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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자
조회수 | 2,095
작성일 | 07.01.24
사랑, 그 영원한 약속

서른 살에 이미 독일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었던 슈바이처 박사는 그때 철학과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던 학자였습니다. 또한 바흐 음악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세상의 잘나가던 모든 명예를 등지고 뒤늦게 의학을 공부해 아프리카 밀림의 원주민들을 돕기 위해 봉사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는 인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살리는데 앞장섰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생명과 사랑에 대하여 이같이 썼습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지녔기에 존중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보호하고 높이는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나는 살아갈 때 하나의 나뭇잎이라도 공연히 따버리지 않으려 하였다. 한 떨기의 들꽃도 그냥은 꺾지 않는다. 기어 다니는 벌레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여름밤 등불 아래에서 일할 때 많은 날벌레들이 불꽃에 날아들다가 떨어져 책상 위에 뒹구는 것을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무덥더라도 창문을 닫고 방안에 앉아 있는 쪽을 택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하여 한 마디로 논하시기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 1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오늘 사랑의 찬가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약속인 사랑을 가장 높은 가치 위에 두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의 선물인 사도직분, 예언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위에 더 큰 은총의 선물을 열심히 구하라고 하면서(1코린 12, 28~31 참조) 가장 뛰어난 길로 사랑의 길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사랑의 길은 천사의 언어나 모든 신비와 지식을 뛰어 넘으며, 산을 옮길 큰 믿음은 물론,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힘주어 가르칩니다.(1코린 13, 1~3 참조) 그리고 지고한 사랑의 자세에 대하여 강조한 뒤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 13)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

사랑은 결코 이기적이거나 편협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구원관이셨습니다. 그것이 이 지상 공생활 동안 끊임없이 추구하셨던 예수님 삶의 목표이셨습니다.

세상은 넓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리 넓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주 나만 알아주어야 하고, 나만 돋보여야 하고, 내 가족, 내 친척, 내 고장, 내 나라, 내 종교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편협함에 맞서 싸우십니다. 이방인 여인 사렙타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경우를 들어가시며 구원은 이미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그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작고 편협된 마음에는 구원이 없으며,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는 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폭력 운동의 선구자인 인도 독립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도 자신들을 괴롭히던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자신은 힌두교인 이었지만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온 몸으로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빛이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리스도를 믿는 박해자들인 백인 형제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대들이 나를 투옥해도 나는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 우리의 스승님은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깃발은 하느님이시니 결국 어느 날엔가 사랑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세계에서 차별받고 사는 모든 민중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두 배의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넓은, 보편된 마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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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예언직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빵을 좋아하고, 명예와 권력을 좋아하며,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빵을 약속하지 않으며, 명예와 권력을, 현실의 안일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그것이 사람들에게 쓰고, 신 맛이더라도 용기있게 수행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용기있게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된 예언자느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에게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박해와 고난속에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당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조용한 삶을 들쑤셔 놓고,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을 전화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치루어야 할 댓가를 지불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마저도 고향과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는 사실은 예언자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고향에서 자라난 예수님이 선포한 보편적이고도 새로운 것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개심을 품고, 배척하며 심지어 살해하려고까지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말씀에 부응하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지, 나자렛 사람들처럼 폭력을 사용해 내쫒치는 않더라도, 그분께 어떤 제약을 가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예언의 직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외치며,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면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헤로데 왕의 칼부림으로부터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배척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도 이 고난의 예언직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 송문식 베드로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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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마음, 그 맛!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어 천국 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천국이 어떠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어디에도 천국을 다녀온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우리 마음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그 마음을 한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천국을 가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일생에 한 번쯤은 천국의 마음을 가져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맛을 알고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떤 때, “아! 이것이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구나!” 할 때가 있다. 그 맛을 느끼는 것, 이것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체험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당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얘기하지는 않으셨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철저하게 신뢰와 사랑을 체험하였기에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 맛을 아신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어려웠기에 어머니와 자신의 앞날을 저주하며 하느님께 불만과 저항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을 따라야 할 운명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다고까지 고백하기에 이른다. 우리 어렸을 때 “옆집 엄마는 잘해 주던데” 하며 투덜거리면 대뜸 “그럼 그 집에 가서 살어.” 하며 삐져나온 입을 쑥 들어가게 해 주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의 단순함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강한 하느님 체험은 단순함과 자신의 연약함에서 어우러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였던가?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는 말이다. 좋은 일은 단번에 되지 않고 많은 시련이 있고 나서야 된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사랑의 체험 즉 사랑의 실천은 많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랑과 희생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는 은총이 되었다. 또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사랑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이면에는 고통이 있었음을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사랑의 찬가를 통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서 예레미야 예언자와 사도 바오로 스스로도 고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달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냥 자기 삶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끝까지 살아간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시지만, 고통의 대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다 치러 주셨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에서 주님께 매달리는 것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고통은 신비이다. 신비인 것을 어찌 우리 인간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예언자 예레미야와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고통을 수반하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였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빠져 보자. 아멘.

▶ 최일호 라우렌시오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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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예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

나이가 듦에 따라 늘어나서 보기 싫은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거울, 체중계, 약봉지입니다. 살도 찌고, 주름과 흰머리도 늘고, 약도 많아졌습니다. 자꾸 퍼내야하는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깨달은 고백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젊었을 땐 마구 모아서 그것을 바라보며 즐겼고, 60살에서부턴 내 것을 남에게 주는 데서 기쁨을 찾았고, 70살이 되고야 정말 가치가 있는 물건이 세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틀니, 안경, 성경’ 이 그것입니다. 맞습니다. 내 것인 것이 하나도 없고 영원한 것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후하게 퍼주어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워 하지만 이내 돌변해 버립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카파르나움에서 시작하여 다른 곳에서는 기적을 행해 왔으면서 이곳에서는 어떤 기적도 행치 않으셨다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교만한 허영심에서 비롯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와야 하는 편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보증은 혈육의 유대와, 선택된 백성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옳은 마음의 지향에 있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도 자기 백성이 아닌 이방인 여인 사렙다 마을의 과부를 엘리사도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나병에서 고쳐주셨습니다. 나자렛 사람들도 똑같은 형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세속의 고집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없어서 소란을 피우고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사랑이 증오로 열성이 냉담으로 갑자기 돌변하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모든 이에게 열려있고 자발적인 영성을 일으키게 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깊은 마음의 심원한 요구에 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이 소식을 제 마음대로 억측하고 판단을 합니다. 물질적인 관점, 때론 사회, 정치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이들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특유의 종교적인 윤리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기준은 하느님의 말씀을 재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처음의 열광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증오로까지 바뀌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일 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선물을 선사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춘천교구 윤헌식 F.하비에르 신부 : 2016년 1월 31일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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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 4장)에서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요한 4,26)

아주 오래 전, 이 말씀을 듣고 나와 말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대하 고 있는지 오랫동안 묵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하고 나만 잘하고 있고 선하다는 마음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나 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었고, 한 때는 나의 모습을 반성하고 나와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임을 생각하려고 했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들은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 말씀이 그때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성경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시는데 아직도 내가 가진 알량한 지식과 경험으로 말씀을 흘려보내고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없애 버리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고 하는데, 어떤 말씀이 어떻게 내 삶 에 흔적을 남겼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은 나를 살리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오늘 우리가 들은 성경 말씀이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지 아니면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선입견으로 하느님을 없애려 하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시편 9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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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용영일 F. 하비에르 신부 : 2019년 2월 3일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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