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0 47.2%
[광주] 죽음을 넘어가신 예수님
조회수 | 1,657
작성일 | 07.04.07
오늘은 참으로 위대한 날입니다. 교회 전례로 봤을 때는 오늘이야말로 일년 중에 가장 크고 높은 날입니다. 예수 성탄이 기쁜 것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이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그 의미를 가지며 인생은 그 삶의 보람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온갖 선과 악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 은 명쾌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세상은 진정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었습니다. 악한 사람이 아무리 잘먹고 세도 부리며 떵떵거린다 해서 절대로 부러워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저편에는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실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깜깜했습니다. 안 보이니까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안으로 들어가셔서는 죽음의 휘장을 걷어 내시고 보니 그 뒤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소망스럽고 너무도 행복한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참으로 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삶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어린 딸을 잃고는 너무도 슬퍼했습니다. 딸은 너무 도 예뻤고 영리했으며 또 착했습니다. 죽을 이유도 없었고 부모가 또 악하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딸은 교통사고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세상에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 날 수 있는지 그녀는 참으로 분하고 원통했습니다. 세상과 하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자 그 자매는 더욱 괴로웠습니다.

삶 자체가 저주요 원수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녀님이 우연히 찾아와서는 딸은 필경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곁에 편하게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수녀님의 말씀에 너무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둡게 닫혔던 세상이 활짝 열렸으며 죽은 딸에 대한 희망 때문에 그녀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실로 예수님 때문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망가지고 부서지고 파괴되었던 모든 요소들이 이제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땅은 축복받은 땅으로 변화되었으며 심지어는 고난도 죽음도 다 은혜요 축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을 건져 주셨습니다.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그 열쇠였습니다. 부활이 그 해답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저주였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다." (신명 21,23; 갈라 3,13)라고 성서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로는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혼자 다 뒤집어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믿지 않는 이들에겐 십자가는 부끄러움이요 저주이지만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십자가는 진정 하느님의 힘이요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죽음 속을 들어가셔서 죽음의 저주를 다 깨뜨리셨기 때문에 죽음도 이제 은혜가 됩니다. 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원래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적이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니까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끝장이 아니요 새 삶을 열어 주는 관문이요 또는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부활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신의 부활, 생활의 부활, 그리고 마음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할 때가 있고 알게 모르게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새롭게 부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로든지 죽어봐야 새롭게 태어납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에서 작은 아들이 알거지가 된 후에야 새 인생이 되었던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 동료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 동료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자기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면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할 수만 있으면 복수를 하고 싶었고 그 동료를 생각만 해도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기도회에서 그 형제는 미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내적 치유를 인도하시던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 주는 것이 올바른 치유의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자기 동료를 위해 기도함으로 해서 자기가 오히려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건너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새 삶의 세계를 열어 주시어 닫혔던 세상의 모순을 풀어 주셨기 때문에 세상은 이제 절대로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위대한 새벽을 늘 바라보도록 합시다. 거기에 우리의 참 미래가 있습니다.

▶ 강길웅 신부
460 47.2%
참다운 삶의 풍요와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선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나약한 우리 인간의 모든 죄악을 당신 등에 짊어지고 죽으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전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고귀한 사랑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인간의 고집과 편협에 의한 장벽을 넘어 전 인류에게 주어졌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의 기쁨을 우리 믿는 이들과 지역민 모두와 함께 나누며, 부활 은총의 빛이 충만하도록 기원하며 축복합니다. 나아가 온 세상이 주님의 참 기쁨과 참 평화 안에 머무르도록 기도합니다.

풍요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 세상

참 풍요와 진정한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지금 지구촌은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갈등과 폭력, 착취와 소외, 인간의 멈추지 않는 탐욕과 소비로 자연환경은 더욱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명의 이기심으로 파괴되어가는 자연환경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공멸할 수도 있는 돌발 상황이 발생할 것을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새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있지만 도리어 남북 간 갈등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으며,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은 내세우지만 오히려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국민행복시대의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어 서민과 중산층이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혹시 ‘부유한 사람들만을 위한 정책이 우선하지 않을까?’ 라는 염려의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이타적인 삶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올바른 삶의 가치조차 외면해 버리는 어두운 사회의 모습을 대면하기도 합니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 꿈과 용기와 미래를 잃어버린 청소년들, 극심한 실업난으로 인해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져드는 많은 젊은이들, 이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창출해야 할 많은 과제가 우리 사회 안에 산적해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이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물질의 풍요함을 절대적 가치로 여겨 삶의 중심에 두는 이기적인 탐욕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참다운 풍요와 평화는 물질만능주의적인 탐욕으로부터 해방될 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뜻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데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부터 자신을 비우고, 탐욕을 버릴 줄 아는 진정한 용기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부활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기쁜 소식이며, 충만한 희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만이 진정한 풍요와 평화의 지름길입니다.

