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0 57.2%
[수원]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조회수 | 2,472
작성일 | 07.06.15
교우분들의 친교를 더할 방법을 찾다가 산악회를 만들었습니다. 본당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라서 “바오로 산악회”라 이름 붙였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 본당이라 험한 산을 피해 한 달에 한 번씩 산행을 합니다. 그냥 산행이 좋아서 참가한 미신자 이웃들도 생겨나고 있어 예감이 좋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엔 길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중간 중간 봉우리를 넘어가는 길목에 계단이 만들어져 있기도 하고, 미끄러질까봐 발이 닿는 바닥에 타이어 조각을 잘라 촘촘히 엮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푹신하기도 하고 잘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계단의 손잡이도 부드럽게 마감을 잘 해 놓아서 어쩌다 몸을 의지하게 되 면, 거칠지 않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연이은 바위 사이를 올라갈 때에는 굵직한 밧줄을 묶어 놓아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위험하지 않게 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늘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를 위한 수고와 애씀입니 다. ‘나는 이 길이 생겨날 때에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나는 이 계단을 놓기 위해 나무를 나르고 밧줄을 엮은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하는 생각에 더 많이 더 자주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 그동안 감사하지 못했던 자신을 알아채는 것’, 이것이 회개요, 신앙생활의 출발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길’이십니다. 나의 삶이 바로 그분의 수고와 애씀 위에 놓여 있음을 알아채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또, 그분이 누구일까 궁금해 하고 만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번 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체험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용서의 체험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오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일러줍니다.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다른 이의 발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위에 분명 나를 위한 애씀과 수고로 먼지 묻고 더러워진 이웃들의 발걸음이 녹아있습니다. 그들의 발에 시선을 두는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하는 사람’, 곧 신앙인입니다.

감사의 물을 머금고 우리의 영혼이 자라납니다. 감사가 문을 열어줘야 기다리고 있던 은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이웃의 머리, 얼굴, 옷차림이 아니라, 상처 나고 더럽혀진 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원교구 김현(프란치스코살레시오) 신부
460 57.2%
참된 기쁨과 해방

오늘 독서와 복음은 참된 기쁨과 해방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기쁨”이란 크든 작든 우리를 짓누르는 그래서 우리를 폐쇄적으로 만드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를 짓고는 발을 뻗고 편히 잠들 수는 없다고 한다. 항상 불안하고 그 자체가 고통스럽다. 이러한 때에 제1독서의 다윗처럼 나탄으로부터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2사무 12,13) 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죄지은 여인에게 하신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 7,48)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복음: 루카 7,36-8,3: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식사를 하는 중에 죄를 지은 여자가 들어오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리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린다. 그러나 이 바리사이는 예수와 그 여인을 나쁘게 판단하고 있다. 그 여인은 매춘부였는데 예수님은 그 여인이 당신을 만지도록 그냥 두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죄도 일종의 육체적 전염병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 놀이꾼에게 빚진 두 사람의 예를 들어, 많이 빚진 자와 적게 빚진 자들이 탕감을 받았는데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신다. 바리사이는 더 많이 빚진 자라고 말한다. 바리사이는 그 비유의 내용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유가 그 여자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도 이미 하느님께 빚진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사랑이 없거나 아주 부족한 모습이다. 예수님을 초대한 것 자체가 형식적인 것임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44-47절). 진정한 손님접대의 의미는 발을 씻어주고 향유를 발라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자비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다. 그 여인은 바리사이보다 더 큰 사랑을 드렸으니, 이미 그 여인의 마음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는 이미 죄악이 소멸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 그러므로 사랑은 만물의 근원이며,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만남의 시작이며 끝이다. 하느님은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신다.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자신의 부서진 생애, 이것은 향유 병을 깨뜨리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는 자신의 부서진 생애를 바쳐드려 그분께서 다시 모아 주시기를 청하는 여인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란 용서를 구하는 가운데 있으며, 오직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다. 사랑과 용서는 서로 만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일치되어 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48.50절). 이 말씀은 그 여인에게 한 말씀리라기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용서를 얻기 위해서, 또는 이미 얻은 용서의 ‘표지’로서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새겨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여인에 대한 반감으로 보아 그리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47절)고 하신 말씀은 바로 바리사이들을 두고 한 말씀이다. “스스로 올바르다고 믿고 죄의 용서가 거의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러한 잘못이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좋은 소식을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하느님의 사랑을 쉽게 망각하게 된다. 시몬이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처하면서 그 죄지은 여자를 경멸한다면 그는 위험 중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랑이 부족하다. 자신이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만하기 때문이다.”(A. Stoger, Vangelo secondo Luca, Vol. I, Roma 19663).

