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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조회수 | 2,217
작성일 | 07.04.28
나에게 죽은 뒤 묘비명을 무엇으로 하겠느냐고 물으면,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로 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지나온 일생을 돌아보면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인도하고 계셨음을, 무엇 하나 채워지지 않은 것 없는 감사로운 삶이었음을 고백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양과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주님의 의지를 보게 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10,27ㄱ) 온갖 소리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거리에서도 집안에서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없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처럼, 서로 목청을 돋웁니다. 소리는 많으나 의미 없는 말만 공허하게 떠돌아다니는 듯합니다. 이 안에서 어떻게 주님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 엘리야 예언자가 호렙산 동굴에서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은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뒤의 불속에도 계시지 않았으며, 불이 지나간 뒤에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듣습니다. 향심기도의 선구자 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데, 그 목소리가 침묵이라니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의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라.” 하신 것은 내면으로 알아듣는 인식능력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마음의 소리를 듣듯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소리인 자신은 작아지고 의미인 예수님은 점점 커져야 한다고 합니다. 시끄러운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이 되려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된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10,28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9,41)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잘 압니까? 어떨 때 나는 파도 파도 길이 안 보이는 거대한 미궁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귀한지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루카 12,7)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아신다(마태 6,`8 참조)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또 시편은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뱃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139,13) 하며 속속들이 그리고 낱낱이 나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나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며, 나를 아시는 목자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인지 분명하게 됩니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그분의 막대와 지팡이가 나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10,28)

신앙은 하느님과 나의 1대 1의 관계입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지만 그 부르심은 개별적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이름을 부르고 응답함으로써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이 됩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시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하느님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하느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며 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또 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함으로써 사무엘과 하느님과 관계도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지어주시며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바오로에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방인 선교의 큰 소명을 주셨지요. 부활하신 주님은 또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의 이름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오늘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돈해야겠습니다. 가능하면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물러남도 좋습니다.
‘주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기 전에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자 나는 비로소 그분께로 가서 그분의 꽃이 되었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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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알아뵈올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제게 주소서.

독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기에 앞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목자의 표상을 잠깐 기억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라는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80,2) 또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편 23,1) 같은 구절을 기억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아시리아·바빌론·이집트 등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임금을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에제키엘 34장을 보면 이러한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양들을 목자에게 맡기듯 신들이 백성을 임금에게 맡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모세·여호수아·다윗 등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목자라는 표현이 적용된 예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시라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곧, 다른 누가 아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이심을 뜻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인도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하느님(시편 77,21), 바빌론에 유배 간 이스라엘을 어린양처럼 품에 안고 이끄신 하느님(이사 40,11), 오직 그분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임금이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이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해주셨던 바로 그 역할을, 이제 당신이 행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 전대미문의 말씀입니다. 실상 그 자리에 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하시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주장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라고 대응하는 것입니다. 실상 그들은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누구나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또 당신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시는 일들이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증언하지만, 듣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증언해 주는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주었다.”(32절) 예, 주님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이심을, 임금이심을, 메시아이심을,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는 것은 그분께서 사람들을 위해 해주신 좋은 일들, 가난한 이들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 병자와 고통 받는 이들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자비,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 구원의 선포,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런 ‘좋은 일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뵙지 못합니다.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표징’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왕권,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특정 형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뵙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찰

문제는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뵐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좋은 일들,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다른 그분의 모습, 이것을 그분이 목자이시고 메시아이시고 주님이시라는 주장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마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내가 결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 안에서 그것을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것을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다른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듯이,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이야기한 믿지 않는 이들과 달리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곧 당신이 메시아이시고(24-25절)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심을(30절) 알아보는 사람은 지금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며, 하느님과 친교를 이룹니다.

