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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런 저런 생각
조회수 | 2,129
작성일 | 07.06.15
바른 생활의 사나이 시몬

난 늘 정의가 아닌 일은 가까이 하지 않았고, 율법과 규정을 충실히 지키며 바른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서슴치 않고 행한다.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아가는 것일까? 예수님은 알까? 저 여자가 얼마나 아부와 아첨에 능한 사람인지? 세상의 온갖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인지?

천부적인 아부꾼이며, 교태부리는 여인

내가 쓰레기 같은 인간 앞에서, 온갖 교태와 아부를 떨면 모두다 나에게 넘어온다. 난 이런 인간들이 싫다. 스스로 죄악에서 벗어난 사람인 듯,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인 듯 자신을 뽐내는 인간들을 나와 함께 온갖 죄악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싶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너무나 숭고하시다. 도덕적인 인간인 체하지 않는다. 율법의 규정에 메이지 않고, 안식에도 인간을 살리시고, 고통과 죄악에 빠진 이들의 벗이 되어 주신다. 난 그분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의 모든 삶을 고백하고 싶다. 그분이 나를 안아 주시고, 일으켜 주신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분 곁에 단 일분이라도 같이 있고 싶다.

예수

시몬아,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난 어떤 명예나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군가의 아첨과 아부를 받아도 그에게 줄 선물(명예, 돈, 권력)이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것뿐이다.
시몬아! 너는 내가 율법의 규정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너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너의 욕심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으면 더 좋겠구나! 진짜 신앙인의 길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여인아! 죄 많은 자가 나에게 가까이 오는 것은 더 두려운 법이다. 이미 죄에 물든 사람은 죄의 무게에 감각이 둔해져서, 자신이 죄인인지 깨닫는 일 자체가 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일보다 회개하는 일이 어렵고, 이 회개는 더 큰 용기와 변화를 위한 고통의 시간의 시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용기를 가진 자와 변화를 추구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회개하는 자는 이제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를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부산교구 주영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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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용서와 구원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비유 이야기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의 이야기, ‘은전 한 푼을 잃어버린 여인’의 이야기,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간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등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사용하신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야기들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인 공동체가 그분을 회상하면서 발생시킨 이야기들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고 그분에 대해 제자들이 회상하면서 발생시킨 이야기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은 이야기들을 비롯해서,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한 이야기, 갈릴래아 호수의 풍랑을 갈아 앉힌 이야기, 유대인들의 버림을 받아 로마 총독에게 고발되고 단죄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으며 어떻게 믿고 사셨는지를 말해 줍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기록한 복음서들은 그 이야기들을 담아 우리에게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도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일어난 일 한 가지를 우리에게 알리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식사초대를 받아 식탁에 앉아계십니다. 그 고을에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 한 사람이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님에게 접근합니다.

복음서는 그 여인이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고 말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집주인은 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예언자는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예언자라면 그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 사회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집 주인도 바리사이이고, 그는 하느님이 그 여인을 죄인으로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집주인 시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각각 빚진 두 사람을 예화로 말씀하시면서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곧 사랑이고 사랑하면 용서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그 바리사이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서로 다릅니다. 유대교의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버립니다. 그 하느님은 율법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대결 관계 안에 있습니다. 단죄하며 버리고 벌을 주는 대결 관계입니다. 인간은 그 하느님 앞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제물을 정성들여 바치면서 비로소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 당하고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인간은 항상 긴장하여 있어야 합니다. 지킬 것을 제대로 다 지켰는지, 또 바칠 것을 다 바쳤는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하느님 앞의 인간은 엄하게 감시하는 주인 밑에 있는 노예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그 죄 많다는 여인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성찰은 제대로 하였는지, 또 죄를 진심으로 뉘우쳤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물론 보속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믿음이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인간 세상이 존중하는 원리는 인과응보입니다. 잘 한 만큼 보상을 받고 잘못한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우리 사회의 형법이나 민법의 기본 원리입니다. 인간 사회의 질서도 그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는 하느님도 이 원리를 기본 질서로 삼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고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등장한 여인도 그런 이유로 그 고을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인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하여 대결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베풂이 있어서 자녀의 생명이 있고,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어 자녀가 자랍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실천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삽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며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장애를 가진 사람을 그 장애에서 벗어나게 하여 충만한 생명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자녀 되는 우리도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과 대결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합니다.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믿음이 있습니다.

