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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작은 사랑
조회수 | 2,385
작성일 | 07.06.15
길고 긴 순례의 길 님을 찾아 떠났네/ 기나 짧은 인생 길 사랑 찾아 떠났네/ 곳곳마다 그분은 나를 찾아 주셨네/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 채워 주셨네/ 고요한 웃음으로 작은 사랑 일러주신 분 다하지 못한 사랑을 넘어 울지 않을 사랑 주셨네/ 끝없는 하지만 작은 사랑을 보여 주셨네/

요즘 산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산에 올라가서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사람도 만나고, 그 사람들과 자연 속에서 나에게 있는 아집을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작은 사랑’이라고 하는 청소년 성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결에 시작했던 노래인데, 이제는 묵상으로 나를 초대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여정 속에서 신앙인인 내가 찾아가야 하는 곳에 대한 묵상입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 참 많은 경험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요즘입니다. 사제이기에 용서되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예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인으로 커 갔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 22-23) 이 요한복음의 내용을 보면 성령을 받은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를 성령을 받은 이들은 이상한 언어를 말해야 하고 누군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보여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로 그러한 기적들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용서법’을 우리들이 배워보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고 있는 여인에 대하여 못마땅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 7) 이러한 예수님의 용서법은 십자가상 죽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

이러한 예수님의 용서법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인생이라고 하는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 이 순례의 길이 값진 의미 있는 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작은 사랑’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천교구 고잔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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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미사 6대에 견진교리 4시간. 정말로 장난 아닙니다. 사실 어제도 쉬운 날은 아니었지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5대의 미사를 해야 하는 관계로 무척이나 힘든 하루를 보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 바쁜 오늘을 대비해서 어제 저녁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시간 정도 잠들었을까요? 저는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무척 가려웠거든요. 더군다나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윙~~’이라는 소리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모기가 제 침실에 들어와서 저를 물었던 것이지요. 불을 켜고 모기를 잡을 것인지 말지를 궁리했습니다. 문득 불을 켜고 모기를 잡자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달콤한 잠에 빠져서 눈도 잘 떠지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기가 정말로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 다시 잠에서 깼습니다. 더워서 잘 수가 없더군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모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2마리 잡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눈앞으로 한 마리가 휙 지나갑니다. 얼른 잡으려고 했지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못 잡으면 또 물릴 텐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딱 한 마리 남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없으니……. 한 마리 정도야 괜찮겠지. 또 모기도 먹고 살아야지.’

이러한 생각을 하고서 다시 침대에 누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불을 끔과 동시에 들리는 ‘윙~~’ 소리를 이겨내기란 제 신경이 너무나 예민하더군요.

모기를 완전히 다 잡은 뒤에야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 정도야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모기가 없어야 편안하게 푹 잘 수가 있네요. 그런데 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과 죄의 관계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쯤이야’ 하면서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남들도 하는데 뭐…….’라면서 쉽게 범하는 죄. 바로 그러한 안일한 마음이 주님과 나의 관계를 더욱 더 멀게 만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더욱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아니 일치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그러한 더러운 죄의 덩어리들이 완전히 사라져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진정한 뉘우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표시합니다.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을 발을 닦은 뒤,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모두 붓습니다.

바로 이러한 진정한 뉘우침이 비록 전에는 죄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은 그렇지 못했지요. 그는 오히려 이러한 죄인과 함께 하는 예수님을 똑같은 죄인으로 취급하는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주님 앞에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었을까요? 혹시 바리사이처럼 다른 사람의 죄만 잘 보고, 내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뉘우침만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성체 앞에 앉아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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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치있는 사람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 앞에 만원짜리 지폐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갖고 싶습니까? 근데 그 돈이 마구 구겨져 있고, 찢어져 있어도 줍겠습니까? 당연히 줍겠죠?
이처럼 구겨져 있고 발로 짓밟을지라도 그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쵸?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패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 아픔을 겪게되면 인간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이 열등감이란 하느님이 주신 자기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 하는데서 오는 감정입니다. 열등감은 분노와 좌절을 낳고 그것은 다시 집착을 낳고 그 결과는 파멸을 가져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여자에게도 열등감이, 다시 말해 한이 있습니다. 사실은 한은 물질적 무시, 지적 무시, 신분적 무시를 당할 때 생깁니다.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해서, 빽이 없어서 서러움을 당합니다. 이처럼 한은 천대와 멸시에서 생깁니다. 그녀의 파란만장했을 삶을 떠올려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그녀! 그녀를 창녀로 만든 것은 탐욕의 남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녀를 천대했고 멸시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더욱 한이 맺혀 생의 의욕을 잃고 쉽게 옷을 벗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살 가치도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허나 놀라운 사실은 실패한 듯 보이는 인생이라도 당신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돈처럼 말입니다.

