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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간절한 기도
조회수 | 2,001
작성일 | 07.07.27
수도원에 입회한 지 10년 정도 지난 때로 기억합니다. 제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많이 노력했지만 노력만큼이나 갈등이 많았던 시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던 시기, 더구나 최종 선택을 해야 하는 종신서원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다가오던 스트레스, 거기다 지극히 소심했던 성격은 제 영혼과 육신을 완전히 소진시켰습니다. "이렇게 소화가 안 되고, 통증은 계속되고 혹시라도 큰 병은 아닐까? 아직은 좀 더 살아야 되는데" 하는 걱정에 몇번이나 내시경을 해봤지만 별다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다 보니 몸이 맛이 가고, 몸이 맛이 가다 보니 정신도 약간씩 맛이 간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공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또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수도생활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소문을 통해서 제 근황을 알게 된 어머니께서 하루는 큰 가방을 들고 수도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수도생활도 좋지만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겠니?"

당시 너무도 심신이 지쳐있던 저는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만큼 노력했는데, 시대가 나를 안 받쳐주니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귀향열차를 탔습니다.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10년 세월, 청춘을 바쳤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가는 데까지 한번 가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오기가 은근히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는 자주 다니던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하느님, 정말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수도자로서 봉헌된 삶, 봉사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협조 안 하시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대들면서, 때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면서, 때로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나?' 심각하게 반성하면서 간절한 기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 제 안에 남아 있던 에너지 전부를 기도에만 다 쏟아부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절실히 기도하던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고 느껴지던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제게 건네셨습니다.

"이제야 알겠느냐? 네게 시련을 보낸 이유를. 네겐 아직도 정화와 단련이, 바닥 체험과 거듭남이 필요했었단다. 이제 안심하고 다시 한번 새 출발해 보거라."

이토록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그 당시 고통의 세월을 가장 큰 선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보내시는 이유는 보다 절실한 기도, 보다 열렬한 기도를 통한 새 삶을 준비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하늘에 닿는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 한 차원 도약을 위한 것, 영적인 삶을 위한 것,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을 위한 것일 때 하느님께서는 100%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드리는 간곡한 기도는 절대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진다든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비록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간절한 기도는 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실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어렴풋이나마 하느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지나치게 이기적인 기도, 너무도 허무맹랑한 기도였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정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서서히 자신의 기도를 정화시켜 나갑니다. 기나긴 정화 과정을 거친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결국 그 기도는 보다 순수한 기도, 지극히 이기적인 바람이 배제된 기도, 세상을 위한 기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이기에 100% 이루어질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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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2004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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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11,1-13

기도 :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따라서 본 기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다. 기도는 이처럼 늘 찾아오는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있을 때 가능하다.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도 내가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참여'의 개념이다. 기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은혜로운 삶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숨결을 가진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순간은 나그네인 우리의 순례가 위안을 받는 때다. 이것은 살아있는 선물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그 느낌을 알아듣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으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하나의 신비다. 따라서 기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신비 안에 어느 정도 미리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도하는 것은 짐이 아니다. 기도는 선물이다. 기도는 억압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따라서 기도는 기쁨이다. 그러나 이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신 안에 마땅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먼저 깊은 내적 침묵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만을 찾는다면 기도는 참된 것이다. 우리는 적나라한 마음으로 자기를 온전히 봉헌할 준비를 하고 하느님의 뜻과 우리를 동일화해야 한다.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주님의 정원을 통해서 표현한다. 여기서 주님의 정원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즉 천주교회를 상징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영적체험인 '성'(城), '영혼의 성'은 패랭이꽃들이 향기를 내기 시작하는 꽃들과 나무들이 성장하는 '정원'없이는 완성 될 수 없다.

이 성과 정원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녀 데레사는 그 찬란함을 서술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고 말한다.(영혼의 성 1궁 1장 1).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 안에 하느님의 상(像)의 폐색(閉塞)은 하느님의 아름다운 정원, 그 깊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가린다. 원죄와 그리고 본죄는 우리의 자아를 좀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세상이 하느님의 정원을 완벽하게 직관하기에는 이미 그 투명성을 잃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좋은 정원사가 되어 주님이 정원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주님이 자주 이 정원에 즐기려 오시고 이 꽃들 사이에 쉬시도록 해야 한다.(자서전 11,6) 마음의 정원에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꽃들을 피우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도 높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 안에 사랑을 증거 하신 것을 상기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 크신 사랑의 담보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과격한 사랑을 상기합시다.(자서전 22,14)

갈멜 남자 수도회 박병해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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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11,1-13)

<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많은 신자들이 기도와 관련해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느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하느님께서는 끝끝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요?”

