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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베품은 하느님의 일
조회수 | 2,406
작성일 | 07.08.03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형제간의 유산 시비에 개입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재판관도 아니고 재산 분배자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회에 재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큰 창고를 지어 재산을 쌓아두고 이제 걱정할 것이 없으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재산이 인간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잔뜩 쌓아놓고 죽으면 그 재산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으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재물은 좋은 것입니다. 재물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리합니다. 남보다 더 편하게 살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재물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가 좋으면, 그것에 몰두하여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단편적입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도취하면 부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바로 듣지 못합니다. 권력에 맛들인 사람은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도 오로지 그것만을 얻기 위해 매진합니다. 재물 앞에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쉽게 잃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고, 형제간에 불목하며, 친구를 배신하기도 합니다. 재물도, 사랑도, 권력도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 한 가지를 자기 삶의 최대 보람으로 단정하고 나서면,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합니다.

구약성서는 장수(長壽), 건강, 사람들의 존경과 더불어 재물을 선하신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오복(五福)에서, 명대로 살다가 편하게 죽는다는 고종명(考終命)이라는 항목 하나가 빠진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23,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에 풍족함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시편은 “맹수들은 먹이 찾아 배고플지 모르나, 야훼를 찾는 사람은 온갖 복을 받아 부족함이 없다”(34,10)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곤경에 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류는 신으로부터 복을 얻어내기 위해 신에게 제물(祭物)을 바쳤습니다. 바치고 더 큰 복을 얻어내기 위한 제물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오면 재물을 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구약성서와 시선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것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새로운 실천이 발생한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셔서 예수님도 그 자비를 실천하셨고,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서 당신도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심취하여 사셨습니다. 그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마르 10,21 참조)을 가르치고, 당신 목숨을 실제로 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과 같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고, “장사꾼이 발견한 값진 진주”와 같습니다(마태 13,44-46). 그것에 심취한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가졌던 것을 모두 팔아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도 가르쳤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태 6,24)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재물을 얻기 위해 하느님에게 빌지도 않고, 재물을 보람으로 삼아 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루가 6,20), 재물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부유한 사람이 불행하다”(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무소유(無所有)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도 재산을 상당히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를 초대했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태아 사람도 부자이면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리마태아 출신인 한 부자가 왔는데, 이름은 요셉이고 그 역시 예수의 제자였다”(마태 27,57).

복음서는 재물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장애물이라서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9,21).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루가 16,19-31). 라자로는 부자의 집 문간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자와 걸인이라는 빈부(貧富)의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비극은 라자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우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위해 책임감을 느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의 재물을 보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이웃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이 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재물만 보고, 그것을 더 가져야 하겠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재물에 시선이 고착되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경고로써 끝맺었습니다. 하느님의 베푸심을 자기의 실천 안에 살려내지 못하면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입니다.

베품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베품은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이 우리를 통해 많은 이에게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는”(2고린 9,11) 계기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먼저 은혜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은혜롭게 보이면,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도 우리가 가진 것의 은혜로움을 체험하도록 그들과 나눕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탁월한 예배인 미사는 예수님의 삶이 ‘내어주고 쏟는’ 나눔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미사에서 예수의 몸과 피라는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도 내어주고 쏟는 실천을 하여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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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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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되세요!

부자 되세요! 어떻게? 구원받으세요! 어떻게? 어떻게 해야 부자가 되겠는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겠는가? 진정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참된 재물을 사랑하라!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은혜롭고 풍요로운 재물을 사랑하라!

장난감 가게에서나, 대형마켓에서 어머니를 따라온 어린이를 관찰해 봅시다.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것,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을 양손에 잔뜩 쥡니다. 그리고 더 좋아 보이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 쥐고 있던 것을 그 자리에서 즉시 놓아버리고 새로운 것을 움켜쥡니다. 어린이에게 있어 더 좋은 것이란 더 맛있어 보이는 것, 더 예뻐 보이는 것, 더 신기해 보이는 것, 더 커 보이는 것 등등 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미련 없이 먼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더 좋은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어린이처럼 과단성을 가지고 선택을 할 용기가 있습니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손으로 재물을 움켜쥔다면 많이 움켜 쥘 수 있고 지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것 - 구원은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구원은 얻을 수 없습니다. 내 손만 비우면 거저 주어질 구원을, 손을 비우지 못하여 받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입니까? 한 손은 재물을 나누는 손이 되고, 또 다른 한 손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손이 되기를 바랍시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기 위해선, 하늘에 보화를 쌓기 위해선 끊임없는 자기 비움이 필요 합니다. 이 비움은 재화에 대한 비움이요, 탐욕에 대한 비움이요, 우상 숭배에 대한 비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쌓아야 할 것들은 ‘신앙과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는 신앙과 사랑이 쌓여 있습니다.”(제2독서기도)

