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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조회수 | 2,114
작성일 | 07.04.06
유행가 가사 중에는 대상만 주님으로 바꾸면 멋진 기도노래가 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대할 때면 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라는 유행가가 생각납니다. 개인은 물론 인류 역사의 대주제는 ‘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인지요? 아직도 어두운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십자가 곁에서 모든 것을 끝까지 지켜본 그녀가 예수께서 살아나신다고 믿고 간 것은 물론 아니지요. 마르코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그 이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다시 발라드리려는 것입니다.(마르 16,1­2) 아마도 금요일 저녁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빨리 시신을 거두어야 했으므로 향료를 제대로 발라드리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돌은 이미 굴러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디로 옮겼을 것으로 짐작하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알려주고는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 홀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아가 3,3)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애타게 찾는 아가의 여인 모습입니다. 무덤에 묻힌 시신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묻힌 지도 벌써 사흘째. 믿음도 희망도 사라졌지만 예수께 대한 그녀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최초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피해 숨었지만(창세 3,8)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이는 그분을 찾으러 돌아다닙니다.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집에서 잔치가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스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지요. 이때 유다가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12,5) 그때 예수님은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12,7-­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지만 마리아의 사랑은 향유 값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효율성을 따지지 않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계산하실 줄 모르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20,3) 마리아도 달리고 두 제자도 달립니다. 이에 대해 마르티니 추기경은 살아나신 분의 표징을 찾으려고 애쓰는 교회의 초조한 모습과 한 가지 곤경에 마음을 쓰느라 다른 일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면모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시신이 문제이지 부활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간 다른 제자,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보다 젊어서 그런지, 사랑 때문에 그런지 더 빨리 무덤에 다다릅니다. 두 제자는 똑같이 무덤 속의 광경을 목격합니다만 각기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둘 다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제자는 ‘보고 믿었습니다’. 시신을 도둑 맞은 것이라면 수건이 잘 개켜져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그 표징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랑받던 이 제자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앉아 있다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이입니다.(요한 13,23-­25) 그는 예수님의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슴으로부터 듣는 귀를 가졌기에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보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이 제자는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라는 유언을 받았습니다.(요한 19,25-­27)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라고 합니다.(요한 21,24)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압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처음으로 체험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보고 믿은 이 제자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가슴에 귀를 기울인 ‘많이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무덤’입니다. 이 무덤을 중심으로 여인과 제자들이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을 이야기한 곳은 없습니다. 빈 무덤과 수의만 발견합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육중하고 큰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어둡고 축축하고 생명이라고는 조금도 느껴볼 수 없는 피하고 싶은 곳. 입구를 꽉 막은 무거운 돌은 죽음의 기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두 세계를 차단시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돌이 치워져서 두 세계는 연결됩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생명을 가로막는 큰 돌도 치워져 다른 용도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4­-5ㄱ)

빈 무덤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부활은 혼동과 의문에서 믿음, 성경 말씀을 믿는 믿음, 그리고 가시적 차원에서 비가시적 차원의 믿음으로 성숙해야 함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활입니다. 믿지 않으면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논리로는 풀 수 없는 화두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알 수 있는 부활입니다.

▶ 정 세라피아 수녀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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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녀에게 ‘얘야, 난 널 믿는단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난 당신을 믿어.’라고 말합니다. 머리로 따지고 계산하고 분석한 결과 신빙성이 있기에, 그래서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적 사고와 분석을 훌쩍 뛰어 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 판단에 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 차원을 내포하면서 그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경지엔 따뜻함이 물씬 묻어납니다. 부드럽고 활기차고 생명에 넘친 기운이 느껴집니다. 대단히 밝고 건강한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는 믿음도 바로 이 차원의 믿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아마포와 얼굴을 쌌던 수건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함에 빠져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믿음을 강요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한편으론 너무 쉽게 부활을 생각하며 믿음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보고 믿었다는 그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면서도 도망가고 배신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심한 좌절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의 그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감싸 안고, 도닥거려 주는 믿음인 것입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희망이 샘솟고, 위안과 평화의 힘이 온몸을 감싸는 그러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란 것을 머리로,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풀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학 계산하듯 똑 떨어지는 셈법을 들이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으로, 온몸을 통해 알아듣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가 알아듣는 이 믿음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어리석음의 소치도 아니고 광신적인 맹목적 행동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깊디깊은 곳을 건드리는 체험입니다. 이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이성의 차원을 뛰어넘는 알아들음이 일어나는 차원이고, 인간을 더욱더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차원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부조리와 비애를 목도하면서도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리지 않고, 그 모두를 끌어안고 솟구쳐오르는 놀라운 비상이 일어나는 차원입니다. 하여 인간이 참으로 겸손해지고 순박해지고 고요해집니다.

제자가 보여준 이 믿음의 차원을 우리도 일궈내고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은 비범하고 특출난 사람만 이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소박하기 짝이 없는 서민들이 가장 잘 가꿔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세울 만한 것 하나 없는 그 텅 빈 영혼위에 새로운 희망이, 새 생명의 기운이, 새 위로의 숨결이, 눈처럼 내려 앉아 쌓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난하나 아름다운 서민들은 그 위로와 생명의 기운을 온몸으로 감지하고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여 참으로 부활의 세상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회 유시찬 신부
  |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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