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23.6%
[서울] 좁은 문으로, 파이팅!
조회수 | 2,675
작성일 | 07.08.24
파이팅! 우리말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운동경기에서 ‘잘 싸우자’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호를 너무나 좋아해서 운동경기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도록 하자는 격려의 의미로 아무 때고 사용한다. 가벼운 게임을 할 때도 의례 파이팅을 외친다. 파이팅이 원래 ‘싸움’이라는 뜻의 파이팅(fighting)에서 유래했으니 외국인들의 귀에는 우리가 호전적인 사람들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도 파이팅을 외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힘써라’는 번역은 너무 점잖다. 희랍어 ‘아고니제스테!’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편에서는 거저 주시는 것이나 우리 쪽에서 보면 그저 편안히 드러누워 얻어먹을 수 있는 떡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1티모 6,12), 자신도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2티모 4,7)고 말했다. 여기서 다 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믿음의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은 처절한 싸움의 길이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당신 먼저 좁은 문을 통과하심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문(요한 10,9)이 되어 주셨다. 성경은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고 전한다. 여기서 ‘고뇌에 싸여’라는 표현 역시 너무 약하다. 희랍어로 ‘엔 아고니아’는 머리만 쥐어짜는 고뇌가 아니라, 인류구원의 기로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며 악의 세력과 벌이신 처절한 한판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소수정예로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구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권고와 격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주님이 그 문을 닫아 버리면 밖에서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주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었던 것처럼(1코린 10,1-5), 세례성사를 받아 교적에 이름이 올라 있고, 게다가 성경과 교리지식까지 풍부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장담할 수는 없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하며 주님과 안면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주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하시며 매몰차게 외면하실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우리 모두 파이팅!

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451 23.6%
행동이 없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마태 7,24-27)

오늘 복음 말씀은 구원에 대한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루가 13,23) 이 질문은 요한 묵시록에 언급된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효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을 받은 자들의 수효가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마에 도장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묵시 7,4).

여기서 인장과 충만한 숫자(12×12)는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구원의 표지인 세례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 행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의 제한된 수효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가 13,24 참조).

여기서 ‘좁은 문’은 넓은 죽음의 길과는 다른, 생명의 길을 말합니다(마태 7,13-14; 신명 30,15-20 참조).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많고 적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주님은 보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루가 13,29; 1디모 2,4 참조).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그 길은 오늘 복음 서두에 언급된 것처럼, 바로 예수께서 걸어가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말합니다. 그 여정은 주님과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관계가 아니라 긴밀한 내면의 관계를 전제합니다.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관계만을 가졌던 사람들은 주님께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루가 13,26) 마태오 복음에도 유사한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마태 7,22)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똑 같습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루가 13,27; 마태 7,23).

바꿔 말하면, 주일마다 성당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성제에 참여하더라도 일상의 실천이 없는 의식(儀式)뿐인 관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마태 7,24-27 참조). 주님은 당신 뜻에 부합하지 않는 말뿐인 청원이나 기적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만을 드러내는 거짓 예언자와도 같은 것이기에 그렇습니다(마태 7,15-16 참조).

우리는 두 가지 길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은 좁은 문입니다. 그 문은 비좁기에 주님과의 친밀하고 내면적인 관계없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08.24
451 23.6%
좁은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요즘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대안교육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대안학교를 비교 연구하던 중 특별한 한 학교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교육이념에 충실한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학생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적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높은 대학합격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특별한 학교였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의 강한 소명의식과 끊임없는 헌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를 소개하는 소책자를 읽다가 '직업선택의 십계'란 항목이 유난히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①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②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③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④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⑤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⑥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⑦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⑧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⑨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⑩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한마디로 요약해서 '좁은 문'을 선택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왜 하필 좁은 문입니까? 예수님은 왜 우리를 좀 편하게 두지 않으십니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을 포기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멸망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넓은 문은 누구나 꿈꾸던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추종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선택함과 동시에 넓은 예루살렘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영예스런 문이 아니라 고통스런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가파르고 좁고 험한 길인 십자가 길, 치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예수님 길은 좁은 문의 연속이었습니다. 좁은 문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문, 생명에 이르는 문, 생명을 구하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여정의 각 단계 앞에 놓인 많은 문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문 크기에 절대 연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이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이끄는가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문 크기나 외적 화려함에 절대로 현혹되지 마십시오. 문이 얼마나 비싼 문인지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보다는 문의 종착점을 보십시오. 거기에 우리 삶의 최종목표이신 주님께서 계시는지를 보십시오.

