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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자녀들에게 물려 줄 재산은 하느님께 향하는 삶
조회수 | 2,416
작성일 | 07.08.03
그때에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13-­21)

묵상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나?”(루카 12,14)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흔히 ‘소귀에 경 읽기’라고 하지요. 예수께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하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뜬금없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김이 쑥 빠지는 느낌입니다. 여태 설교한 모든 의미가 이 엉뚱한 청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뀌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르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을 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한 것과 비슷한 어투로 주문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내 요구대로 다 들어주어야 하는 분이어야 하듯,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등 돌려버리는 값싼 신앙이 아니어야 하겠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루카 9,41)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우리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열 가진 자가 하나 가진 자의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도 그랬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왕이 한낱 평민인 나봇의 포도밭을 탐내다가 결국 그를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합니다(1열왕 21,1-­16). 다윗 왕도 그랬습니다. 후궁이 많건만 굳이 충신 우리야를 전장에 내몰아 죽게 하고 그 아내를 차지하였습니다(2사무 11,1-­27). 오늘날 다국적 기업이 제3국의 나라들에 손을 뻗쳐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논리가 아닌가 합니다. “인간의 온갖 노고는 제 입을 위한 것이건만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다.”(코헬 6,7) 탐욕은 현재의 처지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하늘의 새를 먹여주시는 분,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나리꽃들을 솔로몬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 입히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길을 가던 나그네가 나무 그늘 아래서 자고 있는 어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어부를 깨워 왜 물고기를 잡지 않고 자고 있는지 물었지요. “나는 이미 우리 가족의 저녁식사에 필요한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았답니다.” “만약 당신에게 더 큰 그물이 있어서 더 많이 일한다면 당신은 물고기 열 마리도 잡을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난 두 마리만 있으면 되는데 왜 열 마리를 가져야 하죠?” “그걸 팔아서 배를 살 수 있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훨씬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요. 당신은 사람을 고용해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아올 수 있고 그러면 당신은 더 부자가 되죠.” “그 돈으로 뭘 하죠?” “즐기며 살 수 있잖아요. 편히 쉬며 놀다가 그늘에 자러 가는 거죠.” “지금 내가 뭘 하는 것 같나요?”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사실 성공을 하고 큰일을 이루어 내고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마음껏 누리고 지식을 많이 쌓고 권력을 잡은 사람이 행복한 듯 보이지만 죽음은 온 세상을 평준화합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실현과 행복은 재산을 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 안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그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 있다고 합니다.

작년 휴가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근심·걱정·우환이 있는 집의 공통점이 모두 ‘재산이 있는 집’이라는 것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재산은 자녀들의 일과 공부에 대한 의욕을 앗아갔고, 재산 분배 때문에 형제가 서로 원수가 되어 상처를 껴안고 살았습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를 살해하는 일도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걸 보면 물신주의를 실감합니다. 결국 재산이 집안의 평화와 행복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수께 청한 어떤 사람은 ‘유산이냐, 형제애냐?’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재산, 형제애, 보이는 지상의 것, 보이지 않는 천상의 것 중에서.

신영복 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사람을 사람한테서 소외시키는 것은, 곧 함께 사는 ‘모두살이’를 개인주의적인 ‘각(各)’살이로 조각내는 것은 ‘사유(私有)’라고 했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네 불행이 내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근거는 ‘사유’라고. 이런 것은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라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사도 4,32) 초대교회의 모습은 ‘모두살이’의 원형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가 누구의 상속자인지 사도 바오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에페 1,14)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물질적인 것보다 다음과 같은 깨어 있는 정신이면 좋겠습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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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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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2장 13-21절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베드로 사도의 재채기

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큰 탁자가 중앙에 놓여있고, 그 앞에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수많은 성인성녀들께서 앉아계셨습니다.

그 탁자 위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켜져 있습니다. 그 촛불 하나하나는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생명 하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촛불들을 점검해보기 위해 그 앞을 지나가시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 촛불로 향하는 바람에 촛불 세 개가 꺼져버렸습니다.

촛불 세 개가 꺼져버렸다는 것은 세 사람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순간 지상에서 잘 지내고 있던 세 사람, 아직 올라오지 말아야 할 세 사람이 갑자기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세 사람은 즉시 베드로 사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미안했던 베드로 사도께서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하시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지상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고생한 대가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씩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말단 공무원으로 지냈는데, 높은 위치에 한번 앉아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너무 높은 자리는 골치만 아플 것이니, 적당한 자리를 하나 알선해주겠네.” 하시면서 꽤 높은 지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거금 한번 만져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셨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여기 가져가시오.” 하는데 보니, 10억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돈도 지위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경치 좋고, 조용하고, 마음이 평화롭고, 괴롭히는 사람 없고, 그래서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 때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아십니까?

“에끼, 이 사람아! 그런 좋은 곳 있으면 나부터 가겠네!”

