한 여인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큰 사랑을 이해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처사를 못마땅해 하며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속 좁은 사내 시몬은 식사에 초대하고도 참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신뢰와 용기를 드러낸 죄 많은 여인은 과거를 깨끗이 씻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합니다.
 
도대체 이렇게 용감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한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 루카복음 저자는 이어서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줄곧 따라다녔던 여인들을 소개하는데 그들 중에는 막달레나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간음하다가 들켜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을 때 예수님의 개입으로 극적으로 살아난 여인으로 알려져 있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 복음의 죄인이 동일 인물인지는 학자들 간의 토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큰 사랑을 입고 죄의 구렁텅이를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여인이었음은 사실입니다.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는 용서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이렇게 큰 사랑은 예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며 바로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년은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마음의 문까지 닫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그의 어머니는 말 못할 큰 슬픔에 빠져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청년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청년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습니다. 한쪽 눈만으로 살아가는 것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붙들고 간곡히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원을 하고 간청하며 매달렸지요. 마침내 마지못해 수술을 하게 된 아들은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때가 되어 눈에 감긴 붕대를 풀고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붕대를 푼 순간 아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바로 눈앞에 한 쪽 눈이 없는 어머니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장님이 된 내가 네게 짐이 될 것 같아 한쪽 눈만 줄 수밖에 없었단다."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 보입니다.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그리스도 신자 생활에서 제한이 없는 유일한 임무는 사랑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어가던 여인을 살려 주시고 용서로써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큰 은총을 입은 여인들은 완전히 새로 태어났으며 예수님의 적극적인 추종자로 변화됐습니다.
 
사람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용서이며, 회개의 길로 돌아서는 순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사랑을 체험했을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 같이 자기는 깨끗하니 부정한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고 죄가 많은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살리는 자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처럼 자신의 잣대에 맞춰 이웃을 판단하고 처벌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법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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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7,36-8,3 인생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다윗처럼 회개하고, 죄녀 같이 고백하며 살아가자

인생이 연극이라면, 희극인가 비극인가? 각박하고 메마른 인생보다는, 부드럽고 따사롭고 정 있는 삶이 좋고, 죽고 사는 아귀다툼보다는 여유 있고 아량 있고 양보하는 삶이 좋고, 무관심과 이기적인 사회보다는 보은하고(은혜 갚고) 협동하는 삶이 좋은데, 이상과 현실은 왜 다른가요? 누구의 탓입니까? 마귀의 피가 흘러서일까요?

오늘의 제 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 왕조의 전성 시대에 다윗 왕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죄를 지었습니다. 요합 장군 휘하의 장병들이 한창 전쟁 중에 있을 때에, 다윗 왕은 일선에 나가 싸우는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탐하여 정을 통하고, 끝내는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어 죽게 하고 나서는 우리야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때에 예언자 나단이, 비유를 들어 다윗 왕을 몹시 꾸짖습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가 품삯으로 얻은 암새끼양 한 마리를 애지중지 길렀습니다.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는데, 그 부자는 자기가 기르는 소나 양도 많건마는 잡기가 아까워서 가난한 집에서 기르는 한 마리뿐인 새끼 양을 빼앗아다가 잡아, 손님 대접을 했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난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나단에게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단이 다윗에게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왕으로 갖출 것을 모두 넉넉하게 주셨으나, 욕심이 한이 없어, 남의 아내를 탐하여 죄를 지었으니, 집안에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을 것입니다.”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하며, 죄를 고백하고, 깊이 참회하여 용서받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것이 옛날의 남의 얘기입니까?

