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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오직 사랑만이
조회수 | 2,312
작성일 | 07.06.15
부끄러운 초등학교 시절의 일을 고백합니다. 어린 나이에 먹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늘 용돈이 부족했습니다. 궁리 끝에 아버지의 지갑을 털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잠이 드신 틈을 타서 바지 뒷주머니를 보니 지갑이 있었습니다. 지갑을 열어 보니 지폐가 여러 장 들어 있었습니다. 한두 장을 꺼내도 표가 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훔친 돈으로 가게에 가서 마음껏 과자를 사먹었습니다. 친구들에게도 선심을 썼습니다. 그래도 돈이 남아서 학교에 가지고 가서 저축을 했습니다. 내용도 모르시는 담임선생님은 기특하다며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친구들에게는 인심을 얻고 선생님에게는 칭찬도 받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습니다.

저의 도둑질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모르시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에게 할 말이 있으니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이젠 들통이 났구나”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 돈을 어떻게 했느냐”로 물으셨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통장을 가져오라고 하시며 확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이 야단의 전부였습니다. 며칠 뒤에 동네 어른들이 저희 집에 오셨는데, 아버지는 저를 부르시더니 저금통장을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통장을 어른들에게 보여 주시며, “우리 막내가 용돈을 아껴서 이만큼이나 저금을 했다오”하시며 자랑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두 번씩이나 확인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시딤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는 아들의 못된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랍비에게 데려가 아들의 버릇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랍비는 아들을 건네받아 하루 동안 따뜻한 품에 안고 지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랍비를 찾아갔을 때 아들은 마술에 걸린 듯 얌전해졌습니다. 도덕적인 설교가 아니라 사랑이 그 아이를 치유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여인을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그릇된 과거 삶을 청산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 여인을 치유한 것입니다. 저 또한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못난이를 하느님은 용서해 주셨고, 더욱이 사제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런 저를 받아 들여 봉사의 직분을 맡겨 주었습니다. 이처럼 많이 용서받고 사랑받았으니 이제 저에게 남은 일은 더 많이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의정부교구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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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음을 사는 사람

시골의 작은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낡은 목조 성당을 신축하고자 온 신자가 한마음이 되어 건축기금을 모아왔는데, 당시 재무를 맡아보던 A가 그 돈을 불려 볼 생각으로, 좋다는 곳에 투자했다가 십여 년을 모아온 돈을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은 분노했고 그를 성당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당은 우여곡절 끝에 신축되었고, 교회를 떠났던 이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주일에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신자들은 옛일을 들추며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어르신 한 분이 나서서 신자들을 제지하고, 그에게 미사 시간 동안 석고대죄, 그러니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라고 했습니다. 가당치 않다는 신자들을 성당으로 들어가게 한 어르신은 미사 시간 동안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사 시간 동안 A는 성당 문께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었습니다. 심란한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던 신자들은 봉헌 하고 자리로 들어오며, 영성체를 하고 들어오며 그를 보았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꿇어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그동안 마음 편히 살아왔을까?’ ‘나는 본당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는가?’ ‘나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어떻게 해왔는가?’

미사가 끝나고 나서 어르신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망설이던 사람도, 그를 마뜩잖은 눈으로 바라보던 이도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A는 숨을 거칠게 쉬다가 한 사람 한 사람, 옛 친구, 옛 교우들의 손길이 지날 때마다 눈물을 흘리더니 마침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성당은 화해와 용서의 눈물로 가득해졌 고, 그를 향한 미움도 화도 다 잊게 되었습니다.

용서와 화해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진정 복음을 사는 자입니다.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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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웃음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오늘의 복음 장면, 즉 죄인으로 눈총 받던 여인이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 발의 향유를 닦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웃으셨을 것’이라는 이유 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간지러워 웃으셨을까요? 당연히 그렇기도 하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며 보여준 여인의 용기 있는 행동이 너무 기뻐서 “웃으셨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미소, 그리고 나아가 더 자주 파안대소하시는 예수님의 웃음을 상상하고 기대해봅니다. 잃었던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가 그 양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과 웃음이 예수님의 얼굴을 가득 채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 3월29일 성금요일부터 4월 27일까지 30일 동안, 저는 800km 정도 되는 스페인의 성 야고보사도 순례길(까미노 데 산티아고)을 하느님의 은총 속에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노란색 화살표와 조개껍질 모양의 길 안내 표시에 따라 가면 목적지인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몇 번 길을 잃었습니다. 깜박, 노란 화살표를 놓치게 되면 길을 잘못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한참을 걸었는데, 그래서 노란 화살표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도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집니다. 숲길이나 산길, 그리고 들판에서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 1km 혹은 2km 걸었는데 표지판을 발견하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었음이 확인되면, 왔던 길을 되짚어 노란 화살표가 있는 곳까지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피곤에 지친 무거운 발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 뿐 아니라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꼭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불안과 초조,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목적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란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지금 내가 잘못된 길에 있음을 명료하게 알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그 식별이 애매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스페인의 까미노(길)처럼 명확한 노란화살표가 항상 지시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된 길, 틀린 길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되돌아가거나, 올바른 길을 찾기 시작하지 않을까요?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길을 살피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이 꼭 필요합니다. 인간이란 본디 본능과 본성의 어두운 힘에 쉽게 굴복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올바른 길 찾음’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내가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임을 알아차릴 때, 그래서 주님의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절절히 느낄 때 우리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 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게으름’과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과도한 절망과 좌절로 넘어진 채 일어나지 않는 포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자신의 허물과 죄, 비참함을 들여다보았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하여 길을 걸어가 많은 죄의 용서를 받았고 큰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웃게 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환한 미소가 세상에 가득 차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의정부교구 김오석 라이문도 신부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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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저는 죄인입니다”

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드렸다는 오늘 말씀은 4개의 복음서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유독 오늘 말씀인 루카 복음이 전하는 도유사화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행동으로 죄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3개의 복음서에는 이 일이 파스카 바로 전에 일어난 일로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준비하는 여인의 이야기’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루카 복음사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에 우리의 시선이 모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향유를 바른 여인이 ‘죄인’이었는데 회개하여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빚을 탕감해 준 비유를 통해 그 용서의 이유를 전합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겉으로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죄인의 회개와 예수님의 사랑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오직 복음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 하신 첫 말씀, 그리고 여러 번 자신을 ‘죄인’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겸손함을 드러내기 위한 말투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오늘 죄 많은 여인이 눈물을 흘린 마음이었습니다.

발을 씻겨드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 드린 것은 그 여인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 지은 죄가 무엇이지 사실 궁금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 여인이 지은 죄와 내가 지은 죄를 비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인처럼 내가 나의 죄로 인하여 주님께 간절한 마음을 가졌는지 반성해 봅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이는 병든 사람이듯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마태 9:12~13). 죄인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비참함을 느끼겠지만, 오직 주님만이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우리의 비참함과 우리 죄에 대한 의식이 생생하면 할수록,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무한한 자비를 더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상처 입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환대와 자비의 눈길로 설 수 있게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대화,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중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의인’으로 살아야 하겠지만, 주님 앞에서는 항상 ‘죄인’임을 고백하는 이들임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처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편안히 가거라” 아멘.

▦ 의정부교구 이김동수 야고보노엘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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