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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깨어 있기
조회수 | 2,308
작성일 | 07.08.09
학창시절에 시험 때가 되면 밤잠을 포기하고 공부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제대로 실행한 적은 없고,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하며 며칠씩 밤낮으로 깨어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복음 말씀을 포함하여 오늘의 모든 성경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깨어 있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기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음으로써 눈앞에 다가온 ‘현실’의 이면까지도 꿰뚫어 보고 올바르게 대처함을 의미합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었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그 밤”(지혜 18,6)에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지시에 따라 떠날 준비를 하였던 것은, 파라오라고 하는 절대 권력자의 지배 하에 강요되던 노예생활이 ‘현실’의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느님만이 참된 ‘현실’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제2독서(히브 11,1-2.8-19)는 깨어 있는 삶은 혹독한 시련의 삶이기도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을 약속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히브 11,8) 길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어렵사리 얻은 외아들을 봉헌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깨어 있는 삶을 살았던 구약의 수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믿음만으로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히브 11,13)처럼 살다가 떠난 이들이지만 이들은 결코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복음 역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관점에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사를 받아 교회 안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크고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하는 말씀도 있습니다(루카 12,41-48).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언젠가 돌아오실 주인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셈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 삶의 바탕인 시간은 어느 순간이나 하느님의 영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은 이 사실을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른다”,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합니다(루카 12,39-40). 하느님은 언제라도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잘잘못에 대해 판결하실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섬세한 감각’을 통해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희망하며,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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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요셉 신부·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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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미래의 기다림

지난 주 복음이 재화(富)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이번 주 복음은 시간(기다림)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제시하십니다.

첫번째 비유는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태도에 대해, 두 번째 비유는 집에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집주인의 태도에 대해, 세 번째 비유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다스리도록 책임 맡은 관리인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는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들 모두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어떤 기다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이런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기다림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루가 12,38). 기다림 속에서 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의 현존을 맞아들일 준비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준비 행위는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이 상징하듯 우리의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하는 우리의 그릇된 욕구를 거슬러,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기다림은 미래의 시점을 가리킬 뿐 아니라 현재의 시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루가 12,42-44). 기다림은 막연한 것만은 아닙니다.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 쌓이면 확고한 희망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현재의 순간에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요한 묵시록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 3,20).

주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과 만남, 생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에 지쳐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내고”(루가 12,45) 있지는 않습니까? 권력에 대한 남용,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무절제, 시간에 대한 허비와 게으름 등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만 기다림 속에서, 이런 본능에 지배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이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향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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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더왕은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뒤에 동방 원정을 시작으로 유럽과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세계 문명의 조류를 바꾸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까지 호칭되기에 이른 그도 32살 나이로 바빌론에서 운명을 달리하였지요.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한 알렉산더는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내가 죽은 후 나의 시신을 관에 넣어 묻을 때에는 내 양손을 밖으로 내놓아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라."
 
놀란 신하들이 되물었지요.
 
"아니,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분부를 내리십니까?"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도 죽을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통일한 뛰어난 인물도 결국에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단지 재산 관리인에 불과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다시 거두어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고 심판에 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란 그 사람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지요.
 
'왕이 왜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것일까?'
 
겁에 질린 그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함께 가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제일 친했던 첫번째 친구는 부탁을 꺼내자마자 못 가겠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가긴 가는데 왕궁 앞까지만 같이 가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함께 가주겠으나 왕의 대전까지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친구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갈 것을 흔쾌히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소환에 기꺼이 함께 응하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갈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 첫번째 친구는 평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재물입니다. 재물은 죽는 바로 그 순간 나를 떠나버립니다. 왕궁 앞까지만 간다고 말한 두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구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무덤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덤에 같이 묻힐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같이 간다고 했지요. 그는 우리의 육신을 말합니다. 무덤 속까지는 같이 가서 썩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왕 앞에까지 함께 가겠다고 나선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그가 평소에 가장 멀리했던 자선과 선행이었습니다. 자선과 선행은 내가 심판을 받을 때 끝까지 하느님 앞에까지 함께 따라와 나를 변호해 준다는 것입니다(탈무드).
 