그 여인도 예수님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점잖은 식사 자리에
① 갑자기 죄 많은 여인이 나타나 흐느껴 울며 ②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더니 ③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④ 그 발에 입을 맞추며 ⑤향유까지 발라 드립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가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저 사람보다 못나 보인다’고, ‘더 못 산다’고. 비교함으로써 수렁 속으로 빠집니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특별한대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그 자체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항시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 화장실 거울엔 “나는 행복하다”란 글귀가 붙어있습니다. 이것을 아침에 3번씩 외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길….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치국 히지노 신부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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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사랑과 신뢰의 표현"

수품 10년이 된 어느 사제가 이런 고백을 했던 글이 생각나 몇 자 줄여 적어 봅니다.
 
"사제로 생활하는 동안 주님은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고해실에서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존경하던 선배 신부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목의 대상이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초대받는 자리에 가면 으레 가장 좋은 자리에 먼저 앉습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내가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론도 쓸데없는 말로 자꾸 길어집니다. 회합 때,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안 해도 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용서 받을 것들이 점차 쌓여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지닌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복음에서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깨닫게 됩니다.
 
바리사이인 시몬이 주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환대의 표시로 발을 씻을 물도 내놓지 않았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드리지도 않았고, 입을 맞추지도 않았습니다. 시몬의 초대에는 사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시몬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을 모셨는지에 관심이 더 있어 보입니다. 손님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고 싶어 합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무엇을 이루시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세 번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집은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실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주 냉대를 받으십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나러 교회 공동체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나오곤 합니다.
 
 이런 마음과 달리, 한 여인이 주님을 환대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루카 7,38).
 
이 여인의 행동은 아주 귀한 손님에 대한 대접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지은 죄의 고통에 갇혀있지만, 용서받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주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보여드립니다. 침묵이 바로 이것을 입증해 줍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말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주님과 이 여인을 함께 비난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말하였다"(루카 7,39).
 
 바리사이의 문제는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용서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이 완벽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자신을 의탁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시몬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적대감으로 과거에 그녀가 지은 죄의 상황 속에 그 여인을 가두어 버립니다. 이 편견과 적대감은 사랑하는 나의 이웃의 십자가를 함께 져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인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판단해 자신은 참회와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을 그 여인과는 다른 부류의 범주, 곧 의인의 범주에 넣고 그 여인과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실제 그는 그 여인과 분리됐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도 자신을 분리시킨 것입니다.
 
주님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는 한 여인의 존엄성을 살려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 직분이나 위치를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우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마음과 사랑을 향한 의지를 보십니다. 그 죄 많은 여인은 과거의 부끄러운 죄로 인해 줄곧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이제 사랑을 향한 의지와 행위를 통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게 된 것입니다.
 
저지른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용서를 청하고 사랑을 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용서란 결국 사랑과 신뢰의 표현이며 거기에서 내면의 평화와 삶의 희망이 함께 오는 것입니다.

홍승모 신부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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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무슨 일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큰 실수를 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어머니에게 크게 혼날 일이었지요. 저는 겁이 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지요. 솔직하게 고백하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고, 모른 척 하기에는 저의 잘못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너무 졸려요.”라고 말한 뒤에 곧바로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잠자고 있는 저를 깨워서 혼내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날까봐 코까지 골아가면서 자는 척 했습니다. 차마 밥 먹으러 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정말로 아픈 것 같았고 잠도 마구 쏟아져 오는 것입니다. 얼마 뒤, 어머니께서 올라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괜찮아. 일어나서 밥 먹자.”

그 순간 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졸음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이렇게 힘을 솟게 하는 것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하느님의 또 다른 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성을 받은 순간 힘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을 닦아 줍니다. 그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이 행동이 당시의 관습에서 볼 때 오시는 손님을 향한 최고의 예우라고 하지요. 사실 남녀가 유별했던 그 당시에 이러한 행동을 하는 여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진심으로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 여인은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며 최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내가 용서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에 대한 용서는 너무나도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빈정대는 바리사이처럼 자기 스스로의 기준에 어긋나면 죄인이고 그래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용서는 하느님의 또 다른 속성입니다. 따라서 나 역시 용서한다면 하느님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되어, 하느님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용서할까요? 너무나도 미운 사람, 오랫동안 미워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그 순간부터 내가 죄의 노예가 되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미워하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하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까요?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내가 용서 받는 모습으로 그를 용서하면 됩니다. 내 마음을 들춰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거짓과 위선, 분노와 질투, 고집과 이기심, 미움과 욕심 등등……. 차마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용서하고 또 용서하십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모습은 어쩌면 나의 숨겨져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받는 나를 기억하면서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죄 역시 용서받을 수 있으며, 주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며,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사람은 복음에 등장하는 그 여인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그 따뜻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이 말씀을 듣는 내가 될 수 있도록 ‘용서할 수 없다’라는 생각은 과감하게 버리고, ‘용서해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조명연 신부
  |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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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몇 등입니까?

