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66.8%
[인천] 하느님의 방식으로 ‘깨어 있는’ 것
조회수 | 782
작성일 | 16.08.02
[인천] 하느님의 방식으로 ‘깨어 있는’ 것

---------------------------------------------------------------

신부가돼서 느낀 것은 신자분들이 너무도 극진히 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두 맨바닥에 앉아도 저는 방석을 주시고, 식사라도 하게 되면 가운데 상석에 앉히십니다. 더구나 식사 때에 앞자리는 어렵다고 다들 피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분들에게 “아유~ 저도 다를 것 없어요. 자, 함께 하세요.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씀드리면, 할머니들은 깜짝 놀라시며, 어떻게 같을 수 있냐고, 다르다고 하십니다. 물론 교회 내에서 삶의 모습으로 신부와 신자가 다를 수 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신부나 신자나 차이가 있다한들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얼마나 겸손한지가, 낮은 자를 높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서는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신부와 신자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부가 신자보다는 빨리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잘못을 해도 저는 신부가 빨리 회개한다고 생각합니다.

회개를 빨리 할 수 있는 이유는 기도와 성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하는 행동이 정당화와 합리화입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 이거죠.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잘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잘못한 것이야 당연히 부끄러운데, 기도하고 성찰하다보면 정말 부끄러울 때가 많은 것은 당연하겠지요. 나를 좀 정당화하고 싶어도 그래도 그분께서 좀 더 노력하길 원하시는데, 매일 ‘저 이렇습니다. 그냥 인정하세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는 “제가 부족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게 됩니다.

바로 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기도와 성찰이 바로 ‘깨어 있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내 시선으로 보면 받아줄 수 있지만,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 우리는 좀 더 노력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시선 앞에 나선다는 것은 나를 그분께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저 살아오던 내 방식대로, 누구나 인정하는 세상의 방식대로가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깨어 있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제가 청년들과 함께 창세기 성서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달이 지났는데, 한 청년이 “신부님, 저 이제 성서공부 그만 할래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갑자기 왜? 힘드니? 뭐가 문제니?” 라고 물으니 “성서공부 하니까 착하게 살아야 될 것 같아요.”라고 답을 합니다. 이 친구의 대답은 하느님의 뜻에 대해 자꾸 알게 되니까 지금의 자신의 삶의 모습이 보이고, 내가 회개해야 할 듯한데, 회개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니까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여러분도 ‘깨어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귀찮고 힘들게 합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루카 2,35) 있듯이,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잔과 함께 기름도 준비하듯이’(마태 25,4) 구체적인 노력들이 필요하고, 이는 성가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의 순간을 행복한 때로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행복이 늘 하던 대로가 아닌 회개하는 순간에 또 변화하는 순간에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회개와 변화는 ‘깨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이제 ‘깨어’ 자신을 살필 때입니다.

---------------------------------------------------------------------

인천교구 최인비 유스티노 신부
450 66.8%
[인천] 허리에 띠를 매고(루카 12, 35.37)

오늘 복음을 읽다보면 “띠를 맨다.”는 부분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준비된 모습으로, 또 한 번은 주인이 종을 위해 “띠를 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띠>라는 것이 주인과 종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임이 분명합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표현에서 우리가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절제된 모습, 준비된 모습, 긴장된 상태, 절연한 의기, 종말론적 기다림, 순종적 태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는 이 <띠>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경외)을 읽어 보고 싶습니다. 시편 84편의 저자가 노래하는 기쁨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주님의 앞뜰을 그리워하며
이 몸은 여위어 갑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제 마음과 제 몸이 환성을 지릅니다.”