기도

세상 끝이 모두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
민족들의 모든 가문이 그분 앞에 경배하리니
주님께 왕권이 있고 민족들의 지배자시기 때문이다.
(시편 22,28-29)

성바오로회 안소근 수녀
  |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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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잘 안다는 것, 주저 없이 알아듣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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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관계를 맺는 행위라기보다 알아보는 행위이다.” 프랑스의 신경정신의학자이며 비교행동학자인 보리스 시륄니크가 정의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알아보게 하고 온전히 알게 하며 신뢰하고 따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소 주일이며 ‘착한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부활 4주간의 본문들은, 서로를 알고 그 목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들으며 그 어떤 난관 중에도 그를 믿고 따르는 ‘목자와 양떼’에 대하여 전합니다. 특별히 복음의 본문은 예수님과 그분의 양떼 사이에 형성된 이 관계가 하느님에 의해 시작되고 그 마지막까지 주도됨을 알려줍니다. 인간은 낯섦에 대하여 늘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타자적 존재를 그 어떤 두려움 없이 온전히 믿고 그 목소리를 주저 없이 알아들으며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관계는 하느님만이 허락하시고 계획하시며 가꾸어 가시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성전봉헌 축제(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혁명군이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를 격퇴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탈환하여 정화하고 봉헌한 사건 기념)를 그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요한 10,22 참조) 유다인들의 큰 축제 중 하나인 이 시기에 군중들은 예수님이 오셔야 할 메시아인지를 질문합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 이스라엘의 자부심이었던 다윗의 영광과 마카베오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성공을 전제로, 예수님도 그렇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위업을 이룩해주실 수 있는 분인지를 노골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목자가 양떼를 이끄는 듯한 헌신과 사랑이 당신의 사명이며 영광임을 강조하여 알려 주십니다.

■ 양들을 잘 아는 목자

목자와 양떼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유비’(類比)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이고 그분의 것이기에 그분을 따라야 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의 소리를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예수님의 양들은 그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또한 목자도 양들의 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이러한 상호성은 언제나 목자와 양들이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난히도 ‘안다’라는 동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어 ‘기노스코’에 해당되는 이 단어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알고 배우는 인지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가 갖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어 섬세하게 알아주고 이를 실현시키는 헌신적인 행위, 돌봄, 확신… 등 사랑이 주는 모든 정서를 내포합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내용들도 이 ‘앎’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28절)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죽음이나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살리는 것이며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안전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목숨을 당신의 양들을 위해 내어놓으셨고 그 사랑으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 사랑의 중요한 단서 하나가 제시됩니다. 이 관계가 여타의 인간관계와 명백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그분에 의해 계획되며 인도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29절)라고 이 관계의 근원을 분명히 표명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하느님에 의해 주도된 관계는 절대적이고 견고하며 놀라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반대로, 제1독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거주하던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명망 있는 인사들을 안식일에 초대하여 회당에서 연설을 듣는 관습이 있었는데 본문은 이 도시의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말을 듣기 위하여 “거의 다 모여 들었다”(사도 13,44)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자 모여드는 것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44절) 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46절) 판단한 것이라고 보고 다른 민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겠다는 담대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자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됩니다.(48절)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형성되는 것입니다.

■ 어린양이시며 목자이신 분

제2독서인 묵시록의 내용도 “하느님의 백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을 연상시키는데(창세 22,17 참조)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를 형성하고 있고, 국가나 민족의 구별 없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온 이들로서 광대한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던 구원의 범주가 이제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한 이들인데(14절)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을 죄에서 벗어나 깨끗한 상태로 건너가게 하였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희생과 봉헌은 예수님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게 하는 결정적 사건이 되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17절)십니다. “어린양”은 이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서슬 시퍼런 분노와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일궈낸 안정이라 하더라도 그 정치적 현실이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의 축재와 성공을 통해 살기에 가장 편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이 비인간화와 결핍의 허기를 무력화시키지 못함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정치·경제적으로 구원할 제왕적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 어떤 영화나 화려함도 인간이 구현해야 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복과 충만, 자유와 해방을 주지 못함을 깨달으면서 진정한 구원의 실체를 묻기 시작합니다. 그 답은 존재를 바쳐 믿고 보호하며 이끌어주는 목자적 메시아의 등장이었습니다.

부질없는 저항이나 집요한 탐욕에 대한 추구는 현재를 더욱 불안하고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건네주시는 주변의 작은 사랑과 우정을 알아보고 그 빛이 인도하는 복음을 향해 걸어갈 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누릴 온전한 기쁨과 충만은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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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가톨릭신문 2019년 5월 12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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