1등은 내가 하고 싶은 일,
2등은 내가 해야 하는 일,
3등은 내가 하느님 만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치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다 마무리하고,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하느님을 만나줍니다. 혹시 나에게 하느님은 3등은 아닙니까?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느님은 3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힘들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되면 하느님을 부릅니다. 하느님은 3등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 나는 1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울 때는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느님께 언제나 1등입니다.내게 1등이신 하느님을 나도 1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 앞에서 체면과 물질을 포기하고, 그저 감사를 드릴뿐입니다. 여인을 1등으로 사랑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큰 사랑을 표현합니다.

요사이 주일 미사를 참례하는 신자들이 준다고 걱정이 많습니다. 80년대 후반에 미사 참례율이 30%정도였는데, 2012년의 미사 참례율이 23%라고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 감사하지 못하는 불감증이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1등으로 모시지 않고,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의 마음이 없는 불감증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첫째 자리에 두는 미사 불감증으로 이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하느님의 큰 사랑임을 깨닫는다면 큰 사랑으로 응답하겠지만, 하느님의 큰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불감증 환자일 것입니다.

이번 주간을 보내며, 우리 각자는 하느님을 1등으로 모신 신앙인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함을 모르는 불감증 환자인지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치료가 필요하다면 고해성사로 불감증을 치유해야 하겠습니다.

인천교구 박희중 안드레아 신부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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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강의를 많이 다닙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는 강의하기가 편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강의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인 컨디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청중의 반응인 것 같습니다. 사실 머릿수만 채우기 위해 억지로 끌려온 경우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반응이 없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또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얘기해라. 나는 관심 없다.’는 식의 모습을 보이지요. 이런 청중의 대표적인 경우가 군인과 회사원입니다. 이럴 때에는 저도 시간 때우기 식의 강의를 하게 됩니다.

반대로 아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분들이 계십니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크게 반응을 보여주시면 저 역시도 큰 힘이 나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청중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더라도 신나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을 넘겨서라도 더 좋은 말들을 전해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청중의 반응에 따라 강의하는데 힘이 나기도 하고 또 반대로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청중의 입장에서는 강사가 어떻게 말할 때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될까요? 힘이 넘치는 상태에서 말할 때일까요? 아니면 힘이 빠진 상태에서 말할 때일까요?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자리이든, 또 자신이 선택해서 있는 자리이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곁에 매 순간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또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곁을 지켜주시지요.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이웃들에게 실천한다면 어떠실까요? 하지만 반대로 주님의 사랑을 그렇게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어떠실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한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또한 발에 입을 맞춘 뒤에 비싼 향유를 부어 발라 줍니다. 당시 손님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갖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최고의 예우를 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인인 자신을 용서해주신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잘 되면 내 탓, 잘 안 되면 주님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더 좋아하실까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용서뿐만 아니라 더 큰 선물을 주시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예수님 사랑에 대해 감사의 모습으로 응답하자,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얻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사랑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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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용서…그리고 사랑

지난 월요일(5/30), 새벽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주교님께서 위독하시다는 문자 한 통을 받았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교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어떤 신자분께서 주교님께서 선종하셨다는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어떻게 다들 그렇게 소식이 빠른지…….놀라서 교구 공문을 확인하고 기다리면서 주교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주교님께서 웃으시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주교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교님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부제 때, 사랑하는 후배가 신학교를 그만 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배를 데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에 후배가 술 한 잔 하자고 해서 마지막으로 설득 해볼까 해서 외출을 했었습니다. 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학교 복귀시간을 조금 넘기고 말았습니다. 들어오는 길에 시간도 늦어서, 신부님들께서 식사 후 산책하시는데 모른 척 지나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 학생처장 신부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드렸지만 신학교 규율을 어긴 것이었기에 주교님께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얼마 후 주교님께서 신학교를 방문하셨습니다. 보고를 받으신 주교님께서는 허허허~~웃으시면서 부제가 실수할 수도 있지…….하시면서 용서해주셨습니다. 만약 주교님께서 사랑으로 감싸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저는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원망하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년 전에 교구청 관리국 부국장으로 생활을 했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항상 허허허 웃으시면서 부국장~~부국장~~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주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때도 어김없이 허허허 웃으시면서 “김 신부, 내가 그랬어?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시면서 김 신부도 남의 실수를 오래 기억하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허허허 웃으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은 빨리 잊고 사랑으로 감싸주려고 노력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제로 열심히 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주교님의 사랑입니다. 실수를 사랑으로 감싸주셨기에 저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물론 더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지만 크던 작던 탕감해 주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잘못이 크던 작던 간에 다 용서해 주셨듯이 나에게 빚진 사람들, 잘못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제 그만 용서해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진정 어떠하십니까? 누가 나에게 실수하거나 상처를 입히면 용서하기 보다는 두 배로, 세 배로 갚아줄까 고민하십니까? 아직까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허허허 웃으면서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허허허 웃으시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실수한 것, 상처준 것 모두 용서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교님…….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김형찬 가브리엘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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