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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있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조회수 | 2,716
작성일 | 07.10.12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늘이 보입니다. 구름을 보고 있으면 구름이 보입니다. 산을 보고 있으면, 나무를 보고 있으면, 꽃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보입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내가 바라보기에 보이는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의 머리 위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이 항상 거기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산이 늘 우리 곁에 있어도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나무가, 꽃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주위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것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요, 있지만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보고 있지 않기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느님을 본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기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합니다.'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시더니 나와는 같이 계시지 않는구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은 뒤로하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혹여 나에게 이루어진 그 모든 것을 보고는 나의 능력인양 나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오늘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바라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그저 감사함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느님께 돌아와 당신의 발 앞에 엎드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으니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그 바라봄을 통해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깨닫는 것이요, 다시 돌아와 감사와 흠숭을 드리는 일입니다.

하늘은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구름도, 산도, 나무도, 꽃도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 볼 때에야 비로소 하늘이 되고 구름이 되고, 나무와 꽃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 감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순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나의 눈으로, 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 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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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전덕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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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삶

교회에서 흔히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들어왔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이나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모습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러니 우리도 그들처럼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종종 얘기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행동이 그토록 칭찬받을 일인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은 너무나 삭막할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은 안타깝고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치유 받은 나병환자 열 명중에 단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드립니다. 그것도 당시에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나병환자 열 명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집니다. 사제에게 가서 확인받는 절차는 당시 구약 법에 따른 것으로 사제가 나병의 진단을 통해 '부정'했던 그들의 몸을 이제 '정'한 것으로 판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병의 불치성, 전염성과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야했던 그 시기에 나병은 곧 죽음이상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치유 받은 그들 열명 중에 아홉은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무나 치유 방법이 간단해서 그러했던가? 아니면 이 치유가 예수님과 무관했다고 여겼는지 알 수가 없지만 아홉은 끝내 예수님께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감사드렸던 사마리아인은 믿음까지 얻는 기쁨을 체험합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인 나아만이 엘리사의 명에 따라 요르단 강에서 일곱 차례 몸을 씻고 나병에서 완쾌됩니다. (열왕기하 5,1-27) 요르단 강에서 일곱 차례 몸을 씻으라는 좀 '엉뚱한' 처방에 나아만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그대로 수행했으며 치유를 받고 야훼를 찬양합니다.

우리 생활에 너무나 쉽기 때문에 당연시 여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공기의 고마움은 질식의 고통을 느껴본 사람들이 절실히 느낄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도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에 당연시 여기다가 돌아가신 이 후에야 후회할 것입니다.

감사란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함이 마땅한데 무조건적으로 감사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쉽게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일들을 간과하고 살지는 않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산다면 이 세상에 사는 의미, 기쁨, 그리고 사랑의 체험도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건과 행복이 있다면 곧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분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거나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하루하루를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주교구 박상용 신부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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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자”

고마움을 느끼는 감사라는 말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초월적 존재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은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보아도 은총(charis)과 감사(eucharistia)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거저 베푸는 선물인 은총과 감사가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름 아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인간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와 주관 아래 있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가지 덕목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이 감사의 덕만큼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덕목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감사의 생활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변덕스러움이 은총의 풍요로움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욕심과 변덕의 본능을 넘어섬, 그리고 이미 받은 것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감사의 생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로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나 그들을 치유해주는데 그중 아홉은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이방인 한 사람만이 치유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치유 그 자체보다는 치유 받은 이들의 대조적인 처신이 핵심이고, 또 거기에 더해지는 예수님의 말씀,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말씀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한명에게서는 교훈을, 다른 아홉에게는 뭔가 모르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읽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보면 이 복음은 이러한 표면적인 교훈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습니다.

