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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임을 증거해야
조회수 | 1,975
작성일 | 07.04.07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해마다 자연이 기지개를 펴는 이맘때가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일컬어 ‘삼천리금수강산’이라 부릅니다. 이 아름다운 땅에서 맞이하는 부활 대축일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우리들 마음속에 깊은 의미를 준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는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자연적 요소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차례로 변화, 순환합니다. 모든 동식물은 겨울에 죽음과도 같은 휴면에 빠졌다가 이듬해 새롭게 태어나는데, 이렇게 만물이 봄기운을 타고 생동하는 계절에 부활 대축일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봄은 모든 동식물들이 어둡고 추운 겨울, 죽음과도 같은 겨울을 이겨내고 부활을 체험하는 계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봄이 가치가 있는 것은 겨울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만일 겨울이 없다면 봄은 무의미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부활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없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도 주지 못하는 전례행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과정이 없는 기쁨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것은 겨울을 보낸 봄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동식물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지만, 그 혹독함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동식물의 휴면의 상태가 아닌 완전한 죽음에서의 새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잘려져 나뒹굴던 고목의 둥치에서 새순이 돋는 것이며, 동면이 아닌 완전히 숨이 끊어져 싸늘해진 몸에서 다시 숨의 박동이 뛰고 온 몸에서 온기를 뿜어내는 것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부활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 지식으로 받아들일 뿐 온 몸으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서는 우리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신앙 역시 우리들처럼 나약했고, 때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스승의 뜻을 반대하다가‘사탄’이라는 말까지 듣습니다.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 했던 제자들이었지만, 대사제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스승이 잡혀가고, 수난을 당할 때는 모두 두려워하며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이 오늘 아침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빈 무덤’을 보고서야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이긴 주님의 부활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야말로 겨울을 보낸 봄이 아니라 죽음을 이겨낸 새로운 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이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스승의 부활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2천년 전의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혹은 머리로만 알아듣는 신앙의 상식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아픔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이겨 나가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40여 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의 실천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부활 신앙의 실천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며, 새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결단’인 것입니다.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며 두려움과 허망함으로 좌절감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 가셔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또한 제자들처럼 기쁨에 가득 찬 소리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때로 신앙의 삶이 세속적인 인간 삶 안에서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인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 나와서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왜 우리를 이곳으로 끌어 내왔습니까?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는 비록 힘들어도 고기국물이라도 먹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이집트로 다시 돌아갑시다.”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이렇게 힘들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 끝내 도착하고 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거부한다면, 새로운 삶을 살기를 포기한다면 부활 신앙은 헛된 믿음이며, 언제나 세상의 노예, 죄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임을 온 몸으로 믿고 삶 속에서 온 몸으로 증거 할 때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부활의 기쁨을 진정으로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 이재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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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대축일 아침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또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제자들은 절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는 체험이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들은 다시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어둠과 빛이라는 대조적 단어를 잘 사용합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표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삶을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서 12장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습니다.”(46). 구원을 모르는 세상에 예수님이 구원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무덤에 갔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이미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그는 자기가 발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을 향한 달음질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더 빠릅니다. 그는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주는 여유를 보입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이 아끼시던 마리아 막달레나를 등장시켰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복음이 말하는 것은 부활 신앙이 한 여인의 상상에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확인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는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인물입니다. 제자들의 공식적인 확인을 거쳐서 나타난 부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무덤에 달려가는 데에도 더 빠르고, 믿는 데에도 베드로보다 더 빠른 것은 신앙에는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랑이 앞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확인 대상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까지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인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과 접촉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 안에서 발생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은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14장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그대들에게로 돌아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12-13). 세상은 그분을 십자가에 죽여 없애버렸다고 믿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을 반영하는 요한복음서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다시 돌아오셨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없애면서 시편이 말하는 대로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의 연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흘이라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72시간이 아니고,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하신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또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 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로 모험을 감행하신 분이었습니다.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님은 그 조직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그 시대 유대교 사회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이 절대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는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숨결 혹은 그분의 생명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며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우리도 실천하여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이 주신 자유로운 생명입니다. 율법과 권위에 짓눌려 살라는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과 권력에 짓눌리고, 욕심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고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 죽음에서 믿음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고 실천하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세상은 당신을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당신을 본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 안에 있었던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 안에도 살아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섬김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이었습니다. 신앙은 내세를 위한 보험도 아니고, 현세를 위한 우월감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섬김이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 서공석 신부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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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삶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과거 예비자 교리 시절의 한 질문이 생각납니다. 저의 예비자 교리는 ‘인간과 그의 종교적 필요성, 믿음과 그리스도교, 예수님과 성경,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신앙생활’이라는 흐름이었습니다. 단답식 암기 위주의 지식주입 방식보다는 이해와 설명을 중요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큰 깨달음으로 생사관이 변환되는 차원이기에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여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시간에, 부활은 ‘호랑이가 저기 나타났다’는 식의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그런 사건과는 다르다고 설명을 하면서, ‘부활로서 말해지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습니다. 어느 분이 ‘당신의 체험을 들려 달라’고 주문을 하였습니다. 순간 저는 당황하였습니다. 결국 예비 신자들이 듣고 ‘아하, 그렇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더듬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남에게는 부활의 의미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면서 정작 제 자신은 그런 체험에 빈곤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 복음의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메시지는 저를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저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네요. 과연 나는 일상의 삶에서 부활의 의미를 어떻게 체험하며 살아가는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도 이 물음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면서 어떻게 일상에서 그 의미를 살아내시는지요?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인간이 못질하여 결코 죽일 수 없는 그 생명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도, 어떤 권력도, 세상의 어떤 힘도 파괴할 수 없는 본연의 생명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죽음의 힘인 세상의 죄를 태워 소멸시키는 제물의 길, 곧 자기희생의 길을 통해 본연의 생명을 드러내셨지요. 이 자기희생의 길을 우리는 통상 사랑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에 사랑의 길이 희생의 길로서보다는 자기만족과 자기 유익의 길로서 왜곡되어 있는 것 같아 사랑이라는 말을 희생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자기희생의 길을 통해, 세상은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생명에 도달한 것이 부활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소중한 의미입니다. 인간이 마음속 깊이 염원하는 생명은 100세, 200세로 끝나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 영원과 절대의 경지로까지 확장된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죽고 난 후에나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길을 통해 지금 만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넓은 길, 편안한 길로의 유혹이 심한 우리의 삶에서 ‘좁은 길’을 결단함으로써 새 생명을 열었다면 부활의 의미를 살아낸 것이 아닐까요. 이기적 세상에서 자기희생의 길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면 거기 부활의 생명이 꽃피고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시어 매일매일 부활의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2013년 부활대축일에
부산교구 교구장 황철수 바오로 주교
  |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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