적게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징표다. 주님께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는 그 여인은 이미 그 죄악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 여인을 단죄하고 스스로 올바르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죄의 표지 아래 있지만, 그 여인은 믿음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으셨다. 오직 하느님만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만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다윗에게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을 1독서에 볼 수 있다. 다윗 같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마음에는 악이 도사리고 있으며 하느님만이 당신의 사랑으로 건져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겨드리고 그 사랑의 행위를 따라 생활함으로써 그분의 업적을 통해 반드시 구원되리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일이 바로 그 여인에게 일어났고, 자만심에 빠졌던 바리사이들의 판단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신앙은 이론적인 지적인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부활에 연결시켜주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실천되어 결실을 맺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은 생동감 넘치는 것이고 모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인 면에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이 시간에 도움을 청하며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6.16
460 57.2%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어릴 적 동생과 심하게 다툰 어느 날,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을 걱정으로 조마조마 하며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혼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를 하라고 하시면서 동생과 다툰 것을 뉘우치고 반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릴 적 내가 경험하게 된 ‘용서 받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얼마나 많은 ‘용서 받음’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게서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은 사람을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고 음식을 나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죄인인 여인이 예수님께 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오히려 ‘채무자 비유’를 해주시면서 그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이가 탕감해 준 이를 더 많이 사랑한다.’

더 많은 용서를 받은 여인의 행동과 바리사이의 행동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모시는 태도의 차이입니다. 바리사이인 시몬은 당시 유명한 예수님을 인사치레로 초대했을 것이고, 형식적으로 맞이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죄많은 여인은 눈물로 지난 시간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치고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며 맞이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여인과 바리사이의 큰 차이점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용서 받음을 체험한 죄인인 여인과 용서 받음을 체험하지 못한 바리사이 시몬, 이 둘 가운데 누가 더 주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지금의 나는 과연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죄인의 모습입니까? 우리에게는 분명 이 둘의 모습이 모두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만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망설이는 모습과 나의 부족함을 뉘우치고자 하는 마음 말입니다. 죄가 많이 있기에 주님을 만나기를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을 들고 예수님께로 오는 이를 기쁘게 맞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도 죄에 억눌려 머뭇거리고 움츠러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 받으러 옥합이 아닌 우리 마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의 회개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 합니다.

최대근(야고보) 신부
  | 06.11
460 57.2%
예수님의 공적활동에 동참한 여인들

연중 제11주일 복음은 주님을 헌신적으로 따라 다닌 여인네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중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인"에 대해서는 앞에서 많이 묵상했기에 생략하고, 여기서는 루카 8,1-3절에 언급된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던 여인'들에 대해서 묵상하겠습니다. 오늘복음의 배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대 땅 전역에 거룩한 새바람이 불고 있는 갈릴래아 제2차 전도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1차 전도기간 동안은 예수님께서 홀로 활동을 하셨다면, 이제부터는 12제자들과 소수의 여인들이 함께 활동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정활동은 더욱더 활성화되어 유다의 온 고을과 마을들이 주님의 승리의 깃발인 하느님의 나라가 나부끼게 될 것입니다.

