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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조회수 | 2,304
작성일 | 07.07.27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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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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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아쉬운 것도 많고 필요한 것도 많은 우리의 일상에 위로와 힘이 되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간절히 기도하며 청했던 일들이 허망하게 끝나 버리는 경험을 합니다. 아프지 말아야 할 사람이 아프고, 시험에 합격해야 할 사람이 탈락하고, 최선을 다해 추진하던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는 경우들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때로는 신앙을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기도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기도를 마치 자동판매기에서 물건을 사듯이, 특정한 기도를 정해진 양과 순서대로 바치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과 벌이는 겸손하면서도 끈질긴 청원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창세 20-32 참조),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인간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형적인 청원기도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임을 전제합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하느님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청원기도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청원기도를 통해 하느님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고백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기도’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 보호와 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뒷부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청합니다. 말하자면 나의 기도 지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향들이 우선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먼저 하느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자신의 뜻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 기도의 근본정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해로운 “뱀”이나 “전갈”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실패와 시련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며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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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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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포괄하는 핵심 내용을 청원의 형태를 통하여 전해 줍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지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주님의 기도에 관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3구절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루가 11,3)라는 내용입니다. 청원자는 ‘나에게’ 필요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 자신만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매일의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형제들을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난을 열망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배제한 이기적인 행복 추구는 신앙의 눈을 멀게 합니다.

둘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루가 11,4)라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그의 모든 행동과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고, 결국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마르 11,25)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가 11,4)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듯 유혹에 빠뜨리시지 않습니다. 사목 서한은 이 사실에 대해 명확히 언급합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야고 1,13-14).

우리는 자신의 내면 또는 외적인 요인에서 기인하는 크고 작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는 유혹에 지배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곧 유혹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기 힘든 유혹과 시련의 굴레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유혹이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도우심에서만 가능합니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13).

성령은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루가 11,9 참조) 할 행복이 하느님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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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11,1-13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은 신약성서 전체의 특징입니다. 이 귀절처럼 기도나, 설교나, 기독교 문학에서 많이 쓰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먼저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의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역사의 무대 첫 등장으로 갈릴리에 가셨을 때 제일 먼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르코 1,14)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자기에게 지워진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가 4,43 ; 마르 1,38)

루가는 예수의 활동에 대하여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가 8,1)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느님의 나라'란 뜻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 귀절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몇 가지 파악하기 힘든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과거의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마태 8,11:루가 13,28)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를 과거의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는 또 왕국을 현재의 것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루가 17,2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 있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그는 또 하느님의 나라를 미래의 것으로, ‘주의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가 동시에 현재, 과거, 미래의 것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주의 기도'에 나타난 두 가지 기원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히브리 문체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전문적인 용어로 평행법이란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같은 것을 두 차례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일방적으로 말하고, 다음에는 같은 일을 다른 방법으로 반복하고 보충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어느 귀절이든 이 평행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시편'의 거의 대부분 귀절은 중간에서 둘로 나누어집니다. 고리고 뒷귀절의 반은 거의 처음 반 귀절을 반복하고, 보충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편 46,1)

“만군의 야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로다" (시 편 6,7)

“야훼께서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편23,1-2)

그러면 이 원리를 주의 기도의 두 기원에 적용시켜봅시다.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두 번째 기원이 첫 번째 기원을 설명 보충하고, 명백하게 했다고 한다면, 이때 우리는 천국의 완전한 뜻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완전히 행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히 행해지는 사회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해서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했던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있던 것이요, 지금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하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있는 자이며, 또한 장래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할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히 오는 것은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밝혀진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국민 어떤 국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 개개인에 관한 것입니다.

실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제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나의 뜻, 나의 마음과 나의 생활을 하느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느님 앞에 개인적인 복종을 할 때에만 하느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함세웅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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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기도의 정의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이다. 비록 원시인이라 하더라도, 초자연적인 분께 공포 중에, 또는 위험 중에 본능적으로 기도를 바쳤다. 기도는 또한 인간의 심층에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기도 없이 인간에게 은총과 구원을 주시 지 않는다.

인간은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하며, 필요한 은총을 받고, 하느님과 계속적인 유대와 상통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우리는, 하느님과의 부자(父子)관계를 지속시키는 기도를 생활화하여 야 한다.

기도해야 할 때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에페 6,18) 또한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항상 기도를 바쳐야 한다. 인간이 매 순간마다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다. 특별히 다음의 경우에 기도를 해야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개어 기도하라" (마태 26,41)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죄로 유인하는 유혹 중에, 죄 중에 있을 때, 타인에게 사랑의 실천을 필요로 할 때, 또한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 할 때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의 형식과 목적

기도의 형식은 정신적인 기도와, 기도서나 또는 꾸며서 입술로 바치는 기도가 있다. 정신적인 기도에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있으며, 특히 관상기도는 기도 가운데 가장 탁월한 형식의 기도이다. 기도의 목적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흠숭이다. 이는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분들이기에 찬미를 드린다. 그러나 흠숭을 드리지는 못한다.