신앙의 선조들도 우리와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예언자로서 한평생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던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해도 내 기도소리에 귀를 막아 버리시고 내 길에 마름돌로 담을 쌓으시며 내 앞길을 막아 버리셨네.”(애가 3장 8-9절)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기로는 시편의 저자도 처지가 비슷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자신을 버리셨다며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시편 22장 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 한 가지는 우리의 위대한 대 예언자들은 기도의 응답 유무와 상관없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정성을 다 쏟아가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도가 지닌 문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바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바치고 있는 기도에 대한 정화와 쇄신 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기도에 대한 응답 여부 보다는 하느님과 나 둘 사이에 오고가는 인격적인 만남, 그분과의 진솔한 대화, 일상적인 소통, 그 결과 선물로 다가온 사랑의 삶이 곧 기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도하는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자판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위험스런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때로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때로 한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사고방식, 논리,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마다 우리는 청하는 바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들어주시지만 어떤 것은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 작업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 기도의 질, 기도의 순수성이 진정 그분 마음에 드시는 것들인지 아닌지 성찰하고 식별해가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와 비례하는 성령의 활동”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지쳐나가 떨어지곤 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이 하느님께 간절히 청한 것은 시시한 것, 가벼운 것, 들어주셔도 좋고 안 들어주셔도 좋은 그런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들, 때로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잠까지 설쳐가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끝까지 붙들어보려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매달렸으며,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목숨을 다해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자비하다 못해 참담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며, 하느님이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시라며 어찌 이리 끔찍한 현실에 맞닥트리게 하시는지, 정말이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간절히 청할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인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안에 벌어지는 모든 희로애락, 흥망성쇠를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공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패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건강과 젊음에 행복해하지만 언젠가 주실 병고와 죽음도 기꺼이 수용합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혼 안에 충만히 현존해계십니다. 특별히 삶의 중요한 여러 단계 안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세례성사 때, 견진성사 때, 혼인성사나 신품성사 때... 왜 그럴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보통 우리는 평소보다 더 순수해집니다. 평소보다 더 마음을 비웁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합니다. 결국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기도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영혼 안에 성령께서는 더욱 왕성히 활동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은 겸손과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 자신을 낮추고. 더욱 자신을 비우는 영혼 안에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반대로 자만심, 우월감, 자기중심주의로 가득 찬 영혼 안에 성령의 활동은 미미할 뿐입니다.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을”

아무리 노력해도 기도가 잘 안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내 안에 그 누군가가 들어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내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떡하니 내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내적인 평화나 고요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당연히 기도생활이나 영적생활도 지지부진합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노력이 내안에서 ‘그’를 빨리 쫒아내는 것입니다. 그를 몰아내고 나면 또 다른 ‘그’가 들어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비운 그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4세기 수도생활의 대가였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그 자리를 ‘하느님의 처소’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성령께서 머무시는 공간입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 나라,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을 마련할 때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기도들도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조용하신 분이십니다.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흰 비둘기처럼 가까이 다가오시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도망가십니다. 반대로 가만있으면 다가오십니다. 순풍이 불면 노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 의지하는 사람, 그분께서 활동하시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편안히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기도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생활성서 2012년 8월호 게재)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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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와 화해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도는 분명 축복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임을 알게합니다.
가장 큰 선물인 하느님사랑을 체험케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것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당신과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기도는 분명 신앙의 핵심입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청해야할 것은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기쁘게 봉헌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살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이
깨어있는 기도의 시간이기를
기도해봅니다.

참된 신앙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기도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기도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이 기도로 사랑이 되시는
한 주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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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내가 청하는 것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며 대화의 상대는 아버지시다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독백이나 일방적 보고가 아니고 너와 내가 주고받는 말의 내용을 함께 하면서 너와 내안에 일치가 이루어 져야합니다. 소통이 없는 인간관계는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으며 갈등만 부추깁니다. 손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하였듯이 대화의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 상대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를 불러세워

1,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들어내시기를 기도하면서 아들인 우리는 각자 자신의 행동이 거룩하게 살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내겠다고 약속합니다.