심판을 준비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나는 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을 얼마나 쌓고 있습니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는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무서운 말씀으로 심화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 가르쳐 드려야할 것을 제가 공연히 가르쳐 드렸나요? 아니지요. 우리에게는 알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늘 깨어 준비하여 언제든지 주님 앞에서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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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깨어있는 삶

1. 성서이야기

지혜서는 집회서와 더불어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입니다. 제1독서 지혜 18,6-9는 이집트 맏아들들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의 젖먹이들을 수없이 죽인 죄로 징벌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의 중재로 재앙을 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 11장은 그 유명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반영하는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근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믿음의 빛에서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2,32-48에는 다섯 가지 각기 다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33-34절)의 의미는 마르 10,21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을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35-38절)는 주인이 언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든지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듯이 제자들 역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입니다. '도둑의 상징어'(39-40절) 역시 인자가 도둑처럼 생각지도 않는 시간에 오실 것이니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청지기 종의 비유'(41-46절)는 하느님 나라 비유로써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모르니 항상 깨어 봉사할 준비를 갖추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루가가 지도자들에게 새롭게 적용한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종의 상징어'(47-48절)는 예수께서 율법에 정통한 율사들과 율법에 무식한 백성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 율법을 잘 아는 율사들이 백성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늘 깨어 있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루가는 청지기 종의 비유에서 한 사람의 종이 충성과 불충 둘 사이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며, 이 종은 결국 자신이 결정한 행동에 따라 주인에게서 전혀 다른 보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루가는 이 비유를 지도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예수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지도자들은 결코 게을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비유가 마태 24,45-51에 나오는데 여기서 마태오는 지도자들에게 "제 때에 교우들에게 양식을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제 때에 교우들에게 주어야 할 양식은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종말 지연을 핑계로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예수 재림의 지연은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을 가려내는 시금석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인들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키는 일에 게을리 행동한다면 비유에 나오는 불충한 종과 같을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준비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 종이 주인의 뜻을 잘 몰라 행하지 않는 종보다 벌을 더 받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몰라서 행하지 않는 일반인들보다 엄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48절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누구든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더욱 더 청하실 것입니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겠다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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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리의 믿음이 좀 쓸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8월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이 시기, 농민들은 장마철에 지속되었던 장대비와 태풍의 폭우로 시련을 겪었던 농작물이 이제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잘 여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발생하는 병해충 때문에 농촌에서는 피해를 줄이고자 각종 방역 작업을 합니다. 주민의 건강을 지키고자 방역 차량이 동네 곳곳을 다니기도 합니다.

사람의 건강을 이렇게 지킨다면, 무뎌져 가는 사람들 내면의 양심은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교통 관련 분야에서 사고율이 세계적으로 높은 나라들 중 하나라고 합니다. 즉 교통경찰이 각종 장비를 동원하여 단속하면 법규를 지키는 척하다가, 단속이 없을 때에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고율을 높이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못지않게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는 나라의 사고율이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낮은 경우도 있습니다. 차이점은 자동차보다 사람을 우선시하는 생명존중의 마음입니다. 자동차에 우선권이 있는 신호에서도 사람이 지나가면 끝까지 기다려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양심을 회복하는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 믿음이 무뎌져 가며,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믿음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당신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지혜18,8) 즉 하느님의 법에 동의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같은 하느님의 법으로 의인들의 구원과 원수들의 파멸이 갈리었습니다.

또한 오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히브 11,13)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이 세상에 속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넘어서서 진정한 본향이 어디에 있는지 바라봄으로써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일상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여러분의 시선은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3-34)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 개의치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맡은 일에 충실한 종이야말로, 이웃을 사랑하는 양심이 있으며, 하느님의 법을 지켰고, 하늘나라 하느님의 집에 마음을 둘 줄 아는 슬기로운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역 작업을 잘하여 우리의 믿음이 좀 쓸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을 둘 우리의 본향이 어디인지 정확히 깨닫고 그곳에 항구히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전영준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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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