둘째, 감사를 드려야한다. 나의 존재와 여러가지 은혜를 풍부히 베푸심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셋째,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또는 궐함으로 잘못한 죄에 대하여, 뉘우치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넷째, 우리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또는 현세적으로 필요한 어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기도라고 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것을 우선 생각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전체 목적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그 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청하기 위해서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청원의 기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고치고, 따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더욱 상세히 뒤에서 다루겠다.

기도는 누가 하는가?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기에, 지성을 갖고 있는 존재만이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기도하실 수 있지만, 하느님으로서는 기도를 바칠 수 없다. 성모 마리아, 천사들과 하늘나라의 성인들은 기도할 수 있으나 악신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기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특히 죄인들과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은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산이와 죽은이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다. 특히 가족과 친척을 위하여 기도를 바쳐야 한다. 또한 지옥에 있는 영혼은 아무런 기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기도해 야 한다.

청원기도의 적합한 대상

사도 야고보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하셨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청하는 것이 아니다. 구하더라도, 타당하고 선한 것을 구해야 한다. 비록 타당하고 선한 것이,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라도 상관없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갈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라면, 청하기에도 타당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현세적인 어떤 이익이나 편리도,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영신적인 면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다. 건강한 몸, 상처의 치료, 사고로부터의 안전을, 좋은 직업이나, 안락한 가정 등,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도의 지향일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신 사정이나 구원에 도움이 될 때, 그러한 청을 들어주신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는 청하는 것이 영신적인 면에 도움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것이 우선적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덕이 향상되고, 악습을 고치고,, 유혹을 이기고, 은총을 받고, 항구하게 성사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인 여건이다.

청원의 기도를 바칠 때 바치는 첫째 대상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다음으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 그리고 복자들께는 전구를 요청하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생각이나, 원의까지 알고 계시지만,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은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생각이나 원하는 것을 모른다.

필요한 조건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먼저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기 주실 수 있고,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둘째,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만이 약속하신 행복을 보장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셋째,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는, 보다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의 정신을 갖고 청하면서도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한다. 즉 자기 구원에 해가 되는 것을 청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드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 주신다"(잠언 3, 34). 또한 항구하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 과부의 번거로운 청을 들어준 판관의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한다(루가 18,1-5).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기도

“우리의 찬미가 주께 필요하지 않은 줄 아오나, 주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감사 드리오니, 우리의 찬미가 주게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유익이 되나이다" (감사송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자체로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찬미와 감사가 영광을 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알고 계신다. 즉 우리가 무엇을 청해서, 우리의 요구를 일깨워 드릴 어떠한 기도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이나, 지향을 바꾸는 효과를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한 부분이다." 이는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이다. 가령 하느님께서 어떤 농부에게 곡식을 수확하도록 계획을 세우셨다고 하자, 그 수확은 농부의 경작과 적당한 햇볕과 비와 좋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하여 기도를 바친 결과로써 계획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요소만 제거되어도 수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수확을 하기 위하여, 필수요소인 기도를 그의 계획안에 넣으셨기에, 기도가 없었다면 좋은 곡식을 수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계획을 세우시거나 지향하실 때, 인간의 기도를 그 섭리 안에 내포시키신다.

전례와 기도

전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교회의 모든 공적 경신 경배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로 창조하시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신비체를 이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면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공동체를 이룬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전례란 바로,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며, 이 기도를 통하여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 전례는 반드시 교회의 권위로부터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교직자가 교황청으로부터 인준한 전례서에 따라 거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성부께 십자가상에서 거룩한 제사를 드리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 제사의 힘으로 구원되기를 원하셨다. 고로 예수께서는 그 거룩한 제사를 기념하여 그 예를 계속하기를 원하셔서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전례행위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제사와 성사 그리고 성무일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전례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미사 성제이다.

그 외의 모든 기도는 신심행사에 속하는 것들이다. 로사리오 기도, 구일기도, 십자가의 길, 성모나 성인을 공경하는 기도, 또한 성인 열품도문 등 비 전례적인 개인적 및 공적인 기도들도 있다. (여럿이 바치는 경우라고 해서 전체 교회의 기도는 아니다. ) 하느님께서는 전례 중에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간은 그 전례를 통하여 응답으로 말씀과 은혜를 받아들이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전례에 참여하여야하며, 내적 준비를 합당하게 하여야 한다.