I, 복음 전도활동

1. 마을에서 마을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에서, '두루 다니다'는 헬라어로 (디오듀오)로 단순히 거쳐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고 중심부를 통과하는 것을 말하여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마을에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활동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직접 찾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능성이 있는 마을부터 우선 공략하고 보자 하는 것도 아니고, 빠짐없이 온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찾아가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복음 전도활동의 치밀함과 계획성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복음전도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니다가 마을을 발견하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온 마을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지며 찾아가십니다(마르 6,6). 즉, 복음 전도활동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실천도 예사롭지 않게 나타납니다. 이미 우리 주님의 심중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다 들어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의미를 추구한다면 복음전도에는 예외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사는 마을이라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그렇다고 달동네라고 우습게 여기지도 않으시고 똑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가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문턱은 누구에게나 낮습니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가지는 중요성은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편견을 두고 계셨더라면 우선 찾아야 할 마을과 그렇지 않을 마을로 구분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마을을 염두에 두고 찾아야 할 필요성이 존재합니다.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 단지라 하여 황금어장이고 단층 가옥으로 구성된 달동네는 그물질이 영 시원치 않을 어장으로 여긴다면 자칫 복음의 편견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사람 사는 마을이면 복음의 황금 어장입니다.

2. 복음 전도의 내용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여기서 말하는 '그 복음'이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되고 거기에 믿음으로 화답한 자가 누리는 특권인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하느님 나라의 실제적인 확장을 의미합니다. 즉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 아래 침탈당한 세상 왕국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느님의 왕국에 의해 쫓겨 물러갑니다. 마을마다 복음이 전파됨과 동시에 거룩한 하느님의 나라의 깃발이 세워집니다. '각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그 세력을 크게 더하여 영적으로 크게 정복해 나아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거침없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복음 전도활동의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입니다. 한 나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일은 온 나라가 힘을 모아야 하는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활동은 특정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지 않고 온 교회가 힘과 뜻을 집중하여 성취하여야 거룩한 과업입니다. 또한 복음이 크게 확장되어 소위 부흥을 이루었다면 그 결과로 하느님의 나라가 더욱 크게 드러나야 하지 어떤 개인의 인기가 높아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한 복음 할동이고 누구를 위한 복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까? 방향과 목적이 분명합니까? 혹 편견과 야망으로 인해 왜곡되지는 않았습니까? 이 천년 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진지하게 점검하도록 합시다.

II. 예수님의 동업자들

이 땅에 구원 활동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곁에서 힘껏 도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은 동업자(협력자, 동역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1코린 3,9). 특히 오늘 묵상할 복음을 통해 우리는 혹 가질지 모르는 우리 주님과 제자들이 일정한 수입도 어떻게 먹고 지내셨을까?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1. 열 두 제자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제자는 훈련의 과정 중에 있는 자들로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교실에 앉아 듣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실제 현장을 누비며 배웁니다. 아울러 주님의 복음 활동을 곁에서 돕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떨어지는 복음을 가슴에 담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힘써 증거합니다.

2. 봉사하는 여인들

열 두 제자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우리 주님을 섬기며 도와드린 자라면, 오늘복음 2-3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물질로 봉사하며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3년 동안 공생활을 보내실 때 어떻게 먹고 지내셨을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여 주는 부분입니다.

사실 뚜렷한 수입이 없으신 우리 주님이시고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우리 주님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돌로 빵을 만들어 드시면서 끼니를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끼니는 다른 사람들의 공급하는 음식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럼 누가 우리 주님과 제자들의 필요를 공급하였는가? 바로 오늘 소개되는 여인들입니다. 주로 여인들이 나서서 우리 주님과 열 두 제자들의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였습니다. 먹을 양식을 대로 입을 옷을 대고 또한 생활 필수품들을 공급합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가진 재산으로 아낌없이 내어 봉사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3절ㄴ).