2, 그곳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게 하시는 것도 나지신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사람, 부당하게 남의 것을 빼앗은 사람보다 내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 분열을 조장 하는 사람보다 일치를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3,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명의 삶이 진실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4, 모든 사람을 아버지를 대하듯이 염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의, 식, 주를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 하느님 자비로우심 같이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있고 고통을 당하는 이들 안에 함께 울고 기뻐하며, 세상에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모든 탐욕에서 자유로운 사람, 세상의 재난과 악의 세력에서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간청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심 같이 기도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 거친 파도를 넘어 잔잔한 물위를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진 선 미이신 주님의 따라 살고 주님의 현존 안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하느님과 대화가운데 자비와 일치와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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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기도만이 답이다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기도만이 답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살아 남습니다.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사는 만큼 기도하고 기도하는 만큼 삽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영혼이 살기위하여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결국은 두 얼굴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두 얼굴입니다. 얼굴을 보면 단박 들어납니다. 기도에 관해 강의할 때 제가 언제나 반복하여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어제 한 자매의 전화 중 한마디가 긴 여운처럼 남아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고난의 삶을 일컫는 말입니다. 살아온 삶이나 현재의 삶이나 앞으로의 삶을 보아도 정말 공감이 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만나 면담성사를 본 두 자매도, 한 형제도, 전화 상담을 한 어느 자매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된 삶이었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은 물론 나라 사정도, 세계 사정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대부분의 삶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계속되는 어려움의 삶처럼 생각됩니다.

하느님이 끝입니다. 하느님이 빛이요 희망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 빛이요 희망이신 하느님의 보입니다. 어제 만났던 분들 모두가 하느님을 믿어 끊임없이 기도하기에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오늘 주님은 기도에 대한 세가지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치십시오.

주님의 기도에 우리의 필요한 모두가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우리가 늘 바치는 일곱가지 청원의 주님의 기도를 말하지만 루가복음은 다섯 개의 청원으로 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은 루카복음의 주님의 기도에 대해 나눕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입니다. 이보다 아람어는 친근하게 아이들이 부르는 ‘압바’라 부릅니다. 예수님께 하느님은 늘 가까운 압바 아버지 였고 우리 역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 하십니다. 우선 아버지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우리 삶의 자세를 늘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일방적 청원이 아니라 우리의 협조의 노력도 필수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삶,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힘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둔 현실에서도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고귀한지요.

이어지는 일용할 양식의 청원입니다.

날마다 하느님의 선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어제에 아파할 것도 내일을 두려워할 것도 아닌 날마다 주시는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함으로 끊임없이 주님의 용서를 받으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변에 널려있는 유혹입니다. 기도를 통한 주님의 도움이 없이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다섯 가지 필수적인 청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음’ 다섯가지를 늘 깨어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늘 바치는 마태복음의 주님의 기도는 여기에 ‘아버지의 뜻, 악에서 구함’ 두가지 청원이 첨가되어 일곱 개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해 늘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그대로 주님의 기도는 이루어 져 우리는 아버지 중심의 튼튼한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항구히 기도를 바치십시오.

삶은 기도입니다. 살아있는 한 숨 쉬듯이 밥 먹듯이 항구히, 한결 같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역시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 끊임없이 간청할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할 때 아버지의 응답을 받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긴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결연한 자세로 주님 앞에 서서 소돔 백성을 하나라도 더 살려내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에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겸손히 주님의 마음을 타진합니다. 바로 항구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그 열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의인 쉰명에서 의인 열명까지 내려 올 때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아브라함의 집요한 물음의 기도입니다. 의인 열명이 없어 파멸한 소돔입니다.

셋째, 아버지인 하느님께 참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십시오.

제2독서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고,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신뢰하여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얼마나 신뢰에 찬 기도입니까? 진정 주님을 신뢰하여 항구히 청하고 찾고 두드릴 때 주님은 어떤 형태로든 응답하십니다. 얼마 전 어느 자매가 전해 준 말이 생각납니다. 그 자매가 30세가 된 딸에게 “너는 성모님을 어떻게 생각하니?”물었더니 딸은 지체 없이 “어머니처럼 느껴져요.”란 대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너는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니?” 묻는다면 “아버지처럼 느껴져요.”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하느님은 너무나 자명한 아버지였고, 우리 또한 아버지의 자녀임을 깊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을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아버지이십니다. 당신께 청하는 자녀들에게 참 좋은 선물, 성령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정말 하느님을 아버지처럼 신뢰하여 바치는 기도라면 항구하여 좌절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매사 평화롭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17주일, 기도에 관한 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1.아버지께 주님의 기도를 끊임없이 정성껏 바치십시오.
2.아버지께 항구히 기도를 바치십시오. 기도는 항구하고 한결같아야 합니다.
3.아버지를 참으로 신뢰하여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기도는 물론 삶의 자세입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청하고 찾고 두드린 당신 자녀들인 우리 모두에게 성령과 함께 풍성한 은총의 선물을 내려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네.”(로마8,15).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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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분명 죽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기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먼저 살아있는 기도로 우리게 오셨고 당신 친히 살아있는 기도가 되시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숨 속에서부터 시작 된 기도이며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기도입니다.

기도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기도의 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늘을 만나고 땅을 만나게 됩니다. 생명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생명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야말로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는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끈을 다시 잡는 은총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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