결론

신자들을 화초에 비한다면, 기도는 물이나 공기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화분의 화초라도 물과 공기가 없으면 시드는 것과 같이, 기도 없는 신자생활이란 불가능하다. 기도는 모든 신자들 생활의 중심이다. 기도하기를 그치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끊는 것이고, 신자 생활을 원치 않는 증거이고, 은총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자녀임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서울대교구 안상인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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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잘하는 법

누가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일까요? 머리 좋은 사람. 공부를 잘할 수 있지만
좋은 머리 믿다가 낭패볼 수 있습니다. 공부할 환경이 잘 갖춰진 사람.
그것도 조건이 좋지만 간절함이 없어서 마지막까지 잘할 수는 없습니다.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래서 책상에 제일 오래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오래 하는 공부가 제일 잘하는 공부입니다.
누가 기도를 제일 잘하는 신앙인일까요? 오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은 오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역으로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꾼이 됩니다. 기도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의 양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중단없이 끈질기게 간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줄곧 졸라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래 기도하라는 초대입니다.
세상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실 앞에
오래 머물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남상근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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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본당의 한 청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기업 중 손꼽히는 곳에 들어가 순탄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울증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병세의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상태가 나빠져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대인 관계마저 힘들어져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그때부터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병은 잘 낫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어 실망한 나머지 신앙과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어 그때부터 기도의 내용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주님! 제 병이 낫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 병을 극복하는 힘을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청년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기도 내용을 바꾼 이후로 저는 몸과 정신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신부님께 찾아올 수 있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다시 나빠질 수도 있지만 주님이 힘을 주시면 저는 견딜 것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래 기억되는 만남이었습니다. 그 청년을 만나고 나서 저는 믿음이란 무엇인지, 기도란 무엇인지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기도의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신앙인이 지녀야 할 참다운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자비로운 분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은 사랑할 수 있는, 진실하게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면 하느님께 매달리며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면 사실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땐 다른 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와 힘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인이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갖고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이처럼 기도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행복합니다.

명동 지하성당 입구에 걸린 문구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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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감히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인간은 하느님의 친구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과연 피조물인 인간, 때로는 동물만도 못하다고 손가락질당하기도 하는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일까요? 친구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는 친구가 있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친구가 있고,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친구도 있습니다. 동창생 친구도 있고, 취미 생활을 함께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깊이 있게 사귀는 친구도 있고, 배신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정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서 그 우정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 밑에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모입니다. 그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친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 성경 탈출기에 보면(24─33장) 하느님께서 모세를 친구로 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고 있을 때, 산밑에서 그 백성은 우상인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사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진노하시고, 계약은 깨지고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서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나는 너희를 더는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오늘 복음서에서 나오는 이 친구는 졸라대는 친구입니다. 예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를 맞이하는 친구는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잠자리에서 일어나 불평하지 않고 빵을 챙겨 주는군요.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사실 저는 평생 주님께 면목없이 졸라대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제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2항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콜로 1,15; 1티모 1,17 참조)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탈출 33,11; 요한 15,14-15 참조), 인간과 사귀시며(바룩 3,38 참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친구로서 하느님과 말씀을 주고받으며 사귀는 사이이며, 하느님과 인간은 더불어 하나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느님께 단순하고 전적인 신뢰심으로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흔히 수제자라고 말하는 베드로는 불리한 상황에서 친구인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잡아떼면서 배신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친구들 가운데 가장 믿고 천국의 열쇠도 맡긴 친구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성실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친구를 찾아가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확답을 받으면서 변함없는 우정을 세 번이나 확인하십니다(요한 21,15 참고).

그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친구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친구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도 있습니다. 극적인 과정을 거쳐 참 우정을 간직하게 된 친구 베드로와 달리, 유다는 절망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끝내 버렸습니다. 끝까지 우정에 기대면 사람은 깊은 어둠을 이겨내고 살아납니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과의 우정에 한계가 있다고 여기거나, 하느님 앞에서 자기 체면만 차리고 희망을 포기하면 어둠 속에 묻혀 생명을 잃고 죽고 맙니다.

이런 친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친구, 하느님의 친구가 되어 감사하면서 정성껏 이 기도를 바쳐야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갖습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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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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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첫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하여 그 주민들을 쓸어버리시려 하자 아브라함이 그들의 용서를 청하는 장면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의인 50명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10명까지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데, 아브라함은 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과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과 대화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모습에서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을 막고 싶은 아브라함의 간절함을 읽어내야 하겠습니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는 십자가 사건을 대속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없애 버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용서를 뜻한다는 것이 바오로의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요청한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위해 대신 간구하고 희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의 질문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그는 올바른 기도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꼼짝없이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실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일까요? 그에 대해 복음서는 명확히 밝히지는 않습니다만 그 질문에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올바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마지막으로 성령을 청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올바른 기도란 우리들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청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듣게 됩니다. 이 깨달음을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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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 2019년 7월 28일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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