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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조회수 | 2,233
작성일 | 07.06.15
독서 : 2사무 12,7ㄱㄷ-10.13
독서 : 갈라 2,16.19-21
복음 : 루카 7,36-8,3 또는 7,36-50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죄인으로 유명한 ‘여인 하나’(7,37)가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으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맡게 해주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입니다.

이 본문에 제목을 붙인다면 무엇이 될까요? ‘죄와 벌’이 아닌 ‘죄와 용서’, ‘믿음과 구원’, ‘예수와 여인’.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죄가 아닌가 싶은데 경건한 바리사이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적대시하면서 멸망할 이들과 상종하면 자신들도 불결해져서 하느님과도 멀어진다고 규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여자들과 드러내 놓고 가까이 지내는 것은 남의 이목 때문에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도 예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편이 되십니다.
이름도 없는 이 여인은 말도 없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하고 발치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시자 손수건도 옷자락도 아닌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습니다. 그녀의 행위가 말 대신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예수님은 말없는 선의의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십니다.

반면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은 환영인사도 손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음식만 제공한다.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하듯이 말입니다. 순간 ‘아마 이 사람은 예언자가 아닌 모양이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저런 대접을 받으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초대한 것은 아닐까?’ 하며 후회했는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 아이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와서 그렇게 고독한 모습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말이다. 화를 내지 말고 슬퍼하라. 복수가 아니라 연민의 정을 가지는 것이다.” 연민이 없는 그를 보며 야누쉬 코르착의 말이 생각납니다. 동시에 지난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사상 최대의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분노보다 슬픔이 앞서는 교포 학생이 생각납니다.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그녀의 마음과 행동을 받는 예수님은 의도적인지 잊어버렸는지(정작 그들이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면서: 루카 14,7) 몰라도 당신을 대우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도 차별 없이 손님으로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들이 돌아서서 ‘그는 손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율법을 어기는 자’(마르 7,5)라고 헐뜯고, 그는 ‘먹보요 술꾼’(7,34)이라고 소문을 낼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도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7,40)며 상대가 질문에 대답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는 “더 많이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채무자를 더 사랑합니다.”고 당연한 이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몬은 ‘죄와 벌’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의 초점은 죄 지은 그가 이제부터는 사랑하고 감사하며 새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의롭다고 여기는 시몬은 적게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적게 사랑하고,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큰 사랑을 드러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루카 18,9-14).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보고 인정하며 뉘우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한 이야기를 통해 다윗의 잘못을 지적해 줍니다. 나탄의 슬기와 용기도 그렇지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깨달은 즉시 잘못을 인정한 다윗의 훌륭한 점도 여기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거나 왕의 자존심으로 합리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탕한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9) 하듯 다윗도 자신의 죄가 단지 한 인간, 우리야한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저지른 잘못이라고까지 뉘우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이 탄생됩니다.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51,18-19)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7,50)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갈라 2,16)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왕에게 몰약을 섞은 기름을 부어 성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메시아란 ‘기름부음받은자’란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도유로 충만한 메시아였지만 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의 선한 뜻이 마치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름부어 드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도 머리도 몸도 아닌 발에. 스승이 발을 씻기는 것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고 하신 예수님은 여인이 눈물로 발을 씻자 여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고 하셨듯, 발에 기름부음 당하심으로 여인에게 메시아로서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해방과 사랑을 체험한 여인이 어찌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아래까지도 따라갔을 것이고, 날이 밝기만 하면 시신에 발라드리려고 향유와 향료를 준비했을 것입니다(루카 23,56; 24,1).

오늘날도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며 향유 바르는 삶을 사는 예수님의 여인들이 많음을 믿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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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에게 부어주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소서.