오늘, 연중 제18주일 성경 말씀의 주제는 ‘영혼의 우위성’ ‘영적 생활에 대한 우선권’ ‘천상적 삶의 가치’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최 우선권을 부여하는 가치, 대상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돈의 위력, 정말 대단합니다.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합니다.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딱 한 가지 생각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단단히 한 몫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급속도로 재산을 증식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에게 한 차원 높은 단어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봉사, 희생, 나눔, 가족애, 우정... ‘그까이 것들’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단연 첫째가는 화두는 자녀교육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자신의 미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투자한 자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확실하게 책임져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자녀가 내 노후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건강이나 외모도 빠지지 않는 화제 거리입니다만 장례식에 자주 가면서 늘 보게 됩니다. 결국 한 줌 재더군요. 결국 한 줌 흙이더군요.

어떻게 해서든 보다 덕스럽고, 보다 영예롭고,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의미 있는 것에 대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다름 아닌 영혼에 대한 투자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지상생활을 마무리 짓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우리가 그토록 물불 안 가리고 투자했던 육신은 다 두고 건너가야 합니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간 노력해왔던 영적생활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봉사요, 희생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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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에게 참된 지혜를 가르쳐 주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걷게 하소서.

독서

재산 문제와 죽음의 문제. 오늘 복음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마치 두 가지를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달아보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 일에 개입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이것은 사실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율법과 관계된 문제라면 라삐에게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을 재물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기회로 삼으십니다. 유산 분배가 아니라 재물의 가치 자체에 대해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 15)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창세기 첫 페이지부터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보시니 좋았다.”라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성경은 (창세 1, 4. 10. 12 등) 창조의 근본적 선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물의 가치는 죽음 앞에서 상대화되며, 물질적 재물이 생명을, 더구나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지는 못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예를 들거나 아니면 다른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것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자명한 것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을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며 나에게 살날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하는 생각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재물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내몰아 갑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가족의 생활을 위해 많은 포기와 희생을 치르며 애써 일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언제나 가진 것이 부족하여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오늘의 제1독서, 곧 인간의 모든 노고가 ‘헛되다.’ 는 코헬렛의 말은 (1, 2; 2, 23) 사치로 들릴 것입니다. 무엇인가 말씀 안에 걸림돌이 들어 있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현실감이 없다는, 예수님이 너무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문제에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사실, 이 세상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그 삶이 우리에게 행복하고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끝없이 살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더 절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한한 삶이기에 이 짧은 삶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걸림돌은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풀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 21) 핵심은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살 것처럼 창고를 크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워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준을 잘못 세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더 많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성찰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잠시 머무는 지상의 이 삶이 진정으로 행복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 그 목적에 맞갖게, 하느님 뜻에 따라 나누임 없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삶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야 하듯, 우리의 삶도 육적이고 영적인 모든 의미에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선하고 아름다운 씨앗들을 성실하게 가꾸어 당신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 이것이 우리에게 죽음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느 날 죽음이 올 때, 하느님 앞에서 충만한 삶을 위해 노력한 오늘의 삶이 후회 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도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시편 90, 10. 12)

성 바오로의 딸 수도회 안소근 수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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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탐욕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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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지 영감. 어릴 적 읽은 그림책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나눔과 공감이 결핍된 삶, 모든 것을 긁어모아 축적하는 삶의 함정을 분명하게 학습시킨 책이었기에, 스크루지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불길한 운명의 대명사였고, ‘할아버지’보다 ‘영감’이라는 호칭으로 무례하게 불러도 되는 부도덕한 인물이었으며, 미워하고 지탄해도 되는 탐욕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스크루지를 다시 떠올려보니 그의 문제는 재산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윤리·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상실과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지 못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의 문제는 두려움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지성의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심각한 파업상태에 들어간 어떤 기업의 소유주가 서슬 시퍼런 투쟁의 분위기 속에서도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라 기업주에게 더 많은 재화를 모으게 할 때’라고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면서, 정녕 탐욕은 어리석음을 더욱 내재화시키는 도발이고, 그러므로 소유에 대한 집착은 철저히 이성의 문제임을 깨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근심과 공포,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인색함과 그 두려움의 끝이 어떤 어리석은 종말로 이어지는지, 그 여정을 이성적 통찰과 지혜로 가르쳐줍니다.