자기는 넉넉한데도 불만하고, 자기 것은 털끝 하나 꼼짝 못하게 하면서도 남의 것은 무시하여 마구 짓밟아 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있다’면, 남의 얘기일 수 없습니다. 내 것이 중하면 남의 것도 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죄많은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뭇사람에게 짓밟히고, 웃고 울다 버림받아, 상처투성이가 된 여인! 그것이 그 여인만의 죄입니까? 돈과 쾌락과 폭력의 사회 풍토가 문제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믿었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도 남을 넓으신 아량과 폭넓은 사랑을 믿었으며, 새인생의 길을 열어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기 죄를 시인하고 깊이 참회하였으며,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다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새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횡포를 뉘우쳐 봉사 생활을 시작했고, 죄지은 여인은 죄를 뉘우쳐 열심히 예수를 돕는 봉헌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 메시아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이사42,1d-3c)고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나단의 꾸지람을 듣고 회개한 다윗처럼,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참회하여 구원 얻은 죄인처럼, 내 죄를 인정하고 참회 고백하여 용서받고,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이를 낫게 해 주시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여 화합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멋있게 삽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한 행복한 인생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순창 신부
  |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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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사랑하였으므로 많은 죄의 사함을 받는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즉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루가 18:3)과, 자기 도취에 빠져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이룩한 공로(?)로써 구원을 얻으리라는 환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구차한 처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주 열심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을 거절하는 자들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업신여긴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죄를 짓고 저주받을 행동 속에서 살아온 여자는, 참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세상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므로써, 그녀는 주님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서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향유를 샀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죄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뜻에서 그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발라드릴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깊은 죄에 빠져 타락적인 생활을 해 오던 이 여인에게 주님의 음성은 생명에 찬 재생의 길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녀의 텅빈 마음을 주님의 진리가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어 그녀의 영혼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 여인은 부끄러움도 체념도 없이, 초대받은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에 서슴없이 들어가 주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지난 죄를 뉘우치는 한없는 눈물과, 새롭게 솟아나는 사랑의 생명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찾았으며, 주님과 더불어 영생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은 얼마나 교만하고 편협하고 옹졸한가?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기는 했으나, 사랑과 존경심이나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시험하는 태도에서였다. 그러기에 그는 초대한 손님에게 응당 예우해 드렸어야할 존경이나 환영의 표시를 보여드리지 않았다. 즉 발도 씻겨 드리지 않았으며 우정의 입맞춤도 없었고 잔칫상에 나가기 전에 예의 표시로서 발라 드렸어야할 향유도 거절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믿음에 익숙한 자들이 주님께 응당히 받쳐야할 예의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절하는 태도와도 같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를 알았으며, 예수님은 그러한 죄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았기에, 부끄러움도 잊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눈물로써 주님의 발을 적셨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과거의 생활을 청산한다는 의미에서도 그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부어 드렸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것마저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닫혀진 마음에 대해, 많이 빚진 자와 적게 빚진 자의 돈을 탕감해 준 인자한 주인의 예화를 들려주신다.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

서울대교구 김몽은 신부
  |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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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한 것

친애하는 여성연합회 여러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후 선교 3세기를 맞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원과 그 역할을 새롭게 점검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 고유의 소명을 실천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발 맞추어 여성 연합회가 활성화를 위해 본당 중심으로 기구를 개편하는 한편 여성의 평신도 사도직을 모색, 정립하며 향방을 찾기 위한 일환으로 여성 연합회의 회보를 발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인류 역사상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여성의 역학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신약 초기에는 깊은 사랑과 믿음과 용기로써 언제나 주님 가까이 머물면서 사도들이 다 도망간 십자가 밑에까지 남아 주님의 고통을 함께 한 사람들도 대부분이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의 박해시대에 여성들이 보여준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은 이 땅의 복음화에 귀한 밀알(요한 12,24)이 되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뿐더러 지난 해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여성들의 희생과 봉사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성들은 교회 안팎에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며 견고한 신앙으로 평화가 깃든 새 땅(베드 3,13)이 오도록 거들고 하느님 나라가 임하도록 이바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와 교회의 발전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에는 갖가지 비인간화 현상이 만연해 있어 사랑이 더욱 메말라 가는 듯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진정한 인격체로 존중받기보다는 한낱 도구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근로자들, 안내양들, 가정부들, 그밖에도 많은 여성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인간화를 위해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필립 2,5)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믿음을 간직하고 그 믿음에 따른 행동(야고 2,17)을 형제들에게 잘 보여 줄 수 있도록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고 소외 받고 고통받는 형제들 안에서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함께 고통을 나눔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속에 하나 되어 여러분이 받은 능력과 은총을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활동하도록 새롭게 변화되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여러분의 사랑과 봉사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꽃 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삶의 원천과 향방을 찾고 그에 따라 살므로써 여성 연합회가 평신도 사도직을 원만히 수행하고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이웃에게 주님을 보여주고 주님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김수환 추기경
  |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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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오백 데나리온 對 만 탈렌트