우리가 끊임없이 넓은 문을 포기하고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좁은 문은 주님께서 통과하신 문이며, 좁은 문 그 너머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비록 고달프고 자주 포기하고픈 문이지만 결국 그 문만이 영생의 문이며, 구원의 문이며, 부활의 문이며, 천국의 문입니다.

사실 너무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앞에 펼쳐질 구원의 문은 넓기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넓은 것은 아닙니다. 너무도 완고하고 자기 주장이 강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여유가 조금도 없는 사람들, 과도한 욕심과 지나친 이기심으로 가득차 터질 듯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구원의 문은 좁기만 합니다.

내 방식만이 최고라는 사람들, 자기 주장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사람들, 언제나 사사건건 따지고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영혼은 너무도 비대해진 나머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것입니다.

반대로 매일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매순간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는 사람들, 갖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과중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만 매일 떨치고 기쁘게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은 한없이 넓기만 합니다.

평화신문 2004년 8월 22일
  | 08.25
451 23.6%
좁은 문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된 자매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 본당 신부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자 어찌나 반가웠든지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이고 신부님, 저는 신부님께서 계시던 본당의 신자였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신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
 
그러자 신부님이 황급히 자매의 말을 막으며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옆에 주교님께서 쉬고 계십니다."
 
물론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신자라는 이유로, 또 신부라는 이유만으로는 천당에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위보다는 복음적인 삶이 더 중요하다는 심오한 가르침이 짧은 이야기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하고 인간적 친분을 내세워 들어가려고 애원하지만 집 주인은 야박하리만치 문을 닫아 버릴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아무리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친분이 있어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지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첫째인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뽑혀서 첫째가 된 그들도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꼴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편 이 말씀은 이방인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도 비록 그 출발은 늦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따른다면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인생역전의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성공 기준은 자녀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켜서 어떻게 출세를 시켰으며, 재산은 얼마나 모았으며, 얼마나 사회적 직위가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조건을 갖추면 첫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요 행복한 집안으로 통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준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마음에 들고 첫째로 꼽힐 사람의 기준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느냐'하는 것이 하느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관점을 지향해서 살아가며 그것밖에 모른다면 그는 세상에서는 첫째였을지 몰라도 죽어서 하느님 심판을 받을 때 꼴찌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면 혹시라도 세상에서는 덜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아주 구체적인 예가 루카 복음 16장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매일 호화롭게 먹고 입고 마시며 잔치를 벌인 부자는 자신의 재산만 믿고 살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부자의 집 앞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며 개들이 종기를 핥던 거지 라자로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뜻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번이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갈등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며, 힘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첫째 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8.25
451 23.6%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 하셨습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란 말마디에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뭔가 답답해져 옴을 느끼게 됩니다.

“구원받는 것마저도 ‘무한경쟁’이란 말인가요?”라는 공허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 봅니다. 어릴 적부터 자원은 오로지 인간뿐인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짓밟고 죽이는 일에 넌더리나게 푹 빠져 살아왔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직장 다니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대학교, 더 좋은 고등학교, 더 좋은 중학교, 더 좋은 초등학교, 더 좋은 유치원 등등에 다니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우리에게 ‘좁은 문’은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도 ‘좁은 문’이라뇨?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신앙생활도 결국엔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이들을 물리쳐서 이겨내야 한다는 뜻일까요? 사랑의 예수님께서 설마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문득 신학생 때 수업 중에 어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총은 무한하게 크지만, 그렇게 큰 은총을 받아 담아야 할 우리 그릇이 너무 작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신의 그릇이 작은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박하게 작다고 하느님 탓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을 향한 ‘좁은 문’과 구원의 ‘좁은 문’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가 간과했습니다.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은 누구나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그곳을 향한 문은 ‘실제로’ 좁지만, 그와 반대로 구원을 향하는 길을 ‘정말로’ 충실하게 걸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주 넓기만한 구원의 문은 좁은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인 정치인은 많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처럼 정치하는 사람은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겉으로 외치면서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무척 적은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은 모르는 사람들이오. 미안하지만 문을 열어 드릴 수 없겠소.”라며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는 우리 얼굴을 보고 아는 사람이라 해주실까요? 우리 얼굴을 알아보셔야 우리가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정답은 우리 양심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한 번 오랜만에 일으켜 세워 볼까요? 정답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끝으로, 제 가슴 속에 작은 울림을 남긴 요한 23세 교황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아르 지방의 한 평야에 세워진 바벨 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세기에 건립된 그 탑의 건설은 혼란을 일으키며 중단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유형의 탑들을 사람들은 짓고 싶어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첫째 탑의 운명을 후대의 탑들도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신희준 신부
  | 08.21
451 23.6%
[서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명작소설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이 소설을 접했는데, 당시엔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에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좁은 문」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법한 내면적 갈등을 자세하게 그려냈습니다.

