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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용서와 사랑
조회수 | 2,191
작성일 | 07.06.15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다 죄라고 고백하고 어떤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해성사를 볼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는 고해성사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사람들 이 복음에서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을 때 그 동네에서 행실이 나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울며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발에 입 맞추며 향 유를 부어 드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사이 사람의 태도는 얼마나 편협하고 옹졸합니 까? 그는 예수님께 드려야 할 존경이나 예의의 표시 를 보여드리지 않았습니다. 발도 씻겨 드리지 않았고 우정의 입맞춤도 없었으며 향유를 드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죄 지은 여인을 초대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여인의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청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믿고 죄의 사함이 거의 필요치 않다거나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잘못이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죄지은 여자를 경멸합니다.

죄 많은 여인은 자기 죄를 알며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미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친구이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으며 그분을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지 않았지만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미 자기를 용서해 주셨음을 알았고 예수님께 온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기 죄를 용서받았다고 느낀다면 사랑의 행위를 표시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

위대한 다윗도 죄를 범하였고, 나단의 고발에 묵묵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그 어떠한 벌도 감수하겠다고 하느님 앞에 다짐하였습니다. 그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뉘우칠 줄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 죄를 나단에게 고백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제시하고 죄 사함의 권한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려야합니다. 고해성사를 게을리 하면 할수록 다시 성사를 볼 마음이 내키지 않게 되고 마음이 자연히 멀어지며 성사를 안보는 기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냉담자가 됩니다. 죄 사함을 받는 고해성사를 보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표시합시다.

대구대교구 이성억 타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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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 그만큼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으며,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귀한 향유를 부어 발라드렸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과하게 보일 수도, 낭비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참으로 회심하였다는 것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께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간절한 표현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은 그녀의 절실했던 마음을 읽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그 여인은 품위 있는 유대인이 가까이할 수 없는, 결코 접촉해서는 안 되는 죄인일 뿐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는 흠 없다고 생각하였을 그에게 채무자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말씀하셨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공경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율법의 규정과 규칙을 준수하는 일 이전에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그분의 용서에 대한 체험에 많이 달려있다’ 고 하신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여인은, 그렇게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용서받은 그만큼의 큰 사랑을 당신에게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인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인가? 나는 하느님을 어느 만큼이나 사랑하고 있는가? 많이 사랑하고 있는가, 적게 사랑하고 있는가?

나의 구원은 나의 힘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나의 구원은 나의 선행이나 업적, 성과 이전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도 맞갖은 사랑을 드리는 자세, 그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죄에 대한 그분의 자비와 용서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용서하시는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닫는 나라면 당연히 그분께 나의 사랑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 너무나 부족한 우리 자신이다. 그러기에 언제나 나의 죄를 돌아보며, 하느님의 용서를 간절히 청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감사드리자.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도 기쁘게 응답을 드리자. 그분의 사랑에 맞갖은 사랑을 드리자.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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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변화 시키는 용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어가던 여인을 살려 주시고 용서로써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죄인이라고 낙인찍혀 평생을 소위 왕따를 당하며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살고있는 동네를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 여인은 주님이시라면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해 주시고 또 마음의 아픈 상처를 낫게 해 주실 것이라 굳게 믿으며 용기를 내어 주님을 찾아갑니다. 마침내 주님을 뵙게 된 그녀는 울면서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신 뒤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춘 다음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을 받았다고까지 하시면서 돌려보내십니다. 그녀의 죄를 보시지 않고,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 사랑의 은총을 아낌없이 베푸신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람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용서이며, 회개의 길로 돌아서는 순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사랑을 체험했을 때입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 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먼저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가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 적었지?” 그러자 뺨을 맞았던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는 그 사실을 모래에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있게 말이야.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세례성사로 신앙인이 된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묻기보다는 우리의 믿음의 생활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우리 역시 자신의 잣대에 맞춰 이웃을 판단하고 처벌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과 자비를 가족과 이웃에게 나눌 수 있어야겠습니다.

대구대교구 문병찬 대건 안드레아 신부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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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죄를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죄 지을 때마다 벌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만일 작은 번개 같은 것으로 때리신다면 하루 중에 여러 번 맞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므로 인간이 죄를 지어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죄를 용서받은 여인은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리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립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그야말로 감사함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단죄하는데 예수님만은 단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있던 바리사이는 예수님까지 속으로 비난합니다. 죄인인줄 안다면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바리사이에게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들어 이 여인이 많은 죄를 용서받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랑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라는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이 여인은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확정해주시고, 감사함을 표현하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니 죄가 오히려 은총의 근원이 된 셈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일입니까?

우리도 죄를 용서받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고해성사 받기를 꺼리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빚을 탕감 받는 것처럼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고 큰 사랑을 드러낸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우리도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이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짓게 되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크나큰 용서의 은혜를 깨닫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용서를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님의 발을 직접 눈물로 닦아드리지 못하지만 우리도 항상 주님께 감사함을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대구대교구 주흥종 대건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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