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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예수부활은 신화(神話)인가?
조회수 | 1,839
작성일 | 07.04.07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활신앙은 선(善)이 악(惡)을, 빛이 어둠을, 진리가 거짓을 이긴다는 믿음이다, 신자생활은 매일 죽고 부활하는 삶이다.

예수부활은 신화(神話)인가?

한 예비신자가 교리를 꾸준히 잘 듣더니 갑자기 교리반에 나가기를 거부했다.

이유인즉 성당에서 사람을 바보 취급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까지는 봐주겠는데,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으라니 말이 되나! 사람을 바보취급해도 유분수지!"하면서 화가 나서는 이제 성당 교리반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자기 아내에게 선언했다는 것이다,

예수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다

영원히 살고 싶은 염원을 지닌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은 없다, 아무도 건너보지 못한 죽음의 심연을, 제자들은 실망하고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숨어 지냈다. 그러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예수는 부활하여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분을 보았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조상 대대로 기다려 온 메시아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마침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결국 “예수는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외치며, 목숨을 바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한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 때, 우리도 그분처럼 죽음을 넘어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인 공동체가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과 발현이 없었다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사도들의 순교도 없었을 것이고, 사형수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야말로 예수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1945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듯이, 2천여년 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예수라는 분이 부활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1고린 15,14)고 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신부님은 예수부활을 참으로 믿습니까? 믿는다면 왜 믿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빌라도가 그 총독으로 있을 때, 예수라는 인물이 실제로 살았다는 것은 대개 인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으로 기대하며 그를 추종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유다 전통신앙을 모독한 자로, 선동가로, 정치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예수 외에도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형수는 많았다.

현세적 성공을 기대하며 예수를 따랐던 제자와 똑같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하신 것이다. 그분은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 I고린 15, 20)이 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등산로를 개척하듯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심으로써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그러면 죽음의 심연을 뛰어넘은 예수님의 승리는 어디서 왔는가? 예수부활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요한 5,44)하신 말씀을 철저히 사신 그 사랑의 결실이었다.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는 철저한 사랑"을 살 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하신 그분처럼 살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하신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다

나날이 부활하는 삶

우리는 지금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실직과 파산으로 인해 사회 혼란이 우려되고, 이혼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어느 때보다도 고통을 서로 나누는 사랑이 절실한 요즘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 죽는 만큼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씨앗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사랑하기 위해 매일 이기적인 나 자신에게 죽고 매일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사는 것이다.

▶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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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부활해야 한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우리에게도 조연의 몫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린이들은 날마다 빠른 속도로 자란다. 어린이가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추면 큰 일이다. 육체적으로만 자라고 정신적 성숙이 따라가지 못해도 걱정이다.

영세하고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세하고 10년이 지났는데 예비신자 때보다 신앙심이 더 약해져 있다면 이것 역시도 잘못된 것이다. 왜 믿음을 가졌는지, 믿음 안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없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지식이 부족하면 채워야 하고 체험이 부족하면 깨달음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믿음이 자라나게 해야 한다.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믿음의 꽃과 열매를 경험하면 신앙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삶의 동반자로 바뀐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점검이 부활을 맞이하는 조연자의 첫 번째 몫이다.

믿음은 바치는 행위다. 애정을 바치고 시간을 봉헌하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 자라난다. 예수님도 생명을 내놓으셨기에 부활하실 수 있었다. 봉헌하지 않으면 세월이 가도 신앙은 자라나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봉헌하는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조연자의 두 번째 몫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부활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씀도 여러 번 들었는데 이제 와서 깨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은 지식이 아니고 은총이기 때문이다. 부활사건은 머리로 깨치는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도 청해야 한다. 주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길 청해야 한다. 빈 무덤은 무엇인가. 그분의 무덤이었다. 누구라도 죽어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장소였다. 나에게도 빈 무덤은 있다. 자신을 포기하고 죽어야 할 장소가 있다. 그곳이 어딘가. 우리들 조연자가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관계란 늘 어렵다. 굳어진 탈을 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마음의 문을 닫고서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다른 어떤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평화가 빠져있다면 청해야 한다. 꼭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언제나 평화를 기원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희년은 기쁨의 해다. 금년 부활절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들 조연자의 결정적인 몫이다.

▶ 신은근 신부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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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사랑하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곳곳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아름다운 생명의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득 받으시고 기쁜 부활 축일을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40일 동안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고행과 보속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그분의 부활을 기다려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체험

요한복음 20장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부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인간과 그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분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묻혀 계시던 무덤에 갔습니다. 왜 그녀는 이른 새벽부터 무덤에 갔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마리아가 스승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면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잊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오직 하나 뿐인 소중한 존재로 체험하도록 신비로운 힘을 발휘합니다. 아울러 마리아는 스승 예수님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상실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남자들은 집으로 갔으나 더 강한 사랑이, 약한 여성들을 그곳에 머물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목격한 증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그럼에도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예수님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알아보지 못한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순간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과 상실감으로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던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파스카의 신비로 마리아를 위로하는 순간 스승을 알아보는 눈이 열립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행위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은, 이제 마리아가 슬픔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당신 부활의 신비에 동참하도록 초대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름 부름과 응답의 결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참된 목자이시고 스승이신 부활하신 분께서 걸어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갑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삶을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해석합니다. 삶의 방식과 태도를 주저 없이 새롭게 바꾸어 버립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자신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초대해 주신 스승의 목소리를 자주 떠올리고, 그분의 부르심을 기억하며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응답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은“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리 2,9)을 부르며, 바로 그 이름의 권능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는 일에 헌신합니다.

부활의 삶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없이 살아온 삶의 구조가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보편타당하고 변함없는 것을 손수 건설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매우 힘든 것일 뿐 아니라, 거의 가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세상을 더 이상 친구와 원수, 내 맘에 드는 사람과 들지 않는 사람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아주 구체적으로 그 사랑을 실현하는 길은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 자체가 사랑에 몸 바치도록 되어 있고, 또 이 사랑이 신앙 자체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터득합니다.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하느님 존재에 대한 증거이자 믿음입니다. 이처럼 이웃 사랑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위대한 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죽음의 예행연습 자체일 것입니다. 죽음의 예행연습은 누군가가 나의 생명을 갉아먹도록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방어에 급급하지 않는 마음, 사심 없는 마음, 싸움과 투쟁을 포기하는 마음이며, 무엇보다도 남보다 잘났다고 뽐내지 않으려는 마음,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메마르고 고통에 찬 외마디 말씀을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복음서의 전언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어둠의 시간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부활하신 분을 만나 변화되기에 앞서 겪어야할 죽음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죽음의 시간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마주하게 될 온갖 어려움, 한계, 고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체험하게 될 좌절과 슬픔의 시간입니다.

언젠가 부활하신 분께서 마침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 십자가를 지고 따르던 우리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온갖 절망과 좌절 중에도 부활하신 분께서는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곁에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부활하신 분께서 나에게 참된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마리아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제자들에게“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용감하게 증언합니다. 우리 역시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이웃들과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이웃들에게“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부활의 신비를 알리는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 코린 15,3-8)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들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부활의 삶을 살 것을 다짐 하시는 모든 이들에게 부활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축복과 은총을 기원 드립니다.

2013년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마산교구장 교구장 안명옥 주교
  |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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