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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금 우리의 신자 생활은 어떤가?
조회수 | 1,452
작성일 | 10.01.07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을 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을 보았다. 흰옷을 입고 강에 들어가 온 몸을 물 속에 푹 담그고 나와서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단지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 그토록 기뻐하는 이유는 세례가 단지 물로 씻는 일만이 아니라 그 예식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죄를 씻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세례 때를 기억해 보자. 우리 교회에서는 온 몸을 물에 담그는 대신 이마만을 물로 씻지만 그 의미는 동일하다. 6개월간의 교리기간, 시간에 쫓겨 놓치기도 하고 피곤하여 졸리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세례’를 위한 일념으로 열심히 출석했던 그때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다시 태어나던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오늘은 주님이 세례 받으신 날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죄 없으신 주님이 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씻기 위한 의식이라기보다는 온 세상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시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받고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당신의 생명을 실천하는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예식인 셈이다.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음성이 들린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명과 신분을 천명하는 하늘의 증언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일생을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셨다. 그리하여 세례를 통하여 그 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부여받게 되었다. 세례 받던 날 그 깊은 뜻도 모르고 다소 흥분되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신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 날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은총의 순간이었던가!

지금 우리의 신자 생활은 어떤가? 죄를 씻고 새로 태어난 세례의 기쁨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온 몸을 담그지 않고 머리만 씻어서인지 생각 따로 몸 따로의 신자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퇴색된 거울처럼 세월이 갈수록 처음의 그 마음을 잊고 산다면 세례 때 받았던 새 생명의 은총도 그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맞이하면서 요르단 강에 온 몸을 담그고 나와 서로 기뻐하며 얼싸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얼굴과 세례 받던 날 이마에 물 붓고 촛불을 들고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 방삼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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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서 그분이 세례를 기리는 오늘의 축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를 기억하는 것은 그 사실을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 하나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이야기입니다. 역사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서민들을 상대로 세례운동들이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세례를 준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하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례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정결례였다면, 요한의 것은 죄를 씻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 것을 약속하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은 유대교의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앞에 삶을 바꾸자고 외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동시에 알립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님이신 것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의 입을 빌려서 예수님이 요한보다 뒤에 오셨지만, 사실은 요한과 비교되지 않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지만,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라는 요한의 교훈을 계승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안에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계시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목숨을 잃기까지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그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초기 신앙인들에게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아버지의 후광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 마음에 들어 선택하신 종이었습니다.

이사야서는 또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리라.’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분은 목소리를 높여 외치며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주신다고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성전 의례를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명 되지도 않는 제자들을 모아서 초라하게 또 조용하게 가르치면서, 하느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용서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을 받들어 사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이사야가 이어서 하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단죄하면서 부러트려놓은 약자들을 예수님은 꺾어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라는 확신과 희망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으셨습니다.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병이 있어서 꺼져가는 생명들을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말씀이 하늘에서 들렸다고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성령이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우리의 숨결로 삼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세례는 하느님 앞에 우리의 신분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외치지도,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외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꺾어버리지 않습니다. “수고하며 짐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마태 11,2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좌절한 사람, 실패한 사람,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심지가 꺼져 간다고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합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꺼져가는 생명들 안에 주님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나 한 사람 잘 되자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종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세례입니다.

▶ 서공석 신부
  |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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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세례에 나타난 겸손

주님의 공생활 전에,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 나타나, 당당한 예언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줄 아는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겸손함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요한보다 더 겸손한 분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겸손은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세례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죄인들 속에 파묻혀 세례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세례 받는 장면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셨다." 수많은 우리 죄인들 속에서, 하나의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여기에 예수님의 겸손이 드러납니다. 또한 여기에 예수님의 겸손이 요한의 겸손보다 더 깊다는 것도 드러납니다. 주님의 겸손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그림자조차 없으신 분께서 우리 죄인 속에 들어와 우리와 똑같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자신을 우리 죄인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도와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죄인의 처지가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와 함께 죽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프면 주님도 아파하시고, 우리가 기쁘면 주님도 함께 기뻐하고자 하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고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 8) 라고 믿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겸손의 바다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겸손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죄인들 속에서,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이제부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데려가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세례의 의미입니다.

