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6 11.6%
[광주/전주/청주] 내가 살아가는 이유?
조회수 | 2,470
작성일 | 07.06.15
우리는 왜 하루하루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일까? 뉴스를 보면 날마다 사건사고가 엄청나는데 이 험악한 세상에서 왜 살려고 노력하는가? 살면살수록 자꾸 죄만 지어서 우리의 영혼은 더러워지는데 왜 왜 왜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보여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백소에서 저는 이런 훈화를 하곤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깨끗해졌으니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죄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립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이 모습을 못마땅해 하자 예수님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사랑이 크다는 얘기를 들려주십니다.

바리사이는 죄많은 여인이 잘못을 뉘우친 것에 관심이 없고 죄인이라는 것만을 보지만 예수님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집중합니다. 그러고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누구는 어떤 흠이 있다고, 죄가 있다고, 잘못만을 생각합니다. 그가 뉘우치고 열심히 살아가도 의심의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만큼 용서,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쉽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용서와 큰사랑이 내가 맨날 잘못을 하여도 나에게 주어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 만회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도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늘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들은 삶의 의미를 주님에게서 찾고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잘 모실 수 있도록 내 안에 아름다운 성전을 짓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광주대교구 이현민 가롤로 신부
456 11.6%
[전주] 용서, 영광과 사랑의 지름길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쉽게 잊지 못하는 법이다. 초등학교시절 옆자리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화해하지 못하고 책상을 칼로 반으로 표시를 해놓고 조금이라도 넘어오는 것이 있으면 사정없이 찢어버리는 아이들을 본적이 있다. 조금만 양보하고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면 될 일인데 그렇지 못하고 오랫동안 원수처럼 지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도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왜 그렇게 용서에 인색한 것일까?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부하의 아내를 탐내어 부하를 전쟁터로 보내어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은 다윗 왕의 잘못을 고발하는 나탄 예언자의 말에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서 가문의 벌과 자신이 받을 벌을 면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여 죽을 벌도 면하게 된 것이다. 주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따르며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이다.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로마 군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용서를 통해 얻게 될 당신의 영광을 미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어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르는 죄 많은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 시몬에게 빚진 돈을 탕감 받는 액수가 크면 클수록 고마운 마음이 커지는 것처럼 용서하는 마음도 키우라고 가르치신다. 용서하면 용서하는 그 이상 용서를 받는데 왜 사람들은 용서에 인색한 것일까? 형제자매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청할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제는 미움과 복수의 고리에서 벗어나 사랑과 용서의 삶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구원의 길로 나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전주교구 나춘성 신부
  | 06.14
456 11.6%
[청주] 하느님, 그리고 교회와 이루는 화해

루카 복음 7장 36절-8장 3절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느님, 그리고 교회와 이루는 화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용서의 결과도 보여주십니다. 그 표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 백성의 품으로 돌아오는 복귀를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당신의 고유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죄인들을 교회와 화해시키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사도들의 이 임무는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특히 잘 드러납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여기서 ‘매고 푼다’는 말은 교회가 친교 안에 다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당신과 이루는 친교 안에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이 임무는 오늘날의 사제단에게 부여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기도와 직무수행을 통하여 죄인과 화해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제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치유되고, 교회와 더불어 친교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청주교구 박영봉 신부
  | 06.14
456 11.6%
[전주] 눈물의 세족례, 구원의 세족례

모든 본당에서 하는 전례지만 성 목요일 저녁 미사 중에 실행하는 세족례는 참으로 의미 있고 숭고하게조차 느껴지는 전례 행위다. 대상자들 앞에 꿇어앉아 물을 붓고 수건으로 닦은 후 입맞춤을 하느라 그 발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내 그분에 대한 연민과 존경심이 솟아난다. 그 발로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살아온 모습과,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느라 실천했을 수고와 선행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발을 닦아주는 일은 서로를 묶어주는 거룩한 행위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감동적인 세족례의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흔히 세족례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사랑과 봉사의 행위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세족례를 베푸는 주인공은‘죄인인 여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죄인인 여자’가 예수님께 세족례를 베푸는 당사자인 것이다.

이 여자는 드러내 놓고 죄인이라고 소개될 정도로 정숙치 못한 여자였다. 그러나 이 여자의 마음 깊은 곳엔 진리와 사랑 그리고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이 여자는 드디어 오늘 그 목마름을 풀어줄 분을 찾아내고 그분을 만났다. 이제 그녀는 그분의 발치에 서서,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로 지난 삶에 대한 회한과 아울러 주님을 만난 감격과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을 드러낸다.

