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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남 몰래 드리는 희생제물
조회수 | 2,151
작성일 | 07.08.09
한 개신교회에서 설립한 선교단체 소속 젊은이 23명이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여러 갈래로 석방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솔자격인 목사 한 분은 이미 피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종족 간의 갈등이나 종교적인 갈등, 강대국들의 세계 패권구도로 생긴 분쟁에 직접 이해 당사자가 아닌 우리 군대의 파병이 어떤 평화적 가치가 있으며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종교의 신념을 위해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공격적이고 물량적인 선교 행태에 대한 반성도 일고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담보로 밀고 당기는 협상이 끝이 나고 폭염 속에 한 줄기 시원한 빗줄기처럼 석방 소식이 하루빨리 들려오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른 종교와의 화해와 존중, 교회의 선교방식, 복음화의 진정한 의미,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본래적 소명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서의 제3부(11장에서 19장)중의 일부인데 창조 때부터 이집트를 탈출할 때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의 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모세와 그를 따르던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왕 파라오로 대변되는 그 이외의 사람들은 없어져야 할 하느님의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선조들의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이 ‘자기편’ 이었기 때문에 거저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는 없어져 야 할 하느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맏아들들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남몰래 드리는 희생제물을 하느님께 바쳤고, 율법을 지키고 기쁠 때나 위험할 때나 모두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여 찬미가를 소리 높여”(지혜 18장 9절)불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선조들에게 늘 성실한 마음(사랑)을 보여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기 외에는 모두 올바르지 못하니 ‘틀렸다’고 말하는 뿌리 깊은 근본주의적 행태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마다 ‘옳다’며 상대방을 향해 날카롭게 세운 대립각이 이 여름 폭염만큼 뜨겁게 세상을 달구고 하느님의 성실한 마음을 아프게 찌르니 서글프고 착잡해 집니다.

오늘 제2독서는 심해지는 박해와 늦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점차 지치고 확신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던 신앙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 (버리고, 비우고, 떠나는 것)을 오직 하느님을 믿고 헤쳐 나갔기에 축복을 받았습니다(히브리서11장8절-12절.17절-18절).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도 하느님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 분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있었고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맹목적인 믿음도 아니요, 광신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제2독서인 히브리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쓴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시편 139편 8절-10절).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 모르지만 주님이 늦게 오려니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소홀히 하거나 먼 미래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시는 하느님께 충실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되 자선을 베풀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과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것은 두 행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종처럼 항상 대비하는 것이기도 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남몰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남몰래 드리는 희생제물과 모두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여 찬미가를 높여 부르는 것이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성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우리에게 늘 성실한 마음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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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영식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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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농사철에 휴가철이라 바쁘시지요. 일도 해야하고 손님도 맞이해야 하고, 더위와도 싸워야하고 할 일들이 이래저래 많을 것입니다. 쉬려고 마음 먹으면 나무그늘 밑에 앉아서 수박 한 덩이를 뚝 잘라서 먹고,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매운탕을 끓여서 동네사람 불러 술 한잔 걸치기 좋을 때입니다.

저도 공소 신자분들이 매운탕 끓여 주신다기에 몇 번 기대를 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내년을 기약했습니다. 대신 성당 마당에 차광막을 쳐놓고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시원한 소주와 맥주에 돼지고기 삼겹살 몇 번 구워서 먹었습니다. 삶을 이렇게 여유롭게 살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근심들을 잠시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일들을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더운 철, 일하고 쉬기도 바쁜데 또 무슨 준비를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모처럼 쉴 수 있는 주일인데 "미사 참례하라", "행사가 있으니 봉사하라"고 말할때면 신부인 저도 미안해 죽을 지경입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어디 나들이를 가려고 해도 늘 주일이 걸리고 취미생활을 하려고 해도 그렇습니다. 개신교에서 '술도 하지마라, 담배도 피우지 말라, 십일조를 지켜라……'고 해서 성당으로 오신 분들도 가끔씩 있습니다. 또 성당에 오니 '주일 미사를 지켜라, 성사를 봐라'라고 해서 성당에 안나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짐스런 일이 되는 것인가요?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인이 주인을 기다릴 준비를 하는 것처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인은 마땅히 주인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인이 어떻게 주인 행세를 하며 지내겠습니까? 하인은 주인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인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가진 우리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이 짐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인이 주인이 늦게 오는 것을 투덜거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성사를 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이러한 것이 짐스럽게 느껴진다면 내가 과연 참된 신앙인인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신앙인으로서 깨어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허겁지겁 살다가 주일이 되어서 미사를 후다닥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가버리는 식으로 주일을 지킨다면 주일이 늘 짐이 되겠지요. 주일 미사만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허리끈 정도는 질끈 묶고 기다릴 줄 아는 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성서읽기, 아침저녁기도, 묵주기도는 바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쁘다, 몸이 피곤하다며 이러한 기도하는 것들을 잊고 지내거나 소홀히 한다면 결국 우리 스스로가 신앙을 짐스럽게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안동교구 정도영 베드로 신부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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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깨어있는 삶

기억을 20년 전으로 더듬어 봅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을 무렵입니다. 서품준비중의 하나가 서품성구를 정하는 것입니다. 서품성구는 서품자가 고민 끝에 정하게 됩니다. 주로 성경구절에서 선택을 합니다. 서품자 각자가 하나씩 성구를 정하는 관례를 깨고 저희 동기 넷은 공동의 서품성구를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안동교구 사제로 살면서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고 깨어있는 사제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될 성경구절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기 넷이 고심 끝에 정한 서품 성구가 마태오 복음 25장 40절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서품성구를 떠올릴 때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깨어 있는 사제의 삶을 살고파 하던 서품 때의 첫 마음이 많이 퇴색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는 오늘 복음말씀은 다시 한 번 서품 때의 첫 마음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하면 아래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우리 교회는 변함없이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기대와 희망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반드시 지녀할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이의 태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전해줍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항상 깨어 기다리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우리는 깨어서 준비하고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이의 구체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압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웃에게 전하고, 주님의 부활을 이웃에게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소임이고, 숙제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준비하고 해야 할 숙제는 이웃에게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일, 이웃에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일임을 잊지 맙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 임을 삶으로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바로 구원이고, 부활임을 삶으로 전해야합니다.