수많은 정보를 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보의 홍수시대라고도 합니다. 웹 페이지를 검색하다 보면 흘러넘치는 정보 속에서 간혹 눈길이 머무는 소식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면 좋을 곳에 대한 안내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가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담아 기사를 정리해 보곤 합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지 여행을 떠나려면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건강, 시간, 경제력, 함께할 사람 등이 떠오릅니다. 이 중에서도 누구와 함께 가는지는 정말 중요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의미 있는 곳이라고 해도 같이 간 사람들 사이에 뜻이 맞지 않으면 여행의 흥과 일정이 전부 깨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해 주시는 하느님의 허락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단 며칠 또는 몇 주 동안의 여행도 그렇지만 인생 여행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선물을 누구와 함께 가꾸어 가고 또 어떻게 채우는지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드물고 귀하여 가치가 있는 물건을 보물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 여행에서 보물은 단순히 물건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도 포함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에게 ‘인생 여행의 보물, 신앙 여정의 보물’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는 모든 사람과 물건, 그리고 사건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 일러 줍니다.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탈출의 “그 밤”(지혜 18,6)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도록 일깨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히브 11,1)인믿음에 대해 일러 줍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해방의 그 밤과 아브라함, 사라의 믿음의 행위는 하느님을 언제 어디서나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일깨워 주는 신앙 여정의 보물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지 살펴보면 자신의 보물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는 종”(루카 12,37)은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을 찾고, 하늘 본향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참된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을 둘 줄 아는 슬기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2016년 8월 7일
  |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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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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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 집을 뚫고 들어올지 모르는 도둑을 막기 위해 깨어 있는 집주인처럼,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충실하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권고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 예측들은 틀릴 것이고, 인간적 계산들로도 맞히지 못할 것이며, 징표들도 항상 잘못 해석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일반적이고 막연한 깨어 기다림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 시간을 준비하려면 아주 특별한 깨어있음이 요구됩니다.

첫째, 이 특별한 준비 ‘깨어있음’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윤리적 장애 없이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게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필리 2,15 참조). 즉, 의로움의 열매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 곧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분별 있는 생활을 해나감을 뜻합니다(필리 1,11 참조).

둘째,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 분앞에서 특별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했던 베드로 사도는 원로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로서, 또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1베드 5,1-4)

이러한 임무를 위해 ‘충실성’과 ‘지혜로움’이 요구됩니다. ‘충실성’은, 종들은 단지 분배자일 뿐 주인이 아니기에 주인의 뜻에 맞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주인이 언제든지 예기치 못한 때에 돌아와 맡긴 일에 대해 계산을 할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심판은 죄에, 그리고 의무와 책임에 대한 자각에 달려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다른 이들보다 더 주어졌으니 하느님께서 더 요구하실 것이며, 만일 잘못하는 경우에는 벌도 더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충만한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갈 것을 늘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부터 주님과 하나 되기에 합당하도록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추구하고 선택하면서 분별 있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 모든 것을 의탁하면서 지혜를 받아 매일 매 순간 결단력 있게 육적인 자기 자신과 세상, 그리고 악한 영들의 유혹과 싸워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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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일 알렉산델 신부 : 2019년 8월 11일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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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   [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9] 2362
608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제자는 소유를 버리고)  [3] 1880
607   [수원] 참된 사람살이  [4] 2317
606   [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7] 2654
605   [청주] 겸손으로의 초대  [1] 416
604   [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6] 2520
603   [대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낮춤을 배우자  [7] 2233
602   [수도회] 낮은 자리 높은 자리  [5] 1962
601   [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8] 2578
600   [부산] 초대와 윗자리  [7] 2287
599   [안동] 낮아지고 내어줌  [3] 2230
598   [광주]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살자  [2] 2783
597   [전주] 초대  [3] 77
596   [제주] 주님의 작은 몽당연필  88
595   [원주] 겸손한 사람  [3] 2694
594   [군종] 겸손의 덕  [2] 95
593   [의정부] 참된 희망은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음을...  [3] 78
592   [춘천] 가장 끝자리에서 그분을 만납니다  [2] 2737
591   [대전] 자신을 낮추는 복된 사람들  [3] 111
590   (녹) 연중 제22주일 독서와 복음 (높이면 낮아-낮추면 높아짐)  [5] 2029
589   [수도회] 영혼의 다이어트  [2] 2130
588   [수원] 가보니 참 좋더라!  [5] 2216
587   [서울] 좁은 문으로, 파이팅!  [7] 2674
586   [인천] 구원의 좁은 문  [9] 2679
585   [마산]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6] 2345
584   [대구] 힘써 좁은 문으로 들어가자  [4] 2482
583   [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6] 2577
582   [안동] 돈 - 최고의 유혹,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  [4] 2375
581   [광주] 문(門)이 있습니다!  [1] 2573
580   [전주] 구원을 향한 선택  [2] 87
[1][2][3][4] 5 [6][7][8][9][10]..[20]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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