주님의 거처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주님의 앞뜰을 벗어날까 두려워하는 그 마음, 주님의 사랑의 거처에서 늘 머물고 싶은 그리움으로 몸이 여위고, 몸과 마음이 하느님에게로 환성을 올리는 시편저자의 노래는 오늘 복음에서 <띠>를 매고 있는 종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누군가 그래야 된다고 시켜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이 읽혀집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미래 보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서 주님의 집에 있고 싶어하는 신앙인의 삶이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떤 종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띠>를 매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등불>을 밝히고 사랑하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는 <띠>는 우리가 좋아하는 <띠>가 아니라 그분이 좋아하고, 그분과 하나가 된 <띠>가 아닐까요? 그분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띠>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주인이 깨어있는 종을 위해 당신 손수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루카 12, 37)이라고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눈을 뜨는 행위라고 합니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이 새로운 눈뜸으로 자기의 심장마저도 하느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 결연한 삶의 행위를 말합니다.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노력이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당신의 손과 발 그리고 몸을 쓰고자할 때 모든 것을 내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어둠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을 등불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주변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띠>를 준비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박요환 요한 세례자 신부
  | 08.02
450 66.8%
어제 라디오를 듣다가 우리가 잘못 쓰고 있는 말에 대해 들었습니다. 우리가 종종 이런 말을 쓰잖아요. “저 형제님은 우리 성당에서 이름난 재원이다.” 어떻습니까?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저는 맞는 말인 줄 알았는데, 글쎄 ‘재원(才媛)’이라는 단어의 뜻이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주가 뛰어난 젊은 남자를 말할 때에는 ‘재자(才子)’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기에 저는 얼른 제 노트에다가 메모를 했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메모를 습관적으로 합니다. 모르던 것, 새로운 것 등등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일상 삶에서 있었던 일들 중에서 특히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했던 일들 역시 제 메모의 주요 소재입니다. 바로 이렇게 메모한 내용들이 제가 이렇게 쓰고 있는 새벽 묵상 글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신부님, 새벽 묵상 글에 어떻게 매일 다른 예화를 그것도 일상 삶 안에서 체험하는 예화들을 넣을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앞서 이야기했던 메모 덕분인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평소에 메모하는 준비가 없다면, 아마 새벽 묵상 글을 13년 이상 쓰기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잘 생각하면 어떤 결과를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가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준비 없이 그냥 편하게 원하는 결과만을 얻고자 합니다. 또한 열심히 준비한 사람들의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그 사실만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고 시기할 뿐입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먼 훗날 죽어서 지옥 불에 떨어지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없습니다. 누구나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그 준비를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또 내 재물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도둑을 막기 위한 준비를 하는 집주인처럼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저절로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준비입니다.

이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그날을 두려움 없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8.02
450 66.8%
[인천]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한여름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권이라는 이천만 인구가 사는 거대한 하나의 도시는 인공위성에서 보면 밤에 불이 꺼지지 않는 하나의 등불과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곳에 사는 우리도 거대한 등불 한복판에서 많은 시간을 지내고 있지만 그 등불 가운데 있다는 인식은 잘 하지 않으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늘 떠올리지는 않지만 밤에도 환한 수도권에 사는 우리처럼 우리 마음의 등불도 무언가를 위해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문득 우리 마음에 많은 방들이 있고 어떤 방에 관하여 행동하거나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마음의 방에 불을 켜둔 것이라고 상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방은 일과 관련된 방이고 어떤 방은 여가를 보내며 노는 방이며 어떤 방은 가족과 관련된 방이고 어떤 방은 잠을 자고 쉬는 방이라고 해봅시다.

방금 여러분은 이 글을 보기 전에 어떤 방에 불을 켜두고 계셨나요? 또는 어떤 방에 불을 자주 켜두시나요?

그렇게 자주 생각하고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들이 여러분에게는 더욱 중요하고 소중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하는데 문득 ‘하느님과 만나는 방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방이 따로 댁에 있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의 방이 따로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 ‘그 방의 등불은 어떨까?’하고 떠올려보다가 문득 ‘아! 어쩌면 하느님을 만나는 등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늘 우리가 지니고 밝힐 수 있는 등불일지도 몰라.’라고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등불을 예쁘게 밝히고 다른 방들도 들어가 봅니다.

그런 묵상 가운데 하느님의 등불이 필요 없는 방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등불을 더 힘차게 밝히기 위해 내 마음의 자리가 어떠한지 더 유심히 보게 됩니다. 때론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희망으로 가득 차기도 한 그런 마음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등불로 더 밝혀주시기를 청해봅니다.

분명 하느님의 등불은 오늘 1독서 지혜서의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당신께 가까이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등불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고 영광스럽게 해주심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돌봐주시며 따뜻하게 해주시어 희망으로 가득 차게 해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등불을 2독서 히브리서의 “믿음으로써”라는 말씀처럼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며, 믿음으로 더욱 활활 밝히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 인천교구 김동건 바오로 신부 2016년 8월 7일
  | 08.05
450 66.8%
[인천]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

사목 현장에서 가끔 만남에 준비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저를 잠시 세우는 만남에는 큰 준비 없이 일단 만나서 얘기를 듣고 나누면 되지만, 약속을 정해서 만나게 되는 경우에는 일단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어떤 만남을 기다릴지 설레기도 합니다.