하느님 앞에 누가 허물이 없고 빚이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한 시인의 고백은 여전히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의 죄는 무엇일까요? 1독서의 말씀에서 보면,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 아내를 데려다 자기 아내로 삼은 것이 다윗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무시한 죄였습니다. 사람에게 저지른 패악이 주님 앞에 지은 죄였습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는 한 여인을 고을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죄인 정도로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 율법에서 벗어난 행위를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채권자(하느님)과 채무자(사람)의 관계(빚의 탕감, 죄의 용서)의 비유로 하느님의 사랑과 그에대한 인간의 응답(사랑)을 가르치십니다.

2독서의 바오로사도는 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의로움을 인간들의 율법에 의한 행위 따위로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가벼이 여기는 그 태도야말로 하느님 앞에 저지른 죄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조용히 있어야지!(죄인인 주제에 쓸데없이 세상사의 시시비비를 따지려 들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하느님 앞에 범하는 더 큰 죄악일 수 있습니다.

1독서의 다윗의 경우처럼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자 기꺼이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율법으로 죄인이었던 사람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까지 속죄 제물로 내어놓으시는 정의와 은총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었던 다윗을 당신 백성에 봉사하는 성군으로 만드셨으며,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인을 제거하려 했던 바오로 사도를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복음의 여인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에 응답합니다.소수의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독단이 횡행하는 사회, 다수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짐짓 근엄하게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어 해방을 선포하)는가?”고 말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을 놓고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죄인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을 놓고 따지거나 불평불만 갖지 말고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윽박지르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 받아놓고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둔 형국입니다(마태 18,23-35 참조).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총과 의로움을 믿기에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주님께 바치며,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충실히 따르”고, 강과 산과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을 전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합니다”(교회헌장 8항).

박동호 신부
  |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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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 시몬과 죄 많은 여인은 남매가 아니었을까요?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남매가 있습니다. 오빠는 모든 일에 성실하고 모범적이며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소위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의 여동생은 자기 멋대로 살면서 말썽만 피우고 주위 사람들로 부터 늘 손가락질 당하는 문제아입니다. 어느 날 여동생이 제대로 큰일을 저지릅니다. 부모님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값비싼 꽃병을 산산조각 내버린 것입니다. 그날 저녁 동생은 아빠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갖은 애교를 다 부립니다. 오빠는 동생의 행동이 역겹습니다.

복음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바리사이 시몬과 예수님은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로마사람들 처럼 커다란 방석 위에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였던 듯 한데, 온 동네가 다 아는 죄 많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발치에 있다가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를 풀어 닦아 드립니다. 게다가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까지 발라 드립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소리 죽여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시몬이나 주위 사람들의 생각을 모를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난감한 처지에 놓였지만 자기변명을 하시지 않고, 오히려 여인을 두둔하시면서 500데나리온과 50데나리온의 빚을 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b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루카 7,42)는 말씀이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채권채무관계를 사실대로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그 크기와 무관하게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해 주시면 용서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죄의 빚을 탕감해주신 하느님을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하느님께 모범적인 아들이나, 말썽쟁이 딸이나 모두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최소한의 격식에 맞춰 모셨을 뿐, 정작 중요한 ‘더’가 빠졌습니다. 하지만 죄 많은 여인은 달랐습니다. 물이 아니라,b자신의 참회의 눈물로 발을 적십니다. 수건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움의 상징인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분의 머리가 아니라,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까지 발라 드립니다.여인은 ‘더’라고 하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성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바리사이 시몬도 사랑하시고, 죄 많은 여인도 사랑하십니다. 둘 다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사랑스러운 딸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시몬과 여인의 태도가 다를 뿐입니다. 엄친아 바리사이 시몬은 “우리 아들 최고!”라는 부모의 ‘칭찬’에 집착하고, 말썽쟁이 죄 많은 여인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면 언제라도 다시 받아주시는 부모의 ‘마음’에 매달립니다.

