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9 70%
[안동] 예수님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조회수 | 2,328
작성일 | 07.06.1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죄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이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 죄많은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시몬은 죄인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과 예수님, 죄인과 의로운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습니까?

시몬은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정통 유다인이었습니다.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해지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다고 생각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과 신분을 의심하였습니다. 특히 죄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예언자일 수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시몬의 집에는 예수님 외에도 불청객이 한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죄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고을에서 소문난 창녀였던 것 같습니다. 이 여자는 아마도 이미 다른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시몬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만일 내적으로 정리되지 않았고 용기가 없었다면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삶도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 여인은 사전에 향유를 준비하여 뒤쪽으로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이는 식탁을 중심으로 앉는 것이 아니라, 소파처럼 생긴 의자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발을 뒤로 구부리기 때문에 발치로 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눈물을 흘립니다. 여인의 눈물이 예수님의 발 위로 떨어집니다. 여인은 황급히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맨 위에 있는 머리카락으로 맨 밑에 있는, 깨끗치 못한 발을 훔치는 것입니다. 이어서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바릅니다. 그런데 당시의 풍습은 인사할 때 얼굴에 입맞추고, 머리에 향유를 바르는 것인데 그 여인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로지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참회와 겸손과 사랑의 행동을 표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죄인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 사이에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대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루카 7,48)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속마음을 아시고, 당신께서 예언자보다도 더 높은 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이 하나의 행동으로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의인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보다는 죄를 고백하며 다가오는 여인을 더 기꺼이 맞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가장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항상 가장 큰 고마움을 표시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건 의인이건,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건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건 빚을 탕감받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실수는 인간의 일’이란 속담이 있듯이, 결국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평안히 가시오.”(루카 7,50)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죄많은 여인은 회개하여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신앙인의 모범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믿음과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나아가 그의 겸손과 용기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회개하여 서로 용서함으로써’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야 합니다.

“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어떻게 주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8,2-4) 아멘.