‘생명에 대한 희망은 우리 신앙의 시작이요 목적입니다. 의화는 구원의 시작이요 목적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행하는 의로운 행위의 증거입니다.’ 사랑의 나눔이 바로 하느님 앞에 쌓아야 할 하늘나라의 재화입니다. 신앙을 지탱해 줄 두려움과 인내심을 키우며, 자신의 신앙을 옹호하기위해 너그러움과 자제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하기 위해선 참된 재물에 대한 깊은 인식과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부자 되세요!

부산교구 김영곤 신부
  |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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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감에는 빈손으로 그분 앞에 서야

루가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기도에 관한 가르침 다음으로 중요한 관심사는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소유(所有)와 포기(抛棄)에 관한 문제이다. 때마침 오늘 복음이 이 문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준다. 가르침은 군중 속의 어떤 사람이 예수께 유산의 정당한 분배를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원칙적으로는 율사들이 민사소송의 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허나 예수께서 이미 율사들의 가식(假飾)과 위선을 크게 나무라시면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신 일이 있었기 때문에(11,45-52) 율사들이 예수께 유산의 정당한 분배를 요청하는 것이 그렇게 무리는 아닌 듯 하다.(13절)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당신을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냐는 반문으로 요청을 일축(一蹴)하셨다.(14절) 이는 예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막연히 피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그 요청 안으로 파고들 심산(心算)이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 가르침의 핵심은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15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재산이 오히려 탐욕을 불러와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할뿐만 아니라, 탐욕이 극에 달하면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를 들어 잘 가르쳐 주신다. 예화에 등장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은 자기 밭에서 얻은 많은 소출을 전부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한데 있다. 부자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의 소유자이다. 부자는 소유와 저장을 바탕으로 인생을 만끽할 계획을 세우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계획으로 끝나버린다. 이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그날 밤 부자의 숨을 거두어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그렇지, 좀 심한 처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달렸다. 주인이신 그분이 원하시면 그렇게 도로 가져가시는 것이다.

없는 것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도 더 가지려 애를 쓰는 욕심은 인간의 본능에 속한다. 가진 것을 지키려 하고 좀처럼 포기할 줄을 모르며,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 때면 그만큼의 대체소유를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삶을 영위하는 데 다소 편안함과 풍족함이 있겠으나 그만큼 걱정이 많게 되고, 가진 것이 없으면 아쉬움은 많겠으나 걱정은 그만큼 적을 것이다. 소유는 집착과 탐욕을, 포기는 자유와 청빈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부자는 쉽게 물질과 육체를 따라 살게 되고, 빈자는 쉽게 정신과 영혼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는 재물로 삶의 고통을 이기려 하고, 빈자는 영혼으로 그 고통을 극복해 나간다. 재물을 따라 사는 사람과 영혼을 따라 사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하느님에 가까운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다. 다행한 것은 세상에는 부자보다 빈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유교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에는 오복(五福)이라는 말이 있다. 장수(長壽), 재부(財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그것이다. 우리들 중에는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세상을 떠나는 고종명의 복을 빼고 다른 복을 상당히 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는 오늘 예화의 부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부자들이 빈자들보다 앞서 누리는 더 좋고 편한 것을 모두 자기 덕이나 자기 것으로만 생각하는 심보가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빈자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을 더 체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현실은 자신이 보장할 수 있으나 미래는 자신의 힘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무도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대로 반드시 이룰 수 없으며 미래는 하느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는 빈손이 되어 그분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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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거의 이십 년 전, 한편의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내용은 프란치스코 성인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늘 새롭게 떠오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수도회를 만드신 후 그 회칙을 인준받을 필요가 있어, 교황님을 알현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씨시라는 조그만 도시의 촌뜨내기 같은 성인께서 그런 장엄한 장소에 어울리는 외교적 언사를 하실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외워두었던 말을 두어마디 더듬거리시더니, 갑자기 가장 겸손한 자의 모습을 취하시고는 성서의 한 대목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아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들판의 꽃들을 보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루가12, 22∼32; 마태6, 25∼34 참조)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제의 길을 걸으면서 속이 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만히 뒤를 돌아보면, 매 순간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마태6, 8), 그것을 미리 마련해 두셨던 분이 계심을 알게됩니다. '사제들에게는 유산이 따로 없고 내가 그들의 유산이다. 그들에게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돌아갈 소유지가 없다. 내가 그들의 몫이다.'(에제44, 28)하고 말씀하신데로, 주님께서는 당신께 자신을 바치는 이들에게, 당신 전부를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세상 재물의 관리자들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데려가신 후, 그 동산을 '가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돌보라'고 하셨습니다.(창세2, 15) 어리석은 부자는 그 재물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자신의 소유로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씀대로 유한한 것들은 유한한 것만을 내어놓을 수 있을 뿐이며, 영원한 것은 오로지 영원하신 분에게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것 또한 작을 것입니다.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는 하늘에 마련된 재물 창고(루가12, 33)를 채우는 일에 인색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들에게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은 관리인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할 때 그 종은 행복합니다. '주인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입니다.'(마태24, 47)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 주님을 뵈오며,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 10) 하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우리의 몫'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유승 세례자 요한 신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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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

