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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낮은 자리 높은 자리
조회수 | 1,963
작성일 | 10.08.28
사람들은 자리에 민감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누구나 능력이 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자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로도 많이 사용합니다. 즉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느냐가 성공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하게 되고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훌륭한 처세술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올라가는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사람들은 기를 쓰고 위만 쳐다보며 살아가지만, 그저 위로 올라가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위험,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을 위험, 결정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 혼인잔치에서는 완전히 거꾸로임을 예수님은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자랑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지겨워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을 사람들은 인정하고 가까이 대합니다. 자리를 정해주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스스로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낮은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이것저것 못한다고 뒤로 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정확히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장점은 장점대로 인정하고 단점은 단점대로 내 안에 있는 모습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정 겸손한사람입니다. 나에 대한 자리매김은 내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잔치에 초대하라고 하시며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보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보답을 받지 못하겠지만 하늘 나라에서 받을 보답을 희망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이 세상에서는 꼴찌가 되고 손해만 볼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고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래하는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을 주었으면 그만큼을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내가 되돌려받지 못하면 베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러한 거래가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거래를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외아드님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드렸기에 그분께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무상으로 모든 것을 베푸셨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무상으로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당장은 손해인 것 같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희망하며 아낌없이 베풀 수 있을 때 우리는 소탐대실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라, 대탐소실하는 하느님의 지혜로운 자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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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철 마조리노 신부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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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7-14)

<인간이 하느님 앞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겸손>

잔치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참 못 볼꼴을 보셨습니다. 초대받는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생애가 겸손과 낮춤 그 자체였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런 모습을 견디기가 정말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인 겸손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모든 덕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이 바로 겸손입니다.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이 또한 겸손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영성생활을 해나가셨던 신앙의 모델들, 모든 성인(聖人)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덕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열등감에 의해,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잘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모릅니다’ 라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갖출 것 다 갖췄으며, 내가 상대방보다 다방면에 우월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양의 덕이 바로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욱 요구됩니다. 크신 하느님, 관대하신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나였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티끌 같은 존재, 먼지 같은 존재, 한 마디로 무(無)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생명으로 나를 초대해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봉헌생활자로 초대해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는 한 나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의 첫걸음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시간에 종속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필연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유한한 우리들입니다.

채무자이신 하느님 앞에 채권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죄한 하느님 앞에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피고인들인 우리들입니다. 순수한 존재 앞에 선 불순자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태도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지만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맨 끝자리라도 감지덕지하면서, 늘 기뻐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아침마다 묵묵히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 오면 낙타는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제나 주인 앞에 고분고분 무릎을 꿇는 낙타 모습에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말없이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주인이 매일 얹어주는 짐을 아무 불평 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낙타는 자신이 지고 가는 짐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낙타에게 짐은 무거우나 짐으로 인해 낙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고통과 십자가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나 그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생각할수록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약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만 갑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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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7-14)

복음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길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들만이 제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고통과 죽음까지도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n우리가 복음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b하느님께 맡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b하느님 사랑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삶의 새로운 방향이 낮아지고 작아지는 십자가의 길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를 철들게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신앙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과 사랑의 의미를 우리의 십자가에서 새로이 만나게 됩니다. 깊이 내려갈수록 하느님 사랑은 우리의 가난까지도 풍요롭게 만드는 은총임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과 우리 자신은 결코 떨어져 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감사의 기도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삶이 더욱 더 낮아지고 작아지는 사랑의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회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으로 자신을 낮추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자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기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랑의 여정 되십시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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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7-­14)

▪ 묵상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마침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주셨습니다(14,2-­6). 수종을 앓는 사람도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14장 12절로 미루어 보아 그는 바리사이의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 새롭습니다.

바리사이의 초대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자들의 화려한 파티를 연상시킵니다. 이런 모임에서는 어느 자리에 앉는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지위의 서열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떤 자리에 앉으셨을까요? 당연히 윗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구간에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윗자리를 고르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보이기 위해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격이지요. 11절까지 ‘자리’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오지만 이는 자리에 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여 끝자리에 앉는 마음을 가져라. 그러면 결과적으로 영광이 돌아온다.’는 말씀이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11) 겸손은 자기 비하나 비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하게 아는 자기 인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고 한 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자신의 자리에 당당하게 똑바로 서 있는 겸손한 자의 말입니다. 따라서 높아지기 위해서 일부러 낮추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면 하느님께서 높여주십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섬김을 받기 위해 먼저 섬겨야 하는 논리와 같습니다.

