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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점이며 결론
조회수 | 1,860
작성일 | 07.04.05
최근에 제임스 캐머런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 ‘예수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주장을 펴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지난 3월26일에 유럽의 큰 방송사들이 ‘예수의 매장 동굴’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방영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탈피요트 지역에서 약 2천 년 전의 동굴무덤을 발견했고, 그 동굴 속에는 2천 년 전의 관이 열 개나 있는데 그 가운데 요셉의 아들 예수, 마리아, 예수의 아들 유다 등의 이름이 새겨진 관들도 있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지도 부활하지도 않았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유다라는 아들을 낳고 살다 죽었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대해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인 아모스 클로너 씨는 “비문에 적힌 이름들은 기원 전후 시기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아주 흔한 것이기 때문에 그 관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가족들의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라고 논평했답니다. 만일 캐머런 감독의 주장이 옳다면 그리스도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근거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인생의 근본문제인 죽음 저 건너편에 대한 설명을 주지 못하신 셈입니다. 또 예수님의 구원 사업도 실패작이 됩니다. 당신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구세주를 찾아,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 방황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습니다. 자기들의 눈앞에서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스승의 돌무덤이 로마 병정들이 불침번을 서면서 지켰는데도, 사흘째 되던 날 비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스승님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체험했습니다. 부활은 그들에게 엄연한 사실이었고, 이 사실을 증거 하느라고 사도들은 막내둥이 요한 외에는 모두가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죽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하리라 믿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도들의 조작사건이라고요? 자신들이 조작한 사실에 목숨을 걸고 마침내 순교까지 하다니, 있을 수나 있는 일입니까? 수십 년이 지난 뒤에 그 사건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조작사건을 진실로 알고 순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제나 한 달 전이나 일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의 조작자들이 스스로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 누가 그럴 수 있을까요? 이래서 사도들의 순교는 예수님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지난 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 드라마의 서곡을 울렸고, 성주간에는 본론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에는 드디어 결론을 맺습니다. 이 역전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에서 환희의 알렐루야를 외치며 승리를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 백남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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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는 너무나 모범답안이지요! 최근엔 "얘들아, 조의금은 얼마나 들어왔냐?" 혹은 "막달라 마리아는 결혼했냐?"는 농담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예수 부활 대축일과 예수 성탄 대축일 중 어느 축일이 더 비중이 클까요? 물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 대축일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의미 깊은 날에 우리는 계란 몇 개를 주고받을 뿐 구원 역사의 절정이며,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 사건을 그렇게 깊이 느끼고 체험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공생활 동안의 가르침과 기적도, 또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겸손과 최후 만찬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성체성사도 의미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력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인류는 예수님의 탄생 이전을 '기원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와 버금가게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인간 역사는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악한 이들이 성공하는 듯한 부조리한 세상을 혼란 속에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진리를 사는 사람들이 승리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 부활 사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암흑의 세력은 죽음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나 부자도, 또 최신의 과학이나 의술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지만 오직 한 분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인간에게 불멸의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 부활인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이렇듯 인류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며 부활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우리 구원의 정점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활하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음의 밤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활의 새벽은 절대 동트지 않는 법입니다. 죽은 자만이 부활을 희망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차례에 걸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화해할 수도 성숙할 수도 없게 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담임선생님의 구제 불능이라는 판단 아래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정치가가 되겠다는 뜻을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지만 친구들은 한결 같이 소아마비에 걸린 사람은 정치가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작곡가 베토벤은 어린 시절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자네는 음감이 전혀 없어!"라며 피아노 포기를 강요당했습니다. 홈런 왕 베이브 루드는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전향하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는 사람들의 비난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역사에 길이 남을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은 우리에게 부활의 무임승차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의 은총 속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제자의 길을 분명하게 요구받습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부모에게는 장애인 자식이 십자가이고, 어떤 이에게는 가난이 십자가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거친 성격이 십자가이고, 어떤 이에게는 술이나 약물에 중독된 아내나 남편이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친구의 배반이 십자가이고, 어떤 이에게는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미움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절망의 끝인 죽음에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 뒤를 이어 부활할 차례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여러분 모두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알렐루야!