오복(五福)이란 말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정의한 명언인데, 오래 사는 장수(長壽), 부자가 되는 재부(財富), 몸과 마음이 편안한 강녕(康寧), 남에게 선을 베풀어 덕을 쌓는 유호덕(攸好德), 고통 없이 천수를 다하는 고종명(考終命)이 그것이다. 이것들 중 어느 한 가지만 가져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 거기에 머물지 않으니 탈이다. 무엇에 욕심을 낸다는 것은 분명 얻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처음부터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사내가 예수님께 자기 형이 받은 유산의 정당한 분배를 요청했다. 원래는 율사들이 이런 일을 중재했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위신이 크게 떨어져 있던 터라 청년은 예수님을 정당한 유산 분배의 적격자로 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계기로 '생명과 소유'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는 것이다. 소유는 탐욕을 불러오고 탐욕이 생명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소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양적 소유를 자신의 강녕과 결부시키고 나아가 생명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는 부자는 분명히 어리석다. 부자는 소유와 저장을 바탕으로 인생을 만끽할 계획을 세우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그날 밤 부자의 숨을 거두어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그렇지, 좀 심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만 생명을 주고, 언제 거두어 가든 그것은 주인의 마음이다.

애당초 없는 것을 가지려 하고, 있으면서 더 가지려 애쓰는 욕심은 인간 본능의 하나다. 가진 것을 놓을 줄 모르고, 어쩔 수 없이 놓아야 할 때면 그만큼의 대체 소유를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자는 쉽게 물질과 육체를 따라 살고, 빈자는 어렵지만 정신과 영혼을 따라 살게 된다. 고통이 닥치면 부자는 재물로 고통을 없애려 하고, 빈자는 영성으로 이를 극복해 나간다. 소유는 집착과 탐욕을 끊임없이 불러오지만, 무소유는 자유와 청빈을 가져올 것이다. 여기서 자유와 청빈은 무소유만큼의 하느님 소유를 뜻한다. 즉,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하느님으로 인한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부자보다 빈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그래서 성녀 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거나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멘."

박상대 마르코 신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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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오늘 복음은 세상 부자들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부모님의 많은 재산은
결국 자녀들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에게 재산싸움을 일으켰습니다.
부유한 처지에서 더 많은 소출을 거둔 부자는
너무 많이 불어난 재산을 간수하는 일 때문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제발 그런 걱정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그득그득 채우고 쌓아 놓을 계획을 세운 부자가
스스로에게 혼잣말하는 것을 듣기 바랍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동안 그는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쉬는 것도
먹고 마시는 것마저도
참고 견디고 아꼈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오죽 힘들었을까요?
몸인들 편할 리가 있었을까요?
목표한 재산을 모을 때까지 그는
한 순간도 편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만스러웠을 것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이제야 겨우
가진 것으로
풍요로운 물질에서 위안을 얻겠다는 그를 생각하니
딱하고 안쓰럽고 가엾습니다.