이처럼 만남에는 기다림이 있고, 준비하게 되며 또 마음 안에 이는 설렘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마는 그 중 설렘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시동키라고 생각합니다. 기대와 설렘이 작용하면 만남에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그런데 반대로 설렘이 없는 만남은 냉랭하고 건조합니다. 만약 미사에 오면서 나의 주님을 만나겠다는 설렘이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설렘이 사라지면서 미사는 형식이 되고 말씀은 문자일 뿐이며 결심들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에 설렘을 가져야 하는지 오늘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은 약속된 땅에 대한 설렘으로 자신이 늙은 나이까지 살았던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찾는 땅이 본고향이었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구원과 영생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리고 참 기쁨을 기다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충실한 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할 때, 그리고 하느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둘 때만 주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세야말로 신앙인의 자세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 받은 것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나는 아무런 재주도 없습니다.”하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탤런트를 주셨습니다. 돈을 버는 재주, 남을 가르치는 재주, 아름다움을 예술로 표현하는 재주, 남에게 기쁨을 주는 재주, 사람을 고치는 재능을 주셨고, 비록 가난하지만 남을 사랑하는 재주 등 우리에게 고유한 탤런트를 주셨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재능을 자신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이웃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신 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탤런트를 잘 가꾸고, 이웃 안에서 끊임없이 나누고 베풀 때 우리의 삶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분을 깨어서 기다리고 있는 삶이 될 것이고, 언제 우리에게 죽음의 심판이 다가오더라도 우리는 떳떳하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하느님의 심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하신 예수님 말씀을 명심하고, 우리의 재능을 자랑하기보다는 겸손하게 자신이 받은 재능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깊게 생각하고, 작은 실천을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매 순간 구원에로 초대받고 있음을 명심하고 깨어 있도록 노력합시다.

----------------------------------------

인천교구 정병덕 라파엘 신부 : 2019년 8월 11일
  | 08.1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619   [춘천]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3] 2484
618   [원주] 천국행 네비게이션  [2] 67
617   [대전] 이제는 내려놓아라.  [4] 2346
616   [청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라.”  79
615   [의정부] 사랑이란, 하느님을 위해 온갖 피조물을 벗어버리는 것  [2] 2483
614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2] 54
613   [제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1] 2393
612   [전주] 신앙생활  115
611   [광주] 삶을 헤아리면서…  61
610   [안동]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5] 2747
609   [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9] 2362
608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제자는 소유를 버리고)  [3] 1880
607   [수원] 참된 사람살이  [4] 2317
606   [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7] 2654
605   [청주] 겸손으로의 초대  [1] 416
604   [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6] 2520
603   [대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낮춤을 배우자  [7] 2233
602   [수도회] 낮은 자리 높은 자리  [5] 1962
601   [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8] 2578
600   [부산] 초대와 윗자리  [7] 2287
599   [안동] 낮아지고 내어줌  [3] 2230
598   [광주]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살자  [2] 2783
597   [전주] 초대  [3] 77
596   [제주] 주님의 작은 몽당연필  88
595   [원주] 겸손한 사람  [3] 2694
594   [군종] 겸손의 덕  [2] 95
593   [의정부] 참된 희망은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3] 78
592   [춘천] 가장 끝자리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2] 2737
591   [대전] 자신을 낮추는 복된 사람들  [3] 111
590   (녹) 연중 제22주일 독서와 복음 (높이면 낮아-낮추면 높아짐)  [5] 2029
589   [수도회] 영혼의 다이어트  [2] 2130
588   [수원] 가보니 참 좋더라!  [5] 2216
587   [서울] 좁은 문으로, 파이팅!  [7] 2674
586   [인천] 구원의 좁은 문  [9] 2679
585   [마산]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6] 2345
584   [대구] 힘써 좁은 문으로 들어가자  [4] 2482
583   [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6] 2577
582   [안동] 돈 - 최고의 유혹,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  [4] 2375
581   [광주] 문(門)이 있습니다!  [1] 2573
580   [전주] 구원을 향한 선택  [2] 87
[1][2][3][4] 5 [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