서공석 신부
  |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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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용서받으려면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고해하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동을 하고 거기서 솟아오르는 기쁨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저절로 우러나옵니다. 그런데 똑같은 고해성사를 받고도 그저 옷섶에 묻은 음식 자국을 지운다거나, 교통위반으로 벌금을 내어야 하는데 그것이 면제되어 다행이라 여기는 정도일 뿐, 감동이나 기쁨이나 감사라는 말은 떠오르지도 않는 경우도 봅니다. 이런 상반된 결과를 보면서, 오늘 죄와 용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봅시다.

흔히들 죄라는 것은 어떤 규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키지 못한 의무에 대해 핑계거리를 찾게 되고, 진정한 뉘우침 없이 그저 처벌을 면할 길에만 관심이 쏠립니다. 그러니 고해 후에도 아무 감동과 기쁨이 없고 그저 위기를 벗어난 안도의 한숨만 있을 뿐입니다.

죄는 사랑에 대한 배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잃었던 그 사랑을 되찾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오늘 제2독서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처벌에서 벗어났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찾아 기뻐하는 것이 바로 용서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내리는 비와 같다고 합니다. 비는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이 내리지만, 준비한 그릇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용서의 은총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뉘우치는 오늘 복음의 여인! 모두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용서받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죽어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100점을 받아야 하는데, 자신의 삶을 보고하면서 점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주일미사에 항상 참석했습니다.”
“예, 1점입니다.”
“겨우 1점? 교무금도 잘 내었는데…”
“예, 그럼 1점 더 드리죠.”
“주일 헌금도 꼬박꼬박 잘 냈어요.”
“그랬군요, 1점 더 받게 됩니다.”
“아니, 이러다 언제 100점 채워요?”
“글쎄요, 또 없나 잘 찾아보세요.”
(한참 생각한 후)
“아무래도 부족하군요. 그저 주님의 용서를 빕니다.”
“드디어 깨달았군요. 용서를 빌 줄 알게 되었으니, 이제 100점입니다.”

부산교구 김정호 베네딕토 신부
  |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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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진심을 담으면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두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한 명은 유대 사회 안에서 신앙적으로 존경받고 인정받는 바리사이입니다. 또 한 명은 모든 사람에게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고 있는 여인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 안에서 죄인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등장한 두 사람 중에서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고 있는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태도와 몸짓 안에서 당신을 향한 진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위의 어떤 시선도 눈물로 적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내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그녀의 손끝에 담긴 진심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사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남을 의식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봉사를 남이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불신과 분노로 투덜거리면서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러 활동을 하고 신앙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겉으로 잘 포장된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지언정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주님의 외면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질타와 외면을 받더라도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진심으로 주님께 다가서는 것임을 오늘 복음은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신앙생활은 진실함에 달려 있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이 여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이 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의 몸짓과 손끝에 담긴 그녀의 진심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와 자세에 진심이 담길 때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에게서 이 말씀을 듣게 되길 희망합니다.

▦ 부산교구 계만수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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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큰 죄를 용서받은 여인처럼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대부분 유다인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도 유다인이었고, 성령 강림 때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도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당연히 할례와 율법과 같은 유다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할례와 율법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활동하던 아주 이른 시기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합니다. 특히, 베드로가 계시를 받은 사건은 이방인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교회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믿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사도 10장) 문제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의 백성이 되려면 이방인도 유다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해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는 율법과 할례는 구원과 아무런 관련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는데 창세 15,6에서 아브라함은 모세 이전에 이미 율법 없이 의로움을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의로움을 인정받은 사건은 창세 22장에서 이루어지는 할례 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의화(義化)’는 할례와 율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로마 4장).

바오로가 보기에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로마 3,20).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율법의 가르침을 모두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위대한 임금 다윗마저 죄를 저지릅니다. 그토록 위대한 성군으로 불리던 다윗 임금마저도 부하의 아내를 탐하여 부하를 죽음에 빠트리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 그 누구도 스스로 의인임을 자랑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나 깊이 있게 자각하고 있었고, 그런 죄스러운 자기 민족의 역사, 하지만 그런 죄인들인 자신들을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성경에 잘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하느님의 은총, 곧 메시아가 오셔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리라고 생각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런 죄의 상황에서 우리를 빼내어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신 분이 바로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거저 내어주신 당신 아드님의 희생 덕분에 하느님과 화해를 하게 되었고, 그분의 자녀, 그분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나의 행실에 따라 좌우되는 분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 바오로는 분명히 밝힙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행하는 행실에 따라 당신의 구원 계획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함부로 막살아도 하느님께서 알아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큰 죄를 용서받았음을 깨닫고, 큰 사랑으로 하느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었음을 감사드리며, 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사랑으로 하느님께 보답하도록 합시다. 믿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죄에 억눌려 살지 말고, 하느님과 화해한 하느님 자녀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6월 12일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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