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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용서의 삶
조회수 | 2,283
작성일 | 07.06.14
바리사이 시몬 집에서의 그리스도, 루벤스 作 (1618년 - 1620년)

찬미 예수님!
한 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제가 어렸을 적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옆집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집은 매일 요쿠르트를 받아먹고 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집 방문 앞에는 맛있는 요쿠르트가 놓여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그만 옆집에 있는 요쿠르트에 손대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머리를 썼습니다. 요쿠르트를 먹기 위해서 위에 있는 은박지를 뜯으면 금방 들통 날 것 같아서 요쿠르트 바닥에 작은 구멍을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요쿠르트를 입으로 조금씩 빨아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조금만 먹고 표시가 나지 않도록 해놓겠다는 처음의 작전과는 다르게 그만 그걸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때 저는 도둑질을 했다는 죄책감 보다는 그 사실을 숨겨야 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고 모른 척 했습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오래가질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재호야, 잠깐 보자’ 라는 말에 얼마나 떨렸던지 ‘아~ 이제 맞아 죽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저의 예상과는 다르게 돈 100원을 주시면서 무엇이 먹고 싶으면 정정당당하게 사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옆집 아주머니께 가서 용서를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가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아주머니께 가서 용서를 청했습니다. 저는 그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었고 또 그렇게 노력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이런 크고 작은 잘못들을 용서받은 기억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때 용서받은 마음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와 같이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저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인은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 큰 사랑의 행위가 아주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늘 항상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하느님께 바쳐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주위에 있는 이웃을 용서해 주지 못하고 미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해 줄 줄 아는 그런 하루, 그런 한 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김재호(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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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점을 채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1996년에 개봉된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기억하십니까? 이 영화는 알코올 중독자인 시나리오 작가 벤과 창녀인 사라의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삼류이지만 의미는 명작입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점 채우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서로가 결점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고, 상대방의 결점까지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사랑을 했습니다. 만일 이들이 자기의 결점을 몰랐다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리사이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동료들이 배척했던 예수님까지도 자기 집에 모실 정도로 아량이 있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흘리고, 향유를 발랐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 시몬은 속으로 예수님의 도덕성에 회의를 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루카 7,40-41)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루카 7,43)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는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주었다.”(루카 7,44-46)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하여 <바리사이 시몬 집에서의 그리스도>를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여인을 가리키며 시선은 시몬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여인을 본받으라고 손짓하듯이. 그분의 발은 맨발입니다. 그분의 수난을 예고하듯이. 그분의 옷은 푸른색 속옷과 붉은색 겉옷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듯이.

바리사이 시몬은 그의 동료들과 놀라워하며 그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시종들은 음식을 치우고 식탁에는 과일만 남았고, 그의 옷은 하늘의 색인 청색과 영광의 색인 금색입니다. 그분께 달콤함과 하늘의 영광만 얻으려는 속셈으로. 그런데 시몬 뒤에는 개 한 마리가 씩씩대며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다른 것에 충성하겠다는 몸짓으로.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애무하듯이. 그녀의 발 아래에는 향유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하듯이. 그녀는 보라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참회로 죄를 용서받듯이. 그런데 이 그림에서 더럽고 지친 발을 끌어안은 여인의 품이 가장 빛납니다.

그리고 대머리의 노인이 안경을 쓰고 여인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그가 베드로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 때 배반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는 큰 죄를 용서받은 여인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옆에는 흰 수건으로 입을 막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여인을 봅니다. 그가 유다입니다. 그는 여인의 행동을 보고 책망했습니다. 비싼 향유를 허비했다며. 그는 예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신한 후에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의 결점을 아는 게 회개이고, 남의 결점을 채우는 게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라고 손짓하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용서한다.”(루카 7,47)

손용환 신부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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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몸짓, 회개의 몸짓

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 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도움을 받은 친구가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묻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에다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는 그 사실을 모래에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선은 한 여인에게 고정됩니다. 행실 나쁜 여자에게 말입니다. 그 이름 속에 그 여인의 모든 행위를 가두고 그 잣대로 그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사랑하려고 해도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행실 나쁜 여자인 것입니다.

가능성, 사랑하면 그녀도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지 않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늘 기회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회개하고 사랑하려고만 한다면, 과거의 모든 모습을 잊으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작은 사랑의 몸짓, 회개의 몸짓을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창조 때 받은 그 원상태의 행복과 평화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박영훈 신부
  |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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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더 좋은 생활을 하길 원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격려해 주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발을 자기 눈물로 닦은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용서해 주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던 이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격려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자들이 있었는데,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가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비유입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이는 죄인인 여자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이는 바리사이를 두고 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얼마를 빚졌느냐에 상관없이, 두 사람 모두 “갚을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죄가 크냐 작으냐에 상관없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 잘못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되돌려서 잘못 자체를 없애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것이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어렸을적에 한 잘못이나 남들이 모르는 잘못, 혹은 남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잘못을 한 경우에는 잘못하지 않은 양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잘못을 한 이들은 크게 질책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오십 보 백 보라고, 잘못을 없앨 수 없다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은 셈입니다.

주님께서는 큰 잘못을 지은 사람이나 작은 잘못을 지은 사람이나 다 함께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 주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를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여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잘못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던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주시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한 번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리사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온 인류를 용서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그 용서의 마음을 전하는 생활을 함께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군종교구 송영욱(프란치스코) 신부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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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평안히 가거라.”

오늘 복음은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유명한 일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식사에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죄 많은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날 정도로 큰 죄를 짓고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소문이 나면 마음 편히 밖에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여인도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합니다. 뒤쪽 발치에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죄를 짓게 되면 자신의 죄를 숨기거나 감추려고 합니다. 보통 단점이나 장애,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다윗도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지만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숨기면 마음이 편해질까? 아닙니다. 누구나 다 한 번쯤 경험은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릴 적 경험이 있습니다. 학교 끝나고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끼리 자주 모여서 놀곤 했는데 놀다보면 싸우는 일도 종종 생깁니다. 한 번은 같이 놀던 동생을 때렸는데 울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일렀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미용실 앞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지나갈 때면 빨리 뛰어갔습니다. 매일매일 등하교하는 길이 불안했습니다. 결국 그 아이의 어머니는 뛰어가던 저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혼이 나고 그 동생과 화해한 뒤에는 그 불안함이 사라지면서 편해졌습니다. 왜 빨리 용서를 빌지 않았을까 후회했습니다.

죄 많은 여인도 동네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불안했을 것입니다. 도망치고 싶었겠죠.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불안함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다윗도 나탄을 통해서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동안 다윗도 죄책감에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잘잘못을 따지시려고 우리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죄 때문에 자꾸 하느님을 피하고 멀리 도망치려고 하는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 군종교구 이종민 요셉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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