새로운 부활과 쇄신에로의 초대

올해 우리는 참으로 뜻 깊은 사순시기를 보냈습니다. 전임 교황님께서 사임하시고, 새 교황님을 맞이하였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님께서는 이 시대의 황금만능주의와 상대주의, 도덕적 의식의 붕괴로 고통 받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읽으시고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1월까지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곧 새로운 복음화의 실현이야말로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열정과 방식을 제안하시며, 당신 자신을 참다운 삶의 가치로 성화되어지는 전환의 계기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님의 비움과 희생은 구원의 희망을 키워나가는 우리 신앙의 여정과 인류의 나아갈 방향에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사순시기에 주님과 함께 신앙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청빈과 겸손과 단순함의 영성을 살아가시는 프란치스코 새 교황님께서 신앙인들과 전 인류가 나아가야할 길을 당신 삶으로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새로운 변화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겸손, 존중과 배려에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새로운 ‘부활’과 쇄신의 희망과 힘을 받으며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섭리에 더욱 감사하며 참으로 뜻 깊은 사순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시대의 아픔과 절규를 외면하지 않고 치유될 수 있도록 각자의 삶에서 더욱 매진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다지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

바오로 사도께서는 “죽음을 겪으시는 주님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의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과 프란치스코 새 교황님께서도 이런 믿음의 모습을 당신들의 삶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결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참다운 부활을 꿈꾸는 참 신앙인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이분들을 통해 우리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와 교황님들께서 우리의 삶에 빛이 되어 주신 것은 당신들이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님처럼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 낮은 자로서 머물고자 한 겸손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분들처럼 믿음의 힘으로 겸손과 비움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작지만 주님의 참 평화와 풍요로움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교형자매 여러분!
이제 죽음의 심연에서 벗어나 힘차게 태양이 솟아오를 것이라 믿고 있지만 여전히 주위는 어둑하고 차가운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어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의 고통과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행여 새 날이 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지치신 분들도 우리 가운데 많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와 제자들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늘어진 시신을 품에 받아 안았을 때, 그리고 아무런 빛도 없는 칠흑같이 어둡고 차가운 돌무덤에 예수님께서 묻히셨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생명의 빛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그 햇살은 온 세상을 온기로 가득 채웁니다. 주님께서는 이렇듯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 속에 기다리는 이들에게 부활의 평화와 풍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선물을 온 인류에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이 기쁨을 맞이한 모든 형제자매님들과 지역민들에게 주님의 참다운 풍요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13년 부활절에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 04.02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63   [대구] 십자가 사랑과 부활  [2] 2009
62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새 계명. 서로 사랑하여라]  [2] 1839
61   [수도회]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2] 2217
60   [수원]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3] 2210
59   [서울] 하느님의 사람  [4] 1814
58   [군종]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이끌어주시는 주님  [2] 1902
57   [대구] 귀 기울여 봅시다  [2] 2097
56   [춘천] 만인을 향한 거룩한 부르심  [1] 1930
55   [전주/광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1] 2121
54   [원주/의정부] 일상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1] 1902
53   [인천] 성소, 철회되지 않는 부르심  [3] 2358
52   [안동]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2] 2342
51   [마산]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2] 2027
50   [부산] 그의 꽃이 되고 싶다  [4] 2042
49   [대전] 평범함 속에 특별함이  [1] 1851
48   (백)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독서와 복음  [1] 1971
47   [원주] “빈무덤 사화” | 신앙은 마음의 결단  [1] 2178
46   [제주/청주] 오늘의 기쁨을 영원히  [1] 1891
45   [인천] 부활은 항상 우리 곁에  1839
44   [수도회]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1] 2115
43   [대구] 우리의 삶으로 부활의 기쁨을 증언합시다  604
42   [의정부] 부활은 희망  [1] 1763
41   [춘천] 멈추지 않는 사랑의 승리  [1] 1653
40   [수원] 지성과 사랑이 함께하는 신앙인  [1] 1711
39   [서울] 정점이며 결론  [3] 1861
38   [마산] 예수부활은 신화(神話)인가?  [2] 1840
37   [부산]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임을 증거해야  [2] 1976
  [광주] 죽음을 넘어가신 예수님  [1] 1657
35   (백) 예수 부활 대축일 독서와 복음  1231
34   [수도회] 짠한 아이들  [1] 1286
33   [대전] 내 사랑하는 아들  1377
32   [전주] 주님 세례의 의미  [1] 1726
31   [의정부] 하느님의 소원  1519
30   [원주] 세례를 통한 성삼위의 사랑과 위로  [1] 1575
29   [부산] 지금 우리의 신자 생활은 어떤가?  [3] 1450
28   [마산]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  [1] 1566
27   [대구] 참 좋은 이웃이 되어  [1] 1474
26   [군종] 세례성사를 통하여  1503
25   [춘천] 빛으로서의 사명  [1] 1347
24   [인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3] 1699
 이전 [1]..[11][12][13][14][15][16][17][18] 19 [20]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