세상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아끼고 아껴서 더 큰 창고를 지어 채우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라고 일갈하십니다.
그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물질은 많이 갖고 지닌 것이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영혼의 필요마저 채워줄 것이라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는
세상에서 편리해 지는 것과
영혼이 안식하는 평화를 혼돈했기에
세상의 것들을
자신의 계획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자기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을 줄 여겼습니다.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라질 것들에 집착하였기에 어리석습니다.

탐욕에 젖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했던
복음 속의 “어떤 사람”은 그날, 이 사실을 깨달았을까요?
재산을 더 가지려고
형제도 의리도 정의도 버렸던 그 마음을 되돌렸을까요?
주님을 믿되
재산을 더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고
주님을 이용해서
나에게 유리할 것이라 짐작한다면
‘택’ 없습니다.
기도하고 매달리고 애원한들 그분의 답변은 한결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물을 큰 그릇을 만들어서 더 많이 담아두고
가장 큰 창고를 지어 가득 채워두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단단히 보관해두어야 든든할 것이라고 이르지 않으십니다.
쌓아두지 않아도
전혀 모자람이 없도록 철저히 보살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더 갖고
더 많이 쌓아두기 위해서
지금
쉬고 먹고 즐기는 기쁨을 놓친다면
가장 어리석은 행위라는 사실을 일깨움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큰 창고를 짓기 위해서
고민하고 애쓰고 수고하는 몫을 면제받은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마음 속, 음습한 탐심을 부수어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바랍니다.
그 자유를 살아내기 위해서
주님께 맹렬히 청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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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그 행복의 기준은 다 다릅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은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에서 대개 돈이 있으면 권력과 부, 명예가 쉽게 따라오기 때문이고 그럴 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면서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매진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지 어느 날 여건이 충족되었을 때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서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오늘 복음 말씀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마치 내일이 나에게만은 보장된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돈이 얼마나 있으면 그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투신할 수 있을까요? 재벌 총수들이 돈이 부족해서 탈세를 하고, 자녀들이 가진 돈이 부족해서 편법증여를 위해서 불법을 일삼겠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고 머리로만 알고 있지 몸으로는 체득하고 있지 못합니다.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들 자신이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거기서 빠져나온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계인구의 4%밖에 되지 않는 미국이 세계 에너지와 자원의 25%를 쓴다고 합니다. 그 삶을 포기하기 싫어서 아무 명분도 없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세계 곳곳의 분쟁에 끼어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 11∼13) 우리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하고,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심’을 믿게 될 때 행복해질 것입니다. 아멘

<부산교구 유영일 아우구스티노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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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행복한 삶

어릴 적 즐겨 읽던 동화책들을 보면 보통 끝은“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입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가장 근원적인 희망이며 꿈이기 때문에 이런 동화들에 우리 바람을 투영해서 해피엔딩의 삶을 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동화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행복한 삶을 꿈꾸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형더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자기에게 주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재산은 자신이 보기에 자신의 삶을 순식간에 역전시켜 행복을 보장해 주고 자신의 안전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재산에서 찾고자 하고 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거절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를 거쳐 오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재물을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 중의 하나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재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기보다 점점 재물에 더 마음을 두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재물이 자신의 행복의 척도가 된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 생각이 이제 하느님께 재물을 달라는 청으로 바뀌게 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분이시지만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행복은 우리가 주님께 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이 곧 없어질 것에서부터 오는 행복을 약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서부터 오는 행복을 약속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사라질 재물 같은 것에서 찾고자 하는 행복은 그 수명이 그것과 함께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이야말로 영원한 것이며, 그 행복은 바로 주님의 품에서 사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재산을 나누어 달라는 말로 재물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 아닌 하느님 품에서 사는 행복을 누리도록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초대에 기꺼이“예”라고 응답하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로 지금 이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맛보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갑시다.

▮ 부산교구 김두진 신부 2016년 7월 31일
  |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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