■ 복음의 맥락

루카복음은 크게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1~4,13)과 공생활 중(4,14~24,53)의 이야기로 구분되는데 공생활 이야기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아가는 공간적 흐름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9,51~19,28)에 발생하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서서히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 중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군중 가운데에 있던 한 사람이 형제들 간의 유산분쟁에 대하여 의뢰하고, 예수님은 재산과 재물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를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 하느님 앞에 부유하다는 것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루카 12,16)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해보면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가 됩니다. 새 번역 성경이 문장의 주어를 “부유한 사람”으로 본 것에 비해 그리스어 본문은 “땅”을 주어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인간이 그 어떤 노력과 공헌을 다 한다하여도 결과를 내고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심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의 본질적 문제는 창조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앎’이 없으니 당연히 그분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이 문제였습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 역시 이러한 사태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17절) “내가 수확한 것”이라는 표현은 수확물의 진정한 주인과 주체가 누구인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드러내줍니다. 결국 그가 받은 ‘은혜’는 ‘재앙’으로 변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주신 은혜를 선물로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음, 은혜의 결과를 하느님의 일을 위해 나누지 못한 탐욕이 비극을 자초한 형벌이 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이 문장에서도 여전히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21절)이 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 허무로다, 허무!

재물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집착이,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라는 복음의 관점은 제1독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첫 문장에 무려 5번이나 등장하는 단어 ‘허무’는 히브리어 ‘헤벨’에 해당하며 ‘숨’, ‘입김’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의 것을 의미합니다. 숨이나 입김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지만 중요하다고 해서 이를 부여잡거나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할 때 그 숱한 노력들은 부질없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이 찰나적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찰나적인 것들을 삶의 본질인양 소유하려하고, 하느님의 선물을 자기 것인 양 사용하려하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무”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2,22~23) 코헬렛의 저자는 찰나적이고 잠시적인 것을 영구하게 간직하려는 노력의 무의미함을 지적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모습은 모으고 쌓아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걱정, 지나친 심각함, 지나친 근심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걱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도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 새 인간을 입은 사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촉구하는 것 역시 인간이 마주해야할 모든 현실적 문제들을 불성실하게 혹은 하찮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 공부, 가족, 재산, 건강 모두 삶을 위해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다만 이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추구하라는 것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이를 “새 인간”이라고 표명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9절)

역사를 계급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은 언제나 권력과 계급을, 자본의 축적으로 확보되는 결과물로 인식합니다. 자본의 축적이 힘이 되는 사회는 그것의 분배를 주장하는 노동자 계급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내포할 수밖에 없고, 이 모든 악순환은 파괴와 선동의 원인이 되어 더욱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불안을 산출합니다. 노동과 헌신의 결과를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누리고, 이를 기꺼이 나누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에 지배당하고 치열한 과정 속에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발생한 여러 범죄들은 도덕과 윤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지만, 사실 도덕과 윤리는 감정보다 이성의 결여로 발생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의심하고 고독해하며 공허가 가슴을 채워 분노하고 혐오하여 스캔들을 낳습니다. 삶의 찰나성과 재물의 소유가 주는 불안을 지혜롭게 간파하여 인색과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나에게 허락된 현실적 가치에 집중하고 감사하는 것,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축복을 누리는 것,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며 확실한 구원의 길입니다. 부의 축적과 소유에 집착하면 급기야 소유의 노예가 되어 결국 소유 당하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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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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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의정부] 사랑이란, 하느님을 위해 온갖 피조물을 벗어버리는 것  [2] 2483
614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2] 54
613   [제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1] 2393
612   [전주] 신앙생활  115
611   [광주] 삶을 헤아리면서…  61
610   [안동]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5] 2747
609   [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9] 2362
608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제자는 소유를 버리고)  [3] 1880
607   [수원] 참된 사람살이  [4] 2317
606   [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7] 2654
605   [청주] 겸손으로의 초대  [1] 416
604   [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6] 2520
603   [대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낮춤을 배우자  [7] 2233
602   [수도회] 낮은 자리 높은 자리  [5] 1962
601   [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8] 2578
600   [부산] 초대와 윗자리  [7] 2287
599   [안동] 낮아지고 내어줌  [3] 2230
598   [광주]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살자  [2] 2783
597   [전주] 초대  [3] 77
596   [제주] 주님의 작은 몽당연필  88
595   [원주] 겸손한 사람  [3] 2694
594   [군종] 겸손의 덕  [2] 95
593   [의정부] 참된 희망은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3] 78
592   [춘천] 가장 끝자리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2] 2737
591   [대전] 자신을 낮추는 복된 사람들  [3] 111
590   (녹) 연중 제22주일 독서와 복음 (높이면 낮아-낮추면 높아짐)  [5] 2029
589   [수도회] 영혼의 다이어트  [2] 2130
588   [수원] 가보니 참 좋더라!  [5] 2216
587   [서울] 좁은 문으로, 파이팅!  [7] 2674
586   [인천] 구원의 좁은 문  [9] 2679
585   [마산]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6] 2345
584   [대구] 힘써 좁은 문으로 들어가자  [4] 2482
583   [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6] 2577
582   [안동] 돈 - 최고의 유혹,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  [4] 2375
581   [광주] 문(門)이 있습니다!  [1] 2573
580   [전주] 구원을 향한 선택  [2] 87
[1][2][3][4] 5 [6][7][8][9][10]..[20]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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