그녀의 눈물은 샘물처럼 흘러 급기야 그분의 발을 적셨고, 그녀는 수건이 아니라 손수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린다. 그리고 사랑과 감사의 극진한 마음을 담아 그 발에 입 맞추고 준비해 간 향유를 발라드린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대변해서 그녀가 베푼세족례의 의미를 밝히신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에게 판결하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더 나아가 이렇게 선언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눈물로 쓴 편지는 하늘을 움직였다. 그녀가 주님께 행한 눈물의 세족례는 이미 용서와 구원의 세족례가 되었던 것이다. 요한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마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전주교구 이성우 신부
  | 06.14
456 11.6%
[전주]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6ㄴ~37)

죄가 많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믿음과 확신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람의 행동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좋은 예수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에대한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1독서의 말씀은 다윗이 부하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은 죄를 저질렀지만 죄를 반성하자 용서받는 장면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죄지은 여인 역시 자기 죄에 대해 깊은 반성과 성찰이 있은 다음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합니다. 죄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게 되면 용서 받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사람을 무시할 때는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사랑할 때는 따뜻한 눈길을 보냅니다.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눈길이 그녀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물건인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발라드리고 통회하는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통회의 눈물이며 사랑의 눈물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어릴 때 살았던 곳을 가보면 그렇게 넓게 보였던 길이나 운동장이 좁게 보입니다. 어릴 때는 키도 작았고 보는 시야도 좁았지만, 어른이되면 키도 커지고 보는 시야도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와 하느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죄 속에서 살 때에는 죄가 크게 보이지만 영적으로 자라나서 하느님 사랑으로 바라보면 죄는 아주 작게 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큽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삶의 전부이지만 죄는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죄지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복음에서 보는 죄지은 여인은 그 당시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예수님을 만났지만, 우리는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실제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성경 안에 살아계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죄로 인해 우울함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주시고, 절망에 빠진 우리를 위로의 손으로 일으켜 세워주시고, 울고 있는 우리를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 주십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가죄를 용서받고 구원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8, 50ㄴ)

▦ 전주교구 권순호 야고보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43   [청주] 너무 일찍 터트린 축포  133
142   [수도회] 사탄은 반드시 있습니다.  [7] 1825
141   [수원] 우리의 삶은 "대림"의 삶  [6] 2442
140   [대구] 준비 됐나요♪♪  [4] 2144
139   [인천] 성탄은 새로운 출발  [7] 2190
138   [의정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4] 2470
137   [부산] 종말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6] 2007
136   [서울] 대림초에 불을 붙이며  [6] 2684
135   [안동] ‘신앙의 해’와 늘 깨어 있는 신앙  [2] 1397
134   [마산] 바쁘게 허둥대는 삶이 깨어있는 삶은 아니다.  [4] 2445
133   [원주] 희망과 기쁨의 시기  [1] 196
132   [춘천]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디에?  [6] 2424
131   [전주] 아름다운 길  [2] 1941
130   [광주] 구름아  [1] 192
129   (자) 대림 제1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6] 2030
128   [수도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4] 1826
127   [전주] 우리들의 신앙고백  1895
126   [수원/기타] 사랑의 콩깍지  [1] 2080
125   [원주] 그리스도를 입는 사람  [1] 1853
124   [인천] 자유로운 결단  [3] 1819
123   [대전] 너는 누구냐?  745
122   [서울] 주님과 함께 사는 삶  [1] 2393
121   [대구]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인가?  2064
120   [마산] "십자가를 지고"  [3] 1696
119   [안동]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1877
118   [부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3] 2079
117   (녹) 연중 제12주일 독서와 복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1] 1515
116   [수도회]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3] 2234
  [광주/전주/청주] 내가 살아가는 이유?  [4] 2470
114   [마산]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2] 1873
113   [의정부] 오직 사랑만이  [3] 2302
112   [군종] 용서의 삶  [4] 2280
111   [대구] 용서와 사랑  [3] 2174
110   [춘천/원주] 간절한 통회의 마음  [4] 2448
109   [인천] 작은 사랑  [7] 2386
108   [안동] 예수님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3] 2313
107   [부산] 이런 저런 생각  [4] 2118
106   [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8] 2528
105   [대전] 참회  [4] 2356
104   [수원]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5] 2464
 이전 [1]..[11][12][13][14][15][16] 17 [18][19][20]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