이 여인들의 봉사는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발적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함께 좋은 것을 함께 하려는 순수한 마음입니다(갈라 6,6).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자 그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주님과 제자들을 공양하며 섬깁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을 보여 준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우리 주님의 권능으로 치유받은 막달레나 마리아도 있었고, 헤로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그의 재정을 담당하는 쿠자스라는 고급 관리의 부인인 요안나도 있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다양한 여인들이 우리 주님을 섬기는 데 앞장섰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여인들의 물질 봉사는 일시적인 행사로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오늘복음에서 '시중을 들다'라는 말은,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아마 우리 주님의 공생활 내내 이들 여인들의 봉사가 계속 되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특별히 이름이 거론 된 세 여인(막달레나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 무명의 수많은 여인들이 복음 활동을 효과적으로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귀한 협력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과 제자들이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실 수 있도록 제반 다른 사항은 자신들이 나서서 담당한 여인들의 자세는 참으로 아름답고 귀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함께 힘을 모아 공동으로 담당할 때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자신들의 소유 재산을 털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것을 포기하는 일처럼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여인들을 불러모아 놓고 물질 봉사하라고 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동안 주님을 통해 들어온 복음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적시자, 그 은혜에 몸을 떨며 자원하는 마음 그리고 즐거이 내는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섬기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사치레로 한 두 번 생색낸 것도 아닙니다. 끝까지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봉헌하였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려고 내 것을 내놓는 물질 봉사의 협력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III. 예수님과 여인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공적 활동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님의 활동에는 상당수의 여자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복음에 대한 반응도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이었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자들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매우 관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은 여자를 차별하거나 제한하지 않습니다. 이제 부터 오늘복음에 등장한 여인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막달레나 마리아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우선 이 여인은 흉악한 마귀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일곱 마귀에 의해 사로잡혀 살았으니 그 비참함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더러운 영 마귀에 의해 인격이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에 삶이 온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거의 포기하고 지냈을 것입니다. 일가 친척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이웃 사람들도 괴롭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 마귀에 의해 영혼이 피폐되고 삶은 정상을 벗어나 심하게 뒤틀려 갑니다. 심령에서 평안은 이미 사라졌고 어두운 그림자에 질식될 지경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기쁘지 않고 웃어도 즐겁지 않고 그저 메마른 공허에 슬퍼집니다. 하루 하루가 지겹고 우울합니다.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심정이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복음의 빛이 비추어집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이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의 권능을 통하여 온전함을 얻습니다. 오랜 세월 자신의 삶과 영혼을 짓눌러 왔던 더러운 일곱 마귀들이 빠져나가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비로소 참 자유와 평안이 그녀의 영혼을 감쌉니다. 한 순간에 삶이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놀라운 경험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꿈에라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바뀌어 새로워지고 제자리를 찾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였을까요?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새사람 새 삶으로 변화시켜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요, 또한 복음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이루 헤아리기 힘든 감격과 감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주님을 위해 그녀의 모든 인생을 봉헌하기로 결정하고 실천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물질을 아낌없이 우리 주님을 위해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이미 우리 주님에게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높이고자 하는 믿음의 심정이 고스란히 바친 물질에 담겨져 있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의 은총 안에 변화된 삶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만나 뵈옵는 자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요한 20,11-18). 복음의 결정적인 장소에 바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막달레나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뗄 수 없는 중요한 여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자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합니다. 주로 집안에 국한 된 여자들의 활동을 공개적인 장소로 확산시켜줍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름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 논 자는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여인의 이름 2명이 오늘복음에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2. 요안나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 여인은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요안나는 귀부인입니다. 그녀의 남편 쿠자스는 당시 헤로데왕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집사)였습니다. 혹자는 오늘날 재무부 장관에 해당되는 직급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고위 관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요안나는 평범한 아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요안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활동을 돕는 삶을 삽니다. 그녀가 우리 주님을 만난 계기는 자신의 병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2절 중반절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들" 가운데 그녀도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무슨 병에 그녀가 걸려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우리 주님께 나아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한 나라의 지체 높은 집안의 안주인으로 행세하던 그녀가 우리 주님께 나아왔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복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으로 기꺼이 나아와 스스로 자신의 무릎을 꿇리며 굴복하는 자는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진 부류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통해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는 우리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그녀의 인생은 사실 불행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지위와 명성이 그녀를 후광처럼 덮고 있어서 보는 이의 선망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깊어 가는 병색이 그녀를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돈 있고 명성 있으면 무엇합니까? 건강하지 못해 골골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크게 결단하고 찾아 온 그녀를 받아 주시고 그녀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녀가 우리 주님에게 나아 온 것은 그녀의 중심에 믿음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안나, 그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날은 그녀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돌아서는 매우 의미 깊고 소중한 날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감격과 구원의 은총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만끽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생을 맡깁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우리는 요안나의 남편이 어떻게 되었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녀의 남편이 자신의 아내가 우리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데 가로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지도층에 있는 자들은 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있다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요안나가 공개적으로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을 도왔다는 것을 보아 그녀의 남편 쿠자스 역시 복음에 대하여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추정됩니다. 요안나의 봉헌(헌신과 봉사)는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훗날 그녀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우리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점이 이를 강하게 뒷받침하여 줍니다(루카 24,10).