음악회나 연극 그리고 운동경기 등을 관람할 때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면서도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서 천상 양식이 마련된 미사의 초대에는 서로 다투어 앞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금총’을 받는 앞자리라는데도 굳이 뒤에 남아 있는 것이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아마도 미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이겠지요.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히브 12,22-­23ㄱ)

이어 예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ㄴ-13)

코린토 교회에서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자리가 일치보다는 분열을 일으키자 사도 바오로는 이를 꾸짖었습니다(1코린 11,17-­34). 좋은 음식을 가지고 먼저 와서 배부르게 먹고 술에 취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늦게 온 이들은 배가 고픈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1코린 11,22ㄴ)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내놓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서 있거나 발판 밑에 앉으라고 하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야고 2,1-­4). 좋은 차를 몰고 오면 깍듯이 경례하고, 허술한 차를 몰고 오면 무시하는 오늘의 세상살이가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식에 갈 때 부조금을 내고, 상갓집에는 조의금을 냅니다. 큰일을 치르는 집에 목돈이 필요할 것이니 조금씩 돈을 내어 돕자는 아름다운 취지였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집에는 많이, 부유한 집은 적은 금액을 부조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여서 별 볼일 없는 집은 대충 넣고, 권세있는 집에는 그쪽 체면을 봐서, 또는 나중에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라도 적은 액수를 봉투에 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가치관과는 영 다르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Pay It Forward(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갓 중학교에 입학한 트레버는 사회 시간에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방법을 생각해 일 년 동안 실천하라는 숙제를 받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트레버는 심사숙고 끝에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자신이 누군가 세 사람을 도우면 그 세 사람은 각각 또 다른 세 사람을 돕게 되고 그 아홉이 다시 각각 세 사람을 돕고`…. 그러다 보면 ‘사랑 나누기(Pay It Forward)’ 운동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이를 실천합니다.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또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유료 주차장에서 앞차가 뒤차 주차비까지 지불하였습니다. 뒤차는 또 그 뒤차의 것을 지불하였는데, 맨 마지막 차에는 그날 주차료를 걱정하면서 딸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는 발레를 보여주기 위해 돈을 모아 표를 샀지만 주차료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차를 몰면서 하느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기도가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되돌려 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푼 것이 아니기에 두 이야기 모두 감동스럽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마음입니다.

▮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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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탈 때 가끔 목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차례로 줄에 서 있다가 지하철의 문이 열리면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뒷사람들이 앞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옵니다. 또 건널목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다보면 건널목 바로 옆 횡단보도에서 판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끼리 자리 때문에 다투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모두 좋은 자리,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아우성인가 봅니다.

자리는 그 사람의 체면과 역할을, 사회적 지위와 능력을 그리고 때로는 이해관계를 나타내고 드러내는가 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세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루카 복음(14,1.7-14)에서 자리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8-10).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리를 청하는 장면이 마르코 복음 10장 37절에 나옵니다. 두 제자는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사람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리 때문에 다툼을 벌인 것입니다.