독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7절) 그 여인은 바리사이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요 ? 복음 처음부터 두 사람의 모습을 되짚어 봅니다.
바리사이 한 사람이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집에 초대합니다. (36절) 
그의 태도는 루카복음 19장에 나오는 자캐오의 태도와 대조를 이룹니다. 자캐오는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실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그에게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9, 5)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자신이, 예수님한테서 무엇을 받아야하는 곤궁한 사람임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고, 내 의로움으로 당당하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며, 오히려 예수님께 먹을 것을 드리고 자신한테는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인간관계에서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태도를 보일 때가 없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갈 때, 하느님의 사랑 없이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온 “죄인인 여자” 는 (37절) 그와 반대되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그저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공공연한 죄인이고, 자신이 하느님 앞에 나서기에 부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그만큼 큰 사랑을 받았음을 알기에 예수님께 자신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려 합니다. 향유가 그 여인이 소유한 것이었다면, 눈물은 예수님께 대한 한없는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고 (회개는 이미 지난 일입니다.) , 머리카락은 사랑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넘치도록 큰 사랑을 받았음을 알기에,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행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그분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그 여인이 체험할 수 있는 그런 큰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여인의 행위가, 그리고 그 여인이 하는 대로 내맡기고 계신 예수님의 태도가 그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 죄인인 줄 알 터인데.” (39절) 언뜻 호세아 예언자가 생각납니다. 분명 그는 ‘예언자’ 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내가 자신을 배반한 것을 명백히 알았지만 아내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호세 3, 1ㄴ)  예언자는 죄인을 알아보고 멀리해야 한다는 것은 바리사이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이신 예수님께는 그런 원칙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도 호세아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서 알아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호세아에게 간음한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고 하신 다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주어라.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고 있다.” (호세 3, 1ㄷ)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는 표징이 되기 위하여 호세아는 간음한 아내를 다시 데려옵니다. 마찬가지로 예언자이신 예수님이 그 여인을 내치지 않으신 것은,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많은 죄를 용서받았음을 안 여인은, 그만큼 큰 사랑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 물음으로 돌아갑니다. 과연 바리사이가 받은 사랑과 그 여인이 받은 사랑의 크기가 그렇게 달랐을까요. 어쩌면 받은 사랑을 헤아리는 잣대가 달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여인이 예수님께 보여드린 사랑은, 그 여인이 체험한 것과 같은 큰 사랑을 받는 체험이 있을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성찰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내 약함과 가난함을 아는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나의 모든 것이 그분 사랑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때, 나의 가난함을 하느님 앞에서 숨기지 않고 말없이 가만히 그분 앞에 갖다 놓을 때, “평안히 가거라.” (50절) 는 말씀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담겨 있는지를 알고 그분을 많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 ! (시편 32, 1 – 2) 

안소근 수녀
  |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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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끔찍한 상처에 어찌할 바 몰라 몸부림치던 한 여인, 삶의 밑둥이 싹둑 잘려나가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던 한 여인을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제는 타계한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詩)가 떠올랐습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로 가자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오늘 복음 장면은 바리사이들에게 아주 큰 스캔들을 제공한 전대미문의 ‘대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한 여인에게 취하신 태도를 보고 바리사이들은 깜짝 놀라다 못해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 사람의 초청을 받아 식탁에 앉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격식이나 체면과는 거리가 먼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산해진미 앞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바람이 났겠지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영양보충에 전념하시던 예수님 앞에 한 ‘껄끄러운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껄끄러운 존재’는 다름 아닌 ‘죄인인 여자’였습니다. ‘행실이 양호하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아마도 ‘자영업’ 여성 이었던가 봅니다. 정황을 봤을 때 이 여인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히 손가락질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만찬석상에 등장한 것만 해도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그 여인이 하는 행동 좀 보십시오.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었습니다.

식사 중이시던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대뜸 울기 시작합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을 터트렸습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만찬 파티에서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 참 안 어울리는 장면이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더 괴로운 일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무리로 향유까지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여인을 향해 크게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왜 하필 밥 먹는데 까지 와서 이 난리입니까? 제발 날 좀 가만히 놔주십시오. 그리고 찝찝하게 왜 남의 발에 눈물을 떨어트려요? 남사스럽게 남의 발에 입은 왜 맞춰요? 당장 그만 안 둬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조금도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십니다. 여인의 눈물에 담긴 지난 세월의 상처와 아픔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여인의 회개하는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십니다. 여인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이윽고 여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마침내 여인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의 달콤한 사랑은 갈 데 까지 간 여인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은 지난 세월 여인이 받아왔던 갖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은 여인 내면에 깃들어 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복원시켜주셨습니다.

그 옛날 여인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오늘 똑같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새살을 돋게 하십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영원한 좌절은 없습니다. 영원한 눈물도 없습니다. 끝도 없는 슬픔이란 더욱 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앞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하더라도 언젠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위기가 호기’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시로 겪는 인간적 한계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은총의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깊이 사랑하시기 위한 배려가 고통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 편의 기회입니다.

고통과 설움의 땅을 넘어 드넓은 벌판에 당당히 서십시오. 세상의 한 복판에 용감히 서십시오. 질기고도 질긴 고통의 세월 앞에 당당히 직면하십시오. 상처에 살이 쓰라려도 흔들리면서 세상의 고통 그 한가운데로 기쁘게 나아가십시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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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우리자신과 세상을 건강하게 바로 보는 시각은 언제나 용서와 사랑의 시각입니다. 신앙의 출발점과 도착점 역시 용서와 사랑입니다. 이렇듯 끝도 없는 사랑과 용서의 여정입니다. 뗄래야 뗄 수 없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누군가가 존재하기위해서는 누군가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깨닫는 것이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의 아픔까지 닦아주며 상처받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용서와 사랑은 하느님께 맡겨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쓰러뜨린 사람을 우리가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방향은 언제나 용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가장 큰 사랑을 매순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다시금 우리 존재에 대한 삶 안에서 더 크게 더 많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용서가 빠진 자리에 다시금 용서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간되십시오. 용서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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