안동교구 김도겸 아론 신부
459 70%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공직 선거가 끝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때도 되었는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거 후유증’은 당분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부정선거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전 공직자가 “100만 원 정도는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거지 뇌물이 아니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어떤 사람이 100만 원 정도 주면서 잘 봐달라고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저런 사람이 평생을 공직에 몸담고 있었으며, 또 저런 사람을 국민들은 뭘 보고 뽑아 줬는지” 화가 나는 겁니다. 저러니 국민을 우습게 알고 제멋대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일해도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주는 거라는 말에 화가 났습니다. 자기들이 한 부정한 짓거리는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최소한의 죄의식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매일 미사 때마다 강론을 합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 우리 삶의 양식이 되도록 쉽게 설명해 줍니다. 어떤 때는 비유말씀을 더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기도하고, 어떤 때는 복음 말씀의 상징적 의미들을 풀어서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 우리를 칭찬하시는 말씀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말씀부터가 “회개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삶을 꾸짖으시고 회개하여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말씀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교우들을 칭찬하는 강론보다는 “이러면 안 됩니다. 이러지 맙시다. 이렇게 살아갑시다. 이런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등등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지금 여기서부터 회개의 삶을 살아가자!”는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아니면 “사도들의 삶을 본받자! 주님의 삶을 따라 살자!”는 이야기가 강론의 주제가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얻는지를 주님께서 ‘너 잘한다.’고 칭찬하시며 말씀하신 게 아니라 ‘회개하라.’고 꾸짖으시며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의 강론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조금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섞어가며 쉽게 또 다른 비유들과 함께 이야기합니다. 이 정도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게 알아듣겠지! 이정도 하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강론을 하는데 실제로 알아듣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강론을 하면서 신자들을 바라보면 전부 다 재미있어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들 잘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를 꾸짖고 있는 겁나는 이야기인데도 나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웃고 박수치고 즐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내 이야기라고 느낀다면 오히려 회개하는 척이라도 해야 옳을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저 신부는 강론 때마다 혼만 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알아듣기는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셔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을 죽일 방법만 모색하던 유다인들과 같이 스스로 의인인 척 하는 위선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탄 예언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던 다윗 임금처럼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하여야겠습니다. 겸손 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만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구원을 위한 복음으로 들려올 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김원현 베드로 신부
  | 06.11
459 70%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복음에서 ‘살리시는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리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이번 주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는 사무엘 하권 12장 7절부터 10절까지 그리고 12절의 말씀을 듣습니다. 1독서에 나오는 나탄은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받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개자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그분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예언이라고 합니다. 예언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관해서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의 예언들 중에는 머지않아 실현될 일도 있었고 메시아 탄생이나 앞으로 전개될 세상의 역사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질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구약의 많은 예언들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특히 시편)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단지 미래의 일을 예견하여 말하는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큰 임무 중 하나는 당대의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향해 하느님께 충실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죄악에 맞서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회개를 촉구하고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였습니다. 나아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보장된 희망을 전하고 당신 백성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지니고 계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1독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무엘 하권 11장의 내용을 먼저 읽어야만 합니다. 앞부분의 내용은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다윗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우리야’를 전사하게 만들 계략을 세우고,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야’를 전투의 제일 앞에 나서도록 만들어 그를 죽입니다. 이런 다윗의 행위가 주님의 눈에 거슬렸습니다.(12장 27절) 그래서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어 다윗왕의 죄악을 꾸짖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13절)하고 단박에 고백합니다. 다윗 왕의 훌륭한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 마음속 모든 것을 내어놓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다윗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히브리 4,12)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느님이 ‘자비’하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선물’입니다. ‘나탄’이란 히브리 단어를 번역하면 ‘선물’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역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인간을 꾸짖고 옳은 길을 걷도록 일깨우는 것 또한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가 예수님의 뒷켠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가 보고서는 속으로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아챌 터인데, 사실 죄인인데”(루가 7,39)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믿는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죄는 구분할 줄 압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으로 두 눈을 가릴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용서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기 자신 또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사시기에 그분이 나를 아시니, 나 또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안동교구 최장원 라우렌시오 신부
  | 06.14
459 70%
[안동]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복음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죄 많은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 여자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예수님의 발을 적실만큼 웁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예수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여자는 복음 내내 한마디의 말도 없이 오로지 행동만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 표현은 자신이 죄가 많음을 고백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사이는 여자의 부정한 실체를 알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의로운 사람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자가 식탁에서 보여준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의 말 없는 고백과 감사, 사랑의 표현을 이해하시고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 그리고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평안히 보내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자신의 잘못과 죄를 알아내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이기에 잘못을 하고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뻔히 자신의 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말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저지르는 작은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모른 척 넘어가기도 합니다. 또 성당에서는 고해소에 고백하러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렵게 여겨집니다. 그만큼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윗은 주님께 죄를 지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고 우리야를 전투 중에 죽게 하고서는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러자 예언자 나탄이 다윗의 죄를 꾸짖습니다. 나탄 예언자의 지적에 대해 다윗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솔직히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그 큰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노라고 하느님 앞에 말할 수 있는 겸손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회개의 은총으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용서를 받지 못하는 잘못을 했지만 자비의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사랑으로 응답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죄에 기울고 죄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면서, 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죄를 짓지 않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생각합시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처럼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라는 말씀을 듣고 기쁘고 평화롭게 예수님을 따른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기로 합시다.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며 겸손하게 주님께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은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 안동교구 차호철 세례자요한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43   [청주] 너무 일찍 터트린 축포  148
142   [수도회] 사탄은 반드시 있습니다.  [7] 1830
141   [수원] 우리의 삶은 "대림"의 삶  [6] 2456
140   [대구] 준비 됐나요♪♪  [4] 2150
139   [인천] 성탄은 새로운 출발  [7] 2204
138   [의정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4] 2476
137   [부산] 종말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6] 2021
136   [서울] 대림초에 불을 붙이며  [6] 2691
135   [안동] ‘신앙의 해’와 늘 깨어 있는 신앙  [2] 1407
134   [마산]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있는 삶은 아니다.  [4] 2458
133   [원주] 희망과 기쁨의 시기  [1] 210
132   [춘천]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6] 2432
131   [전주] 아름다운 길  [2] 1948
130   [광주] 구름아  [1] 201
129   (자) 대림 제1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6] 2041
128   [수도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4] 1833
127   [전주] 우리들의 신앙고백  1905
126   [수원/기타] 사랑의 콩깍지  [1] 2091
125   [원주] 그리스도를 입는 사람  [1] 1865
124   [인천] 자유로운 결단  [3] 1831
123   [대전] 너는 누구냐?  754
122   [서울] 주님과 함께 사는 삶  [1] 2403
121   [대구]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인가?  2077
120   [마산] "십자가를 지고"  [3] 1704
119   [안동]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1884
118   [부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3] 2086
117   (녹) 연중 제12주일 독서와 복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1] 1532
116   [수도회]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3] 2242
115   [광주/전주/청주] 내가 살아가는 이유?  [4] 2482
114   [마산]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2] 1884
113   [의정부] 오직 사랑만이  [3] 2312
112   [군종] 용서의 삶  [4] 2290
111   [대구] 용서와 사랑  [3] 2187
110   [춘천/원주] 간절한 통회의 마음  [4] 2459
109   [인천] 작은 사랑  [7] 2400
  [안동] 예수님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3] 2328
107   [부산] 이런 저런 생각  [4] 2127
106   [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8] 2541
105   [대전] 참회  [4] 2365
104   [수원]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5] 2476
 이전 [1]..[11][12][13][14][15][16] 17 [18][19][20]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