사실 치유받은 아홉이 감사를 드리지 않은 것을 배은망덕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고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면서 아쉬움을 느낄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 나병이 가지고 있었던 환경과 치유과정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나병은 문둥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나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불결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어 가족과 인간 공동체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사제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그들을 먼저 사제에게 가도록 요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들은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이 낫게 되는데 한명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아홉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돌아온 한명이나 돌아간 아홉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 기쁨의 크기도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명과 달리 다른 아홉에게는 이미 받은 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고, 또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는 해야할 중요한 또 다른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사제의 확인을 통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상봉, 자신들 앞에 펼쳐질 핑크빛 미래를 준비하는 일들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어려울 때는 주님을 찾지만 정작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일에 얽매여 주님을 잊고 사는 바쁜 오늘의 우리 모습이기에 우리는 여기서도 많은 교훈과 함께 삶의 지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감사를 드리지 않은 이 아홉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기적적인 치유보다 더 감사해야할 일은 치유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즉, 치유가 「정말 감사해야할 일」이라면 치유 받지 않아도 되는 건강한 몸만도 「정말 정말 감사해야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물론 저의 입장이겠습니다만 「정말 정말 감사해야할 너무나 많은 일(은총)」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정말 감사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아홉에게는 진한 아쉬움을 가지면서도 자신은 정작 감사의 생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평과 불만 속에서 또 다른 감사의 조건과 상황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에 봄을 찾고 봄이 오면 여름을, 여름이 오면 가을을 찾는 마음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현재의 아름다움을 누리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계절의 장점에 집착하는 병적인 인간의 욕심이 이러한 변덕스러움의 원인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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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사람만이 감사한다

세상에는 화려한 주연도 있지만 고마운 조연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조연들이 있어 세상은 훈훈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영광의 순간도 있지만 어두운 구석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이 있어 삶을 성찰케 합니다.

나아만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잡혀온 이스라엘 소녀가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를 소개해줍니다.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그가 일러준 대로 몸을 씻었고,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만일 그가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잘나가기만 했다면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찾았겠습니까? 그들도 나병이라는 삶의 어두운 구석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주제로 성화를 그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제임스 티솟(James Tissot, 1836∼1902)의 그림만 이름이 남았을 뿐이고, 나머지는 작자 미상입니다.

제임스 티솟은 1836년에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나 스물세 살에 화가로서 첫 번째 전시회를 했고, 서른네 살에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런던으로 갔고, 마흔 살에 런던에서 캐서린 뉴턴과 동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6년 만에 숨졌고,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는 심령주의에 빠져 예수님의 생애와 구약성경을 주제로 700여 점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예순 살에 런던에서 예수님의 생애 350점을 전시했고, 노년에는 예수님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예순여섯 살에 프랑스 두(Doubs)지방의 비용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그가 전쟁을 겪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지 않았다면 성화를 그렸겠습니까? 전쟁과 사별이라는 어두운 구석이 그를 신앙으로 되돌리게 했습니다.

그가 그린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어떤 마을에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에서 어떤 이는 팔을 들고, 어떤 이는 손을 모아 애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뒤돌아서서 한 손을 들어 이르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는 나병 환자 열 사람 중에서 무릎 꿇어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감사는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할 수 있고,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감사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새로운 은혜를 더 풍성히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은 아닙니까?

위대하지는 않지만 고마운 조연들이 있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찰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한 세상입니다. 받은 은혜는 많지 않지만 감사하는 사람이 있어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손용환 신부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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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선입견과 편견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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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장매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한 지도 벌써 6년을 넘기고 있다. 장애인들에게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가볍게 여기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냥 생각 없이 그들을 대충 보 고I 대충 듣는 버릇(마치 내가 그들을 다 알고 있는 등이 생겼다. 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이 점점 희박해진다. 이러다 주변 사람들이나 사건들도 대충 보고 서는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 할 꺼야!"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넘어선 결과를 제시하며, 우리에게 좀 더 신중해지기들 요구한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와 요르단강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을 넘어서서 주님께 믿음을 확약한다). 유다인들에게 외국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마리아 사람! (남부 유다인들은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혈통적, 종교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겼고,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을 천대했다, 병 고침 받은 나병환자 열사람 충에 유일하게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린 사람이, 천대받는 북부의 사마리아 사람이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 (죄를 지었기에 감옥에 갇혔겠지’ 라는 통념을 넘어 주님과 함께 죽는 과정으로 복음을 위하여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받아들인 바오로다). 예수님 또한 ’나자렛에서 뭔 큰 인물이 나오겠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선입견을 넘어, 진실한 믿음의 모범 사례로 언급된 나아만!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사마리아인! 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자신의 저지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손과 진정성이 아닌가 싶다. 선입견과 편견은 스스로의 우월감과 경박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 결과는 차별과 박탈을 가져 온다. 하지만 이들의 겸손과 진정성은 참된 신앙과 치유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이제 연중 28주간 월~금요일 복음에서, 선입견과 편견에 갇혀있는 군중들, 그리고 군중들의 선입견과 편견을 이용해 자신의 기득권과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이들을 구원하려는 예수님과의 긴 갈등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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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고정배 요셉 신부
2016년 10월 9일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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