서울대교구 김영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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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

오늘 말씀의 주제는 죄로부터 해방된 참된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사람, 죄가 크고 많지만 회개하는 사람, 작은 죄를 지었기에 회개하지 않는 사람 중 누구를 가장 기뻐하시고 반기실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과 행실이 나쁜 여자로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죄 많은 여인이 진정한 회개로 오히려 하느님 의 더 큰 사랑과 용서를 받는다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즉 죄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지만, 죄의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며 회개 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무엘 하권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다윗의 범죄 사실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 우리야 장군의 아내에게 반하여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여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자신의 간음죄를 은폐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야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그를 취하게 만든 다음 집으로 돌려보내 아내와 잠자리를 갖도록 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우리야는 두 번이나 집으로 돌아 가지 않고 왕궁 문간에서 잤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다윗은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냅니다. 총사령관은 다윗의 편지 내용대로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남겨두고 후퇴하여 우리야를 칼에 맞아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야의 애도 기간이 지나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들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거의 완전범죄 같지만 어찌 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어 그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그를 꾸짖으십니다. 다윗은 그 즉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합니다. 다윗이 진정 위대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죄를 지었지만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은 눈물로 회개하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입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며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한편 바리사이는 자신은 죄가 없는 의인인 것처럼 회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을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초대를 받아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죄 많은 여인과 바리사이 중 누구를 닮았을까요? 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바리사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진심 어린 참회의 마음으로 예수님께 정성스런 마음의 예물을 봉헌함으로써 죄 많은 여인처럼 예수님을 꼭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 2016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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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간으로 태어나 알게 된 하느님

▪ 어느 날 지구라는 별에 왔습니다

60년도 더 된 과거의 어느 날, 나는 지구라는 별에 태어났습니다. 자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걸 모른 채, 인간으로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억할 수 없는 과거 어느 날, 내가 인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구에 내가 적응하는 것은 지금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세포로 이뤄진 내 몸 안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발생하면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합니다. 내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라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남들이 정해 놓은 복잡하고 규격화된 삶의 기준에 적응해서 살아야 합니다. 말도 배워야 하는데, 인간이 사용하는 말은 동물들의 세계에는 없는 것입니다. 갈수록 섬세한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또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랑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어른이 되어도 사랑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에 무관심하면서 일생을 마치는 불행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느 날 보니, 친구들도 나에게 경쟁 상대가 되어서 다가왔습니다. 이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평생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사춘기가 되어서 이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기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일 뿐입니다. 이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기주의로 살아가게 된다면 모두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죽는 것뿐만이 아니라 산천초목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 지구라는 별에는 하느님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하느님(神)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하느님이 존재합니다. 특히 무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사는 한국인의 역사 속에 많은 신이 등장합니다. 중국에 가도 그렇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 노출된 일본은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가면 수많은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신들, 아메리카 대륙의 신들도 무수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많은 신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많은 신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신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 신이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20세기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물론적 공산주의는 끔찍하게 수많은 인간을 파괴하였습니다.

▪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나는 어릴 적에 어머니와 함께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라틴어로 하는 미사에 끌려다니고, 사춘기에는 스스로 성당에 갔습니다. 그때에 예수라는 분이 서서히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온 세상에 예수님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싫어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성모님은 절에 모신 부처님과 보살님 정도로 여겨지고 맙니다. 교회에 나와서 알게 된 신이나 세상에 많이 모습을 드러낸 신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맙니다. 즉,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 잘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시고 고통을 가하시는 하느님, 열심히 빌면 복을 내려주시고 화를 면하게 하시는 하느님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볼 수 없으니 아무렇게나 하느님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대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종교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알려진 하느님은 전혀 새롭습니다. 물론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와 그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 낯선 하느님, 그러나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교회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성부로부터 파견된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의 모습은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보면(루카 7,36-50)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그 고장의 유명한 창녀가 예수님께 행하는 행위들은 참으로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이 여인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하느님은 인간이 예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게, 많은 빚을 탕감해 주는 하느님, 인간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빚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세계에서 주인처럼 살게 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참고 1베드 1,4).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랑해주고 그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연인 사이처럼, 인간과 사랑을 주고받고자 하는 하느님입니다. 올해 온 세상의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느님을 닮아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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