▶ 권지호 신부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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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세례와 나의 세례

오늘 주일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이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가 3,21-22)을 기념하는 날이다. 물론 단순히 세례를 받은 사실만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세례가 담고 있는 엄청난 의미를 하나씩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미를 하나씩 짚어보기 전에 ’주님 세례 축일’에 선택된 오늘 루가복음의 구성을 잠시 살펴보자.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나, 루가복음에는 그렇지 않다. 마태오는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를 두고 요한이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세례사건 사이에 요한의 투옥사건(3,19-20)을 삽입함으로써 누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요한의 제자가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요한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주장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점은 시간적 서술에 어긋나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삽입한 이유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힌 직후에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으로 일제히 보도한다.(마태 4,12-17; 마르 1,14)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시점을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끝난 시점에 두고자 함이다. 그런데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이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계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앞당겨 기술하고, 그 다음에 예수의 세례사건을 보도함으로써 예수의 세례사건이 공생활시작의 계기가 됨을 시사하고 있다.

이미 이 주간의 복음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루가는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시점이나 장소로 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루가복음에서 예수의 세례사건을 공생활 시작의 계기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루가복음의 세례사건에서 마태오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기도하심’이 ’성령의 하강’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루가는 분명히 ’예수의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이 곧 예수님 공생활의 원동력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 루가가 보도하는 예수의 세례사건을 근거로 예수의 세례가 담고 있는 의미를 하나씩 밝혀보자.

첫째, 예수님의 세례는 그리스도교 세례성사의 제정이다. 요한의 세례가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물의 세례였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용서하는 성령과 불(16절)의 세례이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도’(21절) 죄인들의 대열에 함께 서셔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죄인인 백성들과 연대하여 하느님 앞에 자신을 굴복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신약의 세례는 죄를 용서하는 성사(聖事)로 제정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계시이다.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예수 위로 비둘기 형상으로 하느님 성령께서 하강하시고, 그 위에서 아들을 확인하는 아버지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짐으로써 온전한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계시된다. 이로써 신약의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마태 28,19)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시대를 선포하며 독자적인 성령의 능력을 부각시키는 사건이다. 그래서 루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도록 특별히 지시하신 것(루가 24,49)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능력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 예수의 제2의 공현(公顯)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공현 대축일을 통해서 갓난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음으로써 온 천하에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경축하였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구세주를 위한 가능형이다. 이는 곧 한 아기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며, 이 가능성은 다시금 무한한 다양성에로 열려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로서의 아기 예수가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소신 있게 키워오고 지켜온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의식의 완성이다. 이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22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보증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현은 세례를 통하여 공증(公證)된 셈이다.

넷째, 예수님의 세례는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복음선포의 시작이다. 우리가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되듯이, 예수의 세례는 우리 세례의 원형이요 길잡이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복음선포의 공생활을 시작하셨듯이 우리도 세례를 받는 순간 복음선포의 공생활로 초대되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숙의 나이에 배령하는 견진성사를 공적인 복음선포에로 불리는 계기로 삼을 수 있겠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로써 제정된 신약의 모든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들을 예수의 삶에로 끌어들인다. 여기에 루가가 생각하는 자기 고유의 시간과 공간개념이 적용된다. 예수님의 "오늘, 그리고 이 자리"(루가 4,21)가 바로 세례 받은 나의 "지금, 그리고 여기"이다. 예수님의 삶과 길은 곧 나의 삶이요 길이다. 세례 받은 나에게 다른 삶과 길은 없다. 예수께서 가신 광야(루가 4,1-13)도 갈릴래아(루가 4,14-19,28)도 예루살렘(루가 19,29-24,53)도 곧 내가 가야 하는 곳이다

▶ 박상대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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