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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성소, 철회되지 않는 부르심
조회수 | 2,357
작성일 | 07.04.27
인천교구에 신학교가 생기기 전 수원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인천교구 신학생들을 위해 성소국장 신부님께서 한 달에 한 번 학교를 방문해주셨습니다. 로사리오가 끝나고 끝기도 시간에 인천교구생들끼리 모여 성소국장 신부님을 모시고 성무일도를 바쳤습니다. 그런 후 매번 어김없이 박스에 한가득 담아오신 통닭으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참 맛있는 닭이었습니다. 당시 신부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나는 신부이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니 모두 책상 머리에 ‘○○○ 신부’라고 적어 놓고 생활하십시오.”

흔히 불교는 자력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타력적) 반면 불교는 개인의 수행과 깨침으로 열반에 이르는(자력적) 종교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교에도 믿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신과 조신의 믿음입니다.  

교신(敎信) :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 / 조신(祖信) : ‘나는 이미 부처이다’

교신의 믿음은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고, 조신의 믿음은 ‘나는 이미 부처이다’라는 믿음입니다. 이 두 명제에는 별로 차이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신은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야 얻을 수 있는 단계가 부처인 반면, 조신은 이미 내가 부처이므로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깨쳐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신의 믿음으로는 내가 부처가 될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단히 얻어내고 획득해야 하는 것이 부처인 반면, 나는 이미 부처이고, 단지 그 사실을 깨쳐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 조신의 믿음입니다. 내 안에 불성이 있고, 내가 부처와 다르지 않은데, 무엇을 획득하고 얻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여왔습니다. 특히 사제로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교회에 온 예비신자들에게 필요한 믿음은 고단한 교신의 믿음보다는 조신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미 세례 성사로 구원의 인호를 받아 간직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조신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해서 새사람이 된 우리에게 구원으로의 초대는 철회되지 않는 부르심입니다.

성소주일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서 기뻐하는 날입니다. 구원의 품을 잠시 떠나있던 사람들도 다시금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을 듣고 돌아올 때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사하며 우리를 향한 부르심에 합당히 응답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김학선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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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차를 몰고 멀리 지방을 가다 보면, 듣고자 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에는 잡음이 들리다가 나중에는 아예 채널이 안 잡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지역마다 라디오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 주님의 주파수와 세속의 주파수는 서로 달라서 세속에 마음을 빼앗기고 산다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또 기도와 같은 영적 생활을 통해서 주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하더라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거나 자꾸 한눈을 판다면 잡음으로 인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용서하라고, 양보하라고, 희생하라고, 나눔을 실천하라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힘들고 고달픈 일이다. 사랑의 실천에는 공짜가 없고 반드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은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 어깨에 큰 돌을 메고 건넌다고 한다. 그 무거운 돌이 무게중심이 되어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삶도 그러하다. 때로는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기도 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으며 그 분을 내 삶의 무게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험한 세상살이에 휩싸이지 않고 바르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부르심에 대한 마리아의 이 응답은 우리 신앙의 모델이다. 처녀인 상태에서의 임신이 마리아에게는 큰 돌이었지만 하느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살았던 마리아는 부르심에 응답했고, 천주의 모친이 되셨다.

오늘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성소주일이다. 그러나 성소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 15)를 지닌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인 모두가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고 봉사하여, 착하신 목자와 같은 자상하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는 성소주일이 되자!

정성일 세례자 요한 신부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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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부활 제4주일에는 3년 주기로 돌아오는 모든 전례력에 나타나듯이, 항상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와 관련된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래서 이 날에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불리는 성소주일을 기념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가 착한 목자가 되기를 요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주님 은총 속에 이뤄지는 사제직과 봉헌 생활의 성소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날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모든 성소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으로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에 응답하는 모든 이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어떻게 길렀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착한 목자에 관한 복음은 양들을 향한 목자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비유 핵심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요한 10,11).

착한 목자에 관한 요한복음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런 총체적 전망에서 바라봐야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은 전후 문맥상, 유다인들 사이에 계속돼 온 메시아 논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인지에 관한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주님을 향한 유다인들 증오와 적개심이 더욱 고조됩니다. 주님과 유다인들은 성전 봉헌축제 때에 성전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요한 10,22).
 
주님이 메시아인지에 대한 유다인들의 끝없는 불신에 대해 주님 대답은 명확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7-30).
주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과 달리, 주님을 불신하는 유다인들은 주님 음성을 듣지만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들이시며 메시아란 사실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알아듣지 못한다기보다는, 받아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맹목적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자신들이 지키려고 하는 가치기준 안으로 주님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만을 위해, 같은 편이 아니면 마음의 문을 닫는 폐쇄적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 명예와 영광을 서로 주고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질책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3-44)
 
당신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음성을 진정으로 듣는 사람들은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 금년 제47차 성소주일 담화에 이런 권고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특징은 깊은 사랑의 친교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특별히 사제는 친교를 이루는 사람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선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양 떼를 하나로 모아 분열을 극복하고 균열을 치유하며 갈등과 오해를 풀고 죄를 용서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의미는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세상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손길이 아기를 보듬어주듯이 주님 손길이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주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0,29).

홍승모 신부
  |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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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들어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을 보고 싶어 하고 미래를 보고 싶어 하고, 또 나 자신의 내면을 보고 싶어 하고, 사랑을 할 때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싶어 부대낀다 하고. 결국 하느님을 보고 싶어 많은 사람들은 사는 내내 철학을 하고, 신학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보기 전에 갖고 있던 마음과 본 후에 느껴지는 마음이 같을 수 있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단숨에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받고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것들로 변해버림을 자주 느낍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리의 눈으로 보아내고 판단해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양은 실로 엄청납니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 기대했던 마음과는 다른,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본 후에 느끼는 권태와 피로는 우리가 다시 사랑하겠다고 되뇌는 수많은 기도보다 더 강력했는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겠다던 사람들이 지치는 모습을 자주 보고, 그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종종 전해 듣게 됩니다. 이처럼 보이면 더 행복할 것 같았던 마음의 길마저 보이게 되면 우리는 덜, 아니 ‘그만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 마음의 길을 욕심껏 쫓아가 작은 것 하나까지 확인해내고 돌아와서야, 무엇을 알아냈는지도 모를 만큼의 아픔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보이는 모습 대신, 목소리를 내어주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하십니다. 그동안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도 믿지 못하겠다던 2천 년 전의 제자들처럼, 그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 만져보고서야 “나의 주님”이라고 외치던 우리의 모습이 묵상되는 이 부활시기에 당신의 선포와 행동을 이제 고스란히 그 목소리에 담아 주시겠답니다.
기도와 성경 안에 담겨있는 그 분의 목소리를 듣고, 이제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따라나설 때,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는 신앙이자 성소(聖召)인 듯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보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이해해내는 것이 사랑이자 화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감히 하느님을 다 알아내고 눈으로 봐야 사랑일 듯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됐다면, 그 목소리에 잠겨보는 것이 우리의 응답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고 내가 보고 싶지만 아직까지 내게 보이지 않는 사랑을 고민하며, 무엇인가를 보고나서 행복하거나, 무엇인가 확인하고 지쳐버리는 우리가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들어내고 그렇게 알고자 애쓰는 그 힘, 그 힘이 바로 ‘마음을 쓰며 살아내는’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성소주일. 제가 살고 있는 이 신학교의 넓고 푸른 교정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어렴풋이나마 듣고 기쁘게 돌아서는 이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아가 5,2)

▦ 인천교구 최민섭 요셉 신부 : 2016년 4월 17일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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