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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구원을 향한 선택
조회수 | 87
작성일 | 19.08.23
[전주] 구원을 향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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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항상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인생의 전환을 이루는 큰 사건들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적인 것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갖는 것, 그리고 좋은 배우자를 얻어 자녀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큰 사건까지 우리는 윤택한 삶을 위해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펼쳐지는 인생여정의 단계마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계획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66, 18) 라고 말씀하시며 흩어지고 갈라진 당신 백성들을 한곳에 모으시고자 하시는 모습이 소개됩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구원계획은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시는 무조건적인 은총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백성 가운데 표징으로 세우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고 믿는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독서인 히브리서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12,6)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우리를 초대하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슬픔과 아픔이 있지만, 그 열매는 평화와 기쁨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구원의 선택은 곧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시련의 고통을 견뎌낸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주십니다.

또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보다는 구원을 향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이 당신과 함께 영원히 하늘나라에 머무는 구원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구원의 좁은 문은 경쟁률이 높은 문도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는 문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르므로 서둘러서 구원에 이르는 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윤택한 삶을 위해 선택하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하려면 신중하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사람들이 볼 때만 길게 기도하고 율법학자들처럼 모세의 법만을 지킨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좁은 문은 그분이 걸어 들어가신 길이기에, 우리가 죄와 교만을 벗어버리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좁은 문을 선택할 때만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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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정현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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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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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일생 중에 깊은 절망적 상태에 빠질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리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항상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바로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과연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역경과 만납니다. 그 역경을 우리는 ‘苦悲(고비)’라고 부릅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는데…”하고들 말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삶의 고비’를 넘기면서 성장합니다. 고비가 닥칠 때마다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가노라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고생을 겪지 않고 삶의 지혜를 배우고, 깨닫고, 용기를 내고,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히브12,7). 특히 믿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 인생의 고비를 다시없는 시련의 기회라 여기면서 보다 굳센 믿음과 희망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혼란에서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역경을 역이용하여 행복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물어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 안되겠지요?”(루카13,23). 예수님께서는 救援(구원)받을 사람들이 적거나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에로 나아갈 결단을 촉구하시며 특별히 의미심장한 몇 가지 상징적 개념들로써 그 결단의 절박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그 문이 ‘닫혀지게 될 시간’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짊어져야 할 과제의 어려움과 절박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선을 행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서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그렇듯 위대한 선물, 하느님의 나라, 행복, 구원, 생명을 앞에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으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이글거리는 태양 밑에서 곡식이 알알이 익어가고, 불속에서 쇠가 강하게 연마되고, 인간은 삶의 고비에서 성숙해집니다. 생명과 도움의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굳건히 믿으며, 구원을 향하여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갑시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 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카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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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오성기 신부
  |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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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구원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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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에서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 또는 ‘구원의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어도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한 생활이니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이 실제로 좁은 것은 아닙니다. (적은 수의 사람만 받아들이려고 하느님께서 문을 좁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그 문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성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민족들의 보화와 보배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5-27).”

누구든지 들어가기를 원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노력의 과정이 쉽지 않다는 뜻에서 ‘좁은 문’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을 보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들이 스스로 ‘멸망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다음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지만 들어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2) 자기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3)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라시는데,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4)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격만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반대로, “자격이 없으면 아무도 못 들어간다.”가 됩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에서 ‘경쟁률’을 연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하늘나라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에는 경쟁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 일은 ‘정원제’가 아니라 ‘자격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갈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이 다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인 성녀로 공경하고 있는 분들은 그 나라에 이미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보다 못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어느 쪽이 더 많을지는 모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 정도의 뜻일 것입니다. 묵시록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나중에 그곳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들어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못 들어 온 경우도 있을 것이고, 못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들어와 있어서 놀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에서 다음 대화가 연상됩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감수하겠느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제 생활이나 수도자 생활이 좋게 보여서, 또는 신학교 생활이나 수도원 생활이 좋게 보여서 지원했다가, 실제로 살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겉으로만 보는 신앙생활과 실제로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신앙생활은 ‘결과’를 생각하면서 힘든 ‘과정’을 참고 견디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과정’의 어려움만 보고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하늘나라의 문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 재미없고 지루한 주일미사 참례를 하는 것과 시원한 바닷가에서 피서를 즐기는 것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라면 주일미사를 선택할 것입니다. 만일에 주일미사를 포기하고 피서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좁은 문’을 버리고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주일미사 한 번 빠지고 피서 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멸망’을 당하겠는가?”, 또는 “살면서 한 번쯤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거의 항상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에서 작은 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 작은 유혹에 한 번 넘어갔다가 어느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너무 멀리 벗어나 있어서 되돌아가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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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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