꼭대기는 단 한 사람만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외롭고 고독한 자리입니다. 또한 무게중심이 불안정하기에 쓰러질 위험성도 큽니다. 그 높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서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정상의 자리는 완성이 아니라 전환점, 반을 왔다는 표지라고 합니다. 내려올 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끝자리, 낮은 자리는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붐벼서 함께 어울리기에 인간다움이 배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식탁 자리에 관한 가르침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춤은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삶의 터에서 내 마음과 태도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실 자리가 있다면 어떤 자리에도 미련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평화가 있을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완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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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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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겨선 안 되는 ‘끝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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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감정 낭비 중의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나와 너 사이의 지배력과 존재감을 비교하며 서열을 매기는 작업입니다. 내 존재가 너에 비해 우월한지, 어렵게 획득한 권력과 지위는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는지,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존재감을 확인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불행한 노동은 누구와 비교되느냐에 따라 만족감이 달라지므로 끝도 없고 승산도 없으며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소모전입니다. 성공하고 출세하느라 진짜 삶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집요하게 따라붙는 비극이며 쓸모없는 악순환이기도 합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집을 마련하셨나이다.”라는 화답송의 후렴으로 요약됩니다. ‘가진 것’으로 타인 위에 군림하고 막대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지지 못해서’ 혹은 ‘가진 것이 없어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고, 그렇게 절실한 노고와 아픔으로 점철된 인생이라 하더라도 그 가난함을 온전히 끌어안고 자기만의 꽃을 피우고 빛이 되는 삶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루카복음에서 이러한 초대는 모두 3번 소개되고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 때에 발생합니다.

첫 번째 초대는 7,36-50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자를 만난 이야기인데, 진정한 정의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구현됨을 알려줍니다. 두 번째 초대는 11,37-54에 소개되며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를 비난하자 전통과 관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언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던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하신 사건(14,1-6) 다음에 등장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될 이들은 바로 그렇게 죄인으로 치부되고 소외되며, 그래서 더욱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희망해온 이들임을 알려줍니다.

■ 초대받은 이들

보편적으로 잔치나 행사에 초대될 때 앞자리 혹은 윗자리에 배정된다는 것은 초대한 사람이 초대된 이의 존재와 권위를 높이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통념을 거부하시고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앉아라.”(루카 14,8-10)고 하십니다. 이는 높은 자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주입하시는 것도, 윗자리에 앉으려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단순하게,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윗자리에 앉게 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방법은 이러합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다만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세상의 처세술과 구별되는 원칙이 내포되어 있는데, 영광과 영예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마련하고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를 초대한 이”가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라고 말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또 한 가지 구별되는 원칙은 하느님의 축복은 그 은총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더욱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14절은 초대의 대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13-14절) 물론 여기에서 부각된 것은 루카가 시종일관 견지하는 고유한 비전, 곧 구원은 가난한 이들과 취약한 조건에 놓여있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다는 주제입니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구약시대와 당시의 통념을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기 하권 5,8은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는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예수님의 시대 조금 전에 활황을 이루었던 쿰란 공동체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 듣지 못하는 이는 공동체 안에 회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통념을 단번에 뒤집어 놓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보답할 길이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답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들은 바로 그 가난 때문에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이들이고,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 누구도 의존할 수 없어서 철저히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이들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난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주인공이 된 그들은 하늘나라의 잔치에서도 당연히 가장 우선적으로 초대되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 겸손한 이들

이러한 가르침은 제1독서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이 문장을 통해 집회서의 저자는 온유와 겸손, 자선을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로 강조합니다. 특별히 본문은 선물로 타인의 환심을 살 수 없는 이들에게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17절)고 하는데 “온유하게 처리”하는 것이 선물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

제2독서는 우리 안에 있는 고유한 존엄과 품격을 선언하고, 이로써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명예나 영광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히브 12,22-23)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천상의 맏아들”이 된 이들이기에 세속적인 처세나 성공에 그다지 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가난과 착취, 모욕과 무시가 일상이 된 삶이라 해도, 자기 존재만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실재이기에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며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속물적 불안과 비겁한 조바심, 구차함이 일상이 되어 아무리 지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매 순간 자신을 남과 비교하느라 정작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은 잃어버린 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지극히 ‘평범’하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며 온전히 자신과 이웃을 보듬고 사는 ‘비범’한 이들을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아나빔)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보잘것없는 하루하루는 성실한 해방의 역사가 되어 누구보다 아름답고 온화한 빛을 내며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됩니다. 아무리 조용하게 끝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최상층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부질없는 권력과 공허한 허세에 빠져있다면 역사는 이들 중 과연 누가 선택된 자들인지를 단호하고 분명하게 식별합니다. 이것이 역사가 감당해온 직무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진정한 투쟁과 개혁은 맹렬한 분노로 핏발선 눈을 부릅뜨며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서로를 보듬는 열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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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가톨릭신문 2019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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