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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0주일 독서와 복음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조회수 | 1,921
작성일 | 07.08.17
제1독서 예레미야38,4-6.8-10

그 무렵 4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6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 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8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9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10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제2독서 히브리 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 루카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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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불’은 『성경』에서 심판을 뜻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불이 훨훨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것은 세상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고자 하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의 경우에는 불이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루카 3,16; 사도 2,3.19 참조). 결국 세상에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를 없애 버리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세례란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란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사업이 이 세상에 참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인간은 본디 혈연과 학연, 지연 등 수많은 관계의 사슬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관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관계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태아가 탯줄 없이는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계 가운데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잡혀야 인간 본연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익숙하면 익숙한 만큼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얻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되새기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누리려면 무엇을 결단해야 하겠는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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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3년 8월
  |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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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 불은 성령의 불, 하느님을 향한 열정의 불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불길이 훨훨 타올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길이 타오르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하시며 그 길이 수난의 길임을 역설하십니다.

진정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가치가 틀리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가족 관계나 인간관계에서도 의견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불화나 분열마저 생길 수 있지요.

이를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사상 체계나 정치 사회적 관습을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라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면서도 막상 그 뜻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달라지며, 불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그분의 뜻에 맞는 것인지, 분별해 내야만 합니다. 지혜롭게 판단하지 못할 때, 또 다른 불화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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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 2016년 8월 14일
  |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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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명을 앞두고 당신 마음의 내면을 관찰하도록 해 줍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성경에서 불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내면에서 깨끗하게 씻는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 불은 벌써 땅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을 통해서 신자 공동체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런 불의 시험을 겪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암시하시는 세례는 번민과 고난과 더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신 뒤에 죽음에 잠기실 당신의 수난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과 전쟁을 일으키러 오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 얻는 그런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전해 주는 평화를 누리려면, 먼저 불을 통한 정화, 빛과 어둠, 악과 불의, 억압과 무관심, 거짓과 불의한 상황에서 안락한 생활에 맞선 선의 싸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대립 상황은 모든 가정 안에서,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믿음과 일관되기를 바라는 모든 신자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유다교 회당이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메시아로 고백한 모든 유다인에게 파문을 선언하였을 때(기원후 90년 얌니아 회의) 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가족애와 물적 집착보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첫자리로 놓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전적으로 헌신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도록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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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매일미사 2019년 8월 18일
  |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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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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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는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언하신 참사랑은 갈등과 분열로 잃어버린 평화를 다시 찾는 원동력이 됩니다. 연중 제20주일의 복음 말씀은 힘들더라도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들립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치드키야 임금 때(기원 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점령당하고, 지도자들은 유배지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시기에 산 증인입니다. 이스라엘을 도우러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자 바빌론군은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고 물러가는 것(예레 37,5)을 본 대신들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으로 착각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군대는 물러가지 않고 도성을 불태울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예레 37,9)을 선포합니다. 대신들은 그의 말이 군인과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재앙을 바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선동합니다.(예레 38,4) 유약한 임금은 그를 저수동굴에 가두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고 대립합니다. 유다 지도자들에게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음에 충실한 동정 마리아와 사도들과 수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우리의 수호자이니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촉구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 속에 ‘영원한 도성’(히브 13,14)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는 믿음의 영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십니다. 아람어 문화권에서 ‘세상’은 진흙으로 만든 ‘화덕’으로도 풀이됩니다. 화덕의 연료는 동글납작하게 만든 낙타분에 소금을 뿌려 말린 것입니다. 소금은 연료를 태우는 촉매제(불쏘시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불쏘시개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맙니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평화를 누리라는 가르침으로 새깁니다.(마태 5,13; 마르 9,50; 루카 10,34)

성경에서 ‘불’은 하느님의 현존이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힘을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그가 기도하자 주님의 불길이 번제물을 태웠습니다.(1열왕 18,38)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루카 3,16)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제자들의 마음을 채우고 내면을 정화시켜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사랑의 불이 타오르려면 주님께서 받아야할 세례가 있습니다. 세례는 순교의 은유적 표현(루카 12,50)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로 세례의 원천(마르 10,38; 요한 19,34)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삶을 시작하는 거룩한 성사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아우성치던 군중 심리를 예견하신 것일까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주님(요한 14,27)의 말씀이 우리를 일깨웁니다.

세상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힘의 균형 상태나 심리적인 안정을 두고 말합니다. 군비경쟁이 지속되는 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권이 무시되고, 불의와 불신, 교만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shalom, irene)는 하느님의 본성, 강복, 안심, 안녕, 풍요, 번영, 조화, 화해, 기쁨, 완성 등 적어도 열 가지의 의미(사회교리 488-495)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내려지는 하느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닌가가 분열의 기준입니다. 믿음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요한 5,24) 믿음이 우리의 영혼 안에 자랄수록 성령의 불은 타오르기 마련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응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때 성령의 선물인 평화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신앙공동체의 참 가족이 됩니다.(마태 12,50; 마르 3,35; 루카 8,21)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도주의에 이바지하는 것이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는 길입니다. 애덕의 실천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계보장과 의료서비스 같은 문제에 우선적인 배려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사랑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삶의 최고의 규범입니다. 참사랑은 진리 안에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완덕의 최고봉입니다. 성체성사와 생명의 말씀이 일치의 원동력이 되고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순례의 여정에서 이기와 위선과 교만을 태워버리고 주님과 함께 사랑의 불쏘시개가 될 때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가 주어집니다. 주님의 평화는 믿음에서 오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평화’(요한 15,1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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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18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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