요안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그 후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며 콧대가 높던 여자를 내가 어떻게 하면 더욱 주님을 사랑할꼬 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요안나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여자입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 전도를 위하여 열렬히 봉헌했던 요안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복음의 권능을 다시 한번 체험합니다. 자신의 지위와 체면에 몸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충성 봉사한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신앙을 발견합니다.

3. 수산나와 그 외 많은 여자들

오늘복음에서 보면, '수산나'는 달랑 이름만 밝혀졌지 그녀에 대한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실명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추정됩니다. 그녀 역시 막달레나 마리아와 요안나처럼 우리 주님을 만나 병 치유를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2절). 아마 그 일로 인해 그녀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고 곧바로 우리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른 여러 여자들'..., 복수 형태로 꽤 많은 숫자를 나타냅니다. 구체적인 이름이 거론된 세 사람의 여자들(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말고도 적지 않은 수의 여인들이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섬김과 봉사의 길을 걸었던 여성도들의 자취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남성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복음 활동을 도왔다는 자체가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조용한 여인들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과 봉헌의 삶을 심어주었습니다.

III. 복음 활동에서 여인들의 역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생필품을 생산하여 살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직장을 가지거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기에 그 누군가가 우리 주님의 필요를 공급해야 했습니다.

이 일에 주로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나섰고 그들은 우리 주님과 제자들의 쓸 것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세우는 나라입니다. 독불장군 식으로 밀어붙이는 나라가 아니고 협력의 기쁨이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오늘복음에서 보면, 이미 선택 받은 12 제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였고 또한 그 자리엔 수많은 여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함께'(with), 동업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과 함께 하였던 여인들 가운데는 가정이 있고 돌보아야 가족들이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잇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정을 팽개치고 주님을 따라 다녔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그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우리 주님의 복음 활동을 도왔다고 보여집니다.

어떤 여인은 빠듯한 살림이지만 근검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먹을 양식을 사서 우리 주님과 제자들에게 공급했을 것이고, 어떤 여인은 손수 짜서 만든 옷을 드렸을 것이고, 어떤 여인은 자신의 집에서 기른 양과 소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생필품을 사서 공급하였을 것이고, 어떤 여인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저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는 데 전심 전력하실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음으로 양으로 도왔을 여인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열 두 제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고 또한 봉헌한 믿음의 여인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공생활 동안 이 땅에서 이루신 복음 활동을 떠올리면 주님과 동고동락하였던 열 두 제자들의 얼굴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다니는 데, 주님의 활동 중심에는 또 다른 중요한 사람들 바로 수많은 여성 봉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봉헌하였던 여인들의 봉사활동은 우리 주님의 구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 여인들을 통해서 복음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협력이 무엇인지를 잘 아루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봉사활동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복음 봉사활동은 우리 모두의 공동체적 협력입니다.