항상 깨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종에게는 큰 축복과 행복이 주어짐을 복음은 알려줍니다. 종과 주인의 역할이 바뀌어서 주인이 허리에 띠를 매고 종의 시중을 들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안동교구 신동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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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충실과 불충실의 경계선

연중 제19주일이다. 이즈음 언론매체들이 전하는 소식들을 접하노라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가늠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어제의 문제가 오늘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고, 오늘 별 문제가 없던 것이 하룻밤이 지나면 커다란 문제로 뒤바뀌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즈음의 세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하고 또 혼탁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루카 7,31-32)라고 한탄하시며 장터에 앉아 어지러운 세태를 노래하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신다.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루카 12,15)고 하시더니, 오늘은 '충실과 불충실'에 대해 비유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사실 충실과 불충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충실(充實)이란 열매가 허실(虛實) 없이 꽉 찬 상태를 말하고 불충실(不充實)이란 열매가 맺긴 했지만 빈 쭉정이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충실(忠實)이라는 것인데, 충직하고 성실하다는 뜻이며, 불충실(不忠實)이란 충직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결국 뜻이 똑같다. 충실은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고, 불충실은 탐욕이나 허영, 기만이나 사기 같은 처세술에 능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충실하려면 몇 가지 사실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첫째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2,33). 둘째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셋째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가진 것이란 재물은 물론이고 지식과 마음 태도까지도 포함된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재물이 없는 사람과 나누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식이 부족한 사람과 나누며,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할 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든지 수모를 당하든지 거기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언제나 주님께서 부르시면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만이 진실로 충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안타깝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재물을 가진 사람대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식을 가진 사람대로 그렇지 못한 이웃과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들의 안위와 영달을 꿈꾸며 더 많은 탐욕을 일삼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 아닌가.

최근 어느 연구소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종교에 귀의한 자든 아니든 현실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의지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위가 돈, 2위가 권력이나 학벌, 3위가 신(神)이라는 응답이 나왔다. 그만큼 돈이나 권력 등 세속적 힘을 얼마만큼 가졌느냐에 따라 삶의 성공도가 판가름 나고, 그 성공도에 따라 삶의 충실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하지 않을 수 없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결국 충직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힘없는 자들은 현실에서 도태되고 말아야 할 대상자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어떠한가. 한 조사에 근거하면, 가톨릭 신자들 역시 겉으로는 하느님께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심으로는 돈이나 권력, 명예 따위를 하느님보다 우선순위에 놓고 있다. 하느님과 세상의 것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는 세상의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어떤 사제의 고백처럼, 이 시대에 성지 순례자는 많은데 진정으로 목숨을 바칠 순교자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더 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예수님 생각은 우리 뜻과는 사뭇 다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재산을 그에 맡길 것이다"(루카 12,43-44).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오늘날 세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재벌가, 위정자, 지식인들은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 이익만을 챙기는 것을 충실이라 여긴다. 힘없는 국민들이나 주변의 약자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사실 충실과 불충실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만큼이나 가깝다. 그러니 주님께 모든 것을 걸고 주님 말씀에 따라 살고자 나선 교회 공동체마저 세상의 시류(時流)에 편승하려 든다면 과연 하느님 일꾼으로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감히 주님께 고백할 수 있겠는가.

<안동교구 신대원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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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믿음 있는 신앙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깨어있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 또는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선인들의 거룩한 자녀들은 몰래 희생제물을 바치고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법에 동의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2독서 작가는 “아브라함과 노아의 믿음의 생활”을 가지고 재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올바른 믿음을 가진 신앙인’은 언제나 이 시대에 ‘깨어 있는 신앙인’이고, ‘깨어 있는 신앙인’이라면 일상생활 안에서 언제나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랑과 진실이 왜곡되고, 탐욕과 교만이 판을 치는 혼탁한 세상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대답으로 오로지 참 희망이시며 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길을 제대로 걸어가기 위해 ‘어떤 자세’로 일상을 살아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수많은 순교자들이라는 걸출한 신앙선조들이 있습니다. 이 순교자들 덕분에 우리는 ‘순교정신’이라는 진실한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순교정신’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성지순례’만이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또 거액을 들여서 성지순례를 마치 여행 삼아 떠나는 데에만 정신을 팔고 있지, ‘깨어있는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성지순례’라는 것도 어쩌면 가진 자들의 또 다른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충실한 종’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겠지요? 사실 성지순례란,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 안에서 ‘동방박사들’처럼 참 주님을 만나는 일이며, 주님을 만난 순례자는 지금까지의 헛되게 산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이란,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현해 보이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오실 주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여기에서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치열하게 살겠다는 각오이며, ‘등불을 켠다는 것’은 곧 깨어 현실을 직시하면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마태 5,37)라고 하는 삶을 살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날씨가 고르지 않고 또 후텁지근한 요즈음이지만, 그래도 주님께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복잡하고 인정이 점점 메말라가는 현실 속에서 주님을 향한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청해 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 만남 안에서 충실한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시는 형제자매들이 되시기를 기도 안에서 주님께 청해봅니다.

▮ 안동교구 신대원 요셉 신부 2016년 8월 7일
  |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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