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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참된 희망은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조회수 | 78
작성일 | 19.08.27
[의정부] 참된 희망은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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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이나 푸름을 자랑하는 산에서 나비를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지친 영혼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영혼의 고무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나비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 한권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한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들처럼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여기, 저기 산처럼 서로를 짓밟고 오르다가 결국에 꼭대기에서 본 것은 아름다운 날개를 자랑하는 나비였고, 자신이 할 일은 그 욕심의 산에서 내려와 나무에 매달려 나비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임을 깨닫고 그렇게 하여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다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자신의 능력이나 위치 등을 잘 드러내야 이 세상에서 대우받는다고 생각하며 대부분 살아갑니다. 그래서 경력이나 학력을 위조하면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14,11)라고 하시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현세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쫓는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참된 겸손의 의미, 즉 “크신 주님의 권능이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심”(집회 3,20)을 깨닫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 희망은 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받는 것 보다는 남에게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을 늘 바라며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부활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이웃들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맞이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기뻐하기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참된 희망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항상 기도하며 살아갈 때, 애벌레의 삶을 벗어나 하늘을 나는 나비처럼 세상의 굴레를 벗고 자유롭게 주님을 찬미, 찬양할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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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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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겸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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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참으로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높고 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그들은 진정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일까요? 하느님은 오늘 진정한 가치의 기준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 각자에게 다양한 소임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시고 허락하신 능력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관리자로서 이 세상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일에는 그 자체로 잘남과 못남이 없고 높음과 낮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단 한 가지 모두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판단력을 허락하신 하느님인 것이고, 하느님의 뜻일 뿐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겸손이 진정한 잘남과 높음의 기준이 되는 소중한 가치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겸손이야말로 감추어진 나를 들어 올리는 최선의 방법이고,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임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럼 진정한 겸손이란 어떤 것일까요? 겸손(Humilitas)이란 말은 라틴어 ‘humus’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흙, 땅, 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땅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처럼, 좋은 것, 나쁜 것, 싫은 것 구분 없이 자신에게 찾아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모든 만물을 정화하여 성장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겸손의 극치인 “예수님의 강생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듯, 겸손의 길은 이런 땅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라고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진정한 겸손의 자세가 땅이 온갖 것들을 구분 없이 받아들이고 정화시키는 것처럼,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전적인 수용과 베품과 나눔의 자세로,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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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준동 마르띠노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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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뭘 마이 멕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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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잔치를 베풀 땐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말씀의 꼬리를 물고 엉뚱하게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온 늙은 촌장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뭘 마이 멕여야지!”

미사는 제사입니다. 물론 강조점의 이동에 따라 ‘식사’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실상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이 제사나 미사이거나 모두 ‘뭘 많이 먹이기 위한’ 겁니다.

고대문명으로부터, 고대문명에서 특히 ‘제사’는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일이 그리 용이하지 않았던 탓에, 개인이나 소수 독식은 허용되지 않았고, 단백질 섭취는 부족의, 혹은 그 문명 전체의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동물 또는 가축을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사제(제사장)는 ‘신법’에 따라 이를 공정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사’라는 신성한 행위에 부족 전체가 참여하고 함께 나누어 먹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굽고 나누어줍니다. 제 몫이라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굳이 고대문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른들의 ‘지나간 옛 마을잔치’만을 떠 올려 봐도 압니다. 거기에도 소외된 마을 사람들은 없었을 터이고 아마 지나가던 나그네들도 한자리 차지하고 속을 채웠겠죠.

우리는 매주 미사 안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그 귀한 ’성체’를 나누어 먹습니다. 세상 밖에 제사에선 흉내 낼 수 없는 제사이지요. 물론 미사는 유일한 것이니 단지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봉헌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조차 흡족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하나요? 여전히 늘 배가 고프고 속이 ‘허’합니다. 한껏 받아 먹고 흡족한 얼굴로 성전 마당을 나서는 분들을 볼 수 없다는 게 왠지 꺼림직합니다. 젯상에 먹을 게 시원찮았는지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합니다. 때론 ‘부조’를 노린 부실한 잔칫상을 차린 거 같아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뭘 많이 멕여 보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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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염동국 루카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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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자세,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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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재산이 많을수록 아는 지식이 많을수록 높은 사람 대우를 받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낮은 사람 대우를 받기도 하지요. 높은 사람으로 대우 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재산도 늘리고 지식도 넓혀서, 높은 사람으로 대우 받고자 애씁니다. 재산이든 지식이든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 겸손이야말로 소유보다 더 가치 있다는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던 때, 도대체 알아듣기 힘든 말로 강의하신 교수 신부님입니다. 그분 수업은 두 시간 내내 강의록을 읽는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를 이런저런 신학이론들로 설명하셨는데, 저는 그 내용을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매주 수업마다 주어진 두 시간 안에 주제에 대한 결론을 내셨기에, 두 시간 수업 마칠 즈음 저는 결론이라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런데 수업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다.”라는 게 결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거면 아예 얘기를 꺼내지 말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결론이 큰 울림으로 마음에 남았습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한 끝에 그 진리 앞에서 겸손되이 모르겠다는 고백은 결코 무의미한 실패의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주님께 드려야 하는 최선의 자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윗자리를 고르려고 아웅다웅 소리 없는 눈치 싸움을 하던 이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그들을 바라보던 예수님의 시선은 어땠을까요? 더 높은 곳에 오르려 많은 것을 가지려 애쓰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낮아지는 겸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한 순간 하나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교만하게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뽐낼 때, 특히 그렇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 못하는 반면,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무엇을 모르는지는 압니다. 무한한 하느님 진리와 유한한 인간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겸손한 사람만큼 하느님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작은 이를 통해 진리를 알려주신 예수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겸손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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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종경 비오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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