▶ 이기양 신부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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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신선한 기쁜 소식

부활아침은 생각만해도 상서롭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일 뮌스터 교구 신학원에는 “요한네스 부르스(Johannes Bours)”라는 덕망이 매우 높으신 할아버지 신부님이 계셨다.

이분은 그의 마지막 저서 “내가 새벽 별을 주리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 전체에서 가장 뜻깊은 아침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부활아침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아침에 죽음이 생명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온 땅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긍정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네스 부르스 신부님의 이 말씀을 회상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본다.

오늘 복음은 부활의 첫 증인들을 부활신앙으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성금요일의 깊은 슬픔과 충격 속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빈무덤을 보거나,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가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빈 무덤’의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빈 무덤’을 처음 본 막달라 마리아의 처음 반응은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는 걱정이 가득 찬 ‘놀람’이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소식을 듣고 빈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놀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빈무덤’에 대한 이들의 ‘놀람’은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랑’에 의해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변해간다. “빈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는 제자가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불린다는 사실 자체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그 제자가 ‘빈 무덤’의 사실과 ‘잘 개켜져 있는 수의’의 사실을 넘어서서 그 사실에 깊이 담겨있는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에 대해 가지셨던 사랑과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던 그의 사랑이었다.

이 점은, 오늘 부활주일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 복음서 안에서 바로 다음 대목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금요일의 충격 속에 깊은 슬픔 속에 잠겨있던 마리아를 일으켜 세워 ‘빈 무덤’으로 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황량한 무덤 가에서 울고 있던 그에게 들려오는 (동산지기로밖에 보이지 않던) 낯선 사람의 소리, 곧 “마리아야!”라는 소리를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즉시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바로 그 사랑이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부활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은 주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소 두려움과 실의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 발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 축일의 의미는 부활전야 미사 때 있었던 ‘빛의 예식’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제시된다고 생각된다. “빛의 예식” 때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잘 표현해 준다. 우리 주변에는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사고로 평생을 침대라는 십자가에 못박혀 살아야 하는 사람들, 중병 중에 있는 사람들, 갑작스런 실직 등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 노년의 외로움, 또는 오랜 세월 함께 해왔던 인간관계의 단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지은 큰 죄 때문에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이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삶의 어둠들은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어둠의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참으로 이 모든 어두움을 밝혀줄 수 있는 참 빛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두움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죽음의 어두움” 한 가운데에서까지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부활 전야 “빛의 예식”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부활 초에서 서로 서로가 빛을 전달 받았듯이, 우리도 우리가 전해 받은 그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는 삶은 결국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부활 대축일”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언제 들어도 마음을 신선한 신앙의 기쁨으로 설레게 하는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 김영남 신부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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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 기쁨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 그리고 북녘땅 갈라진 형제들에게 주님 부활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인 우리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로 무죄 선언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거저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1코린 15,20-22 참조) 따라서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생명, 영원한 생명이 인간과 세상의 희망이며 미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됩니다.

부활을 향한 사순 시기 여정 중에 우리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뒤를 이어, 새 교황 프란치스코를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교회의 최고 목자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새 교황님께서 인종과 종교를 초월해 전 세계의 영적 지도자로서, 청빈과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본받아 우리 교회를 사랑과 일치, 진리와 희망, 빛과 기쁨을 가져오는 ‘평화의 도구’가 되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합니다. 평화가 이 땅에서 이뤄지도록, 도구로 쓰일 신앙인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곳곳에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분쟁이 계속되고, 물질만능주의와 빈익빈 부익부의 심화, 생명경시풍조 등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북한의 위협으로 완전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또한 계속되는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서민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지고 어려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의무를 뒷전에 둔 채 정쟁에 빠져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국민들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고 양보하고 타협하여 우리 사회가 진정한 평화를 누리도록 공존의 길을 찾아주기를 기원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온 마음으로 믿고, 그 부활을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계속되는 세상의 악과 고통 속에서도 굳은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생활 안에서 구체적인 방법으로,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미사참례, 기도와 성경 묵상처럼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성실히 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과 재능, 재물을 이웃과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기꺼이 도와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인으로 충실히 살아갈 때 많은 이들이 도처에서 주님 부활의 숨결을 느끼고, 그리스도의 평화와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과거형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체험한다면 모든 것은 변화되고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을 맞아 여러분과 우리 사회에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와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꽃필 수 있도록,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천상의 모든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2013년 3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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