조욱현 신부
  | 06.12
460 57.2%
하느님을 믿으며 살고자 하는 많은 이들은 오늘날 여러 가지 도전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죄’ 때문에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마음속에 만든 감옥에 가둔 채, 아버지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주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은 이런 ‘죄’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윗 왕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나탄 예언자를 보내셔서 죄인인 다윗 왕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려 주셨고, 복음은 주님께서 죄많은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처럼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가 가져다주는 죄책감에 휩싸여 놀라운 하느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제2독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 전합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약함에 실망하기도 하고, 나아지지 않는 자신을 보며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하나의 사실은 그럼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온전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죄 많은 여인을 용서해 주시듯 언제나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죄인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은 다윗 왕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여인처럼 의지를 일으켜 나아가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렇게 그분 앞으로 나아갈 때,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시고 단 한시도 우리를 잊고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이우정 신부
  | 06.14
460 57.2%
[수원]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학교에 있다 보니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상담을 통해 그 학생이 누구인지, 꿈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또, 혹시 어려움이 있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에는 학생이 원하는 대로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담을 깊게 해서 학생에 대해 알게 되기 전에, 종종 저지르는 실수중 하나가 바로 성적을 가지고 학생을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학교에서 성적은 그 학생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선입견임에도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먼저 보는 것이 그 학생의 성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적이 좋으면 “어, 왜 이런 행동을 했지, 이상하네?” 라는 생각을 하지만, 성적이 좋지 않으면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성적이 그 학생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는 아니라고, 그것은 잘못된 편견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부끄럽게도 순간순간 이러한 생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편견은 고치려 해도 쉽게 고쳐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잘못된 시선으로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너무도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 많은 여인의 선물을 받으십니다. “그 여인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참조)라고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여인의 행동에 바리사이는 불쾌하게 여기며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라고 속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시며, 그 여인의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지위와 권력이 있던 바리사이는 예수님께 향유를 바른 여인과 대화를 해 본적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동네에서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평판을 받는 여인으로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는 잘 알지 못하는 그 여인을 죄인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입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권력이 마치 모든 판단의 근거인 것처럼 행동하는 바리사이의 태도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저 바리사이처럼 동네의 소문을 듣고 여인을 판단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판단근거는 죄 많은 여자로 불리는 그 여인이 보여주는 믿음과 회개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7,50).

▦ 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43   [청주] 너무 일찍 터트린 축포  138
142   [수도회] 사탄은 반드시 있습니다.  [7] 1827
141   [수원] 우리의 삶은 "대림"의 삶  [6] 2450
140   [대구] 준비 됐나요♪♪  [4] 2147
139   [인천] 성탄은 새로운 출발  [7] 2194
138   [의정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4] 2472
137   [부산] 종말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6] 2012
136   [서울] 대림초에 불을 붙이며  [6] 2686
135   [안동] ‘신앙의 해’와 늘 깨어 있는 신앙  [2] 1402
134   [마산]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있는 삶은 아니다.  [4] 2453
133   [원주] 희망과 기쁨의 시기  [1] 206
132   [춘천]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6] 2429
131   [전주] 아름다운 길  [2] 1945
130   [광주] 구름아  [1] 194
129   (자) 대림 제1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6] 2037
128   [수도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4] 1828
127   [전주] 우리들의 신앙고백  1900
126   [수원/기타] 사랑의 콩깍지  [1] 2085
125   [원주] 그리스도를 입는 사람  [1] 1859
124   [인천] 자유로운 결단  [3] 1825
123   [대전] 너는 누구냐?  751
122   [서울] 주님과 함께 사는 삶  [1] 2399
121   [대구]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인가?  2071
120   [마산] "십자가를 지고"  [3] 1699
119   [안동]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1880
118   [부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3] 2082
117   (녹) 연중 제12주일 독서와 복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1] 1526
116   [수도회]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3] 2235
115   [광주/전주/청주] 내가 살아가는 이유?  [4] 2476
114   [마산]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2] 1880
113   [의정부] 오직 사랑만이  [3] 2305
112   [군종] 용서의 삶  [4] 2283
111   [대구] 용서와 사랑  [3] 2182
110   [춘천/원주] 간절한 통회의 마음  [4] 2452
109   [인천] 작은 사랑  [7] 2392
108   [안동] 예수님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3] 2322
107   [부산] 이런 저런 생각  [4] 2123
106   [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8] 2533
105   [대전] 참회  [4] 2359
  [수원]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5] 2472
 이전 [1]..[11][12][13][14][15][16] 17 [18][19][20]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