앙드레 지드는 1869년 파리 출생으로,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강요한 어머니 아래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좁은 문」은 그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한 10대 후반 부터 사촌 누이를 사랑하고 불안한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소설에서도 남자 주인공 제로옴은 자신보다 두 살 위인 외사촌 누이 엘리사를 사랑합니다. 둘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지상에서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어느 날 교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자신이 바로 ‘좁은 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소설 속 엘리사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의 의미와 사랑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신앙에 대한 배반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성장한 저자는 작품 안에도 자신의 신앙적 태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그래서 소설 「좁은 문」에서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아닌 ‘두려움과 징벌의 하느님’으로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길거리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않았다면 구원의 조건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 주님 !’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태 7,21 참조) 오히려 주님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은 불의한 자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첫째가 되고 누가 꼴찌가 될 것인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탐욕으로 살찐 몸뚱이는 욕심을 버리고 줄여야 합니다. 좁은 문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길입니다. 우리도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매 순간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08.24
451 23.6%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1등을 하려고 죽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1등을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치열한 경쟁에 들어갑니다. 평생 경쟁하지만 정작 한 사람도 그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 이래로 현대처럼 교육의 기회가 흘러넘치게 제공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모두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인간의 성숙함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생존 투쟁의 장이 돼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절망감은 이루 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참된 행복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꿈과 이상이 사라지고 더 많은 소유라는 신기루를 좇으며 불나방처럼 죽어가는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한국 사회뿐 아니라 온 세계가 희망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안고 있는 깊은 문제입니다.

▪ 흙수저 예수님

그런데 그리스도 신자들은 십자가 밑에 모입니다. 십자가는 꼴찌임을 강력하게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꼴찌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흙수저를 문 채 마구간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고향 나자렛은 변두리 세계입니다. 거기서 자라고 변두리 사람의 억양과 말투로, 말씀도 단순하게만 하셨습니다. 그분은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 호숫가를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주로 만난 사람들은 병자, 귀신들린 사람, 배고픈 사람들,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몰려서 사형수로 죽었습니다. 흙수저를 끝까지 문 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해서 아드님을 보내셨는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금수저 대신 흙수저를 안긴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기록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흙수저를 문 사람들을 항상 우선하여 선택하십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영광의 때’라고 매우 강조합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서운하게 대답하면서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모호한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능력을 발휘하시어 아드님도 부활시키셨고, 인간을 모두 부활에 초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영광의 때를 작정하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 여종으로 자처하신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찬송하고 기뻐하면서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자처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능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께서 성모님 안에서 큰일을 하시고, 미천한 이를 한없이 끌어올리십니다. 성모 승천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당시 유다인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밑에 모이는 교회는 2000년 역사 속에서 항상 꼴찌가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을 기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는 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성경을 충실하게 읽지 않는 교회는 이 복음 정신의 핵심을 놓치고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과 달리 유혹에 빠진 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한국 순교자들이 그 당시 사회에서 분명히 꼴찌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꼴찌가 돼야 할 차례입니다.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에게 성자를 잉태시키신 성령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도 이끄셨습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이끄셔야 우리도 그 복음적 꼴찌가 되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진정으로 세워집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2016년 8월 21일
  | 08.19
451 23.6%
[서울] 한 주일을 시작하며

---------------------------------------------------------

오늘의 첫째 독서는 이사야 예언서 66장의 말씀, 이사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의 말씀입니다.

첫째 독서 말씀을 읽으며 ‘영광’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구약의 창조 신학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이유가 바로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도 이스라엘을 통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유배를 한 이유는 하느님 백성이 그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실현하게 될 하느님 나라를 통해 하느님 영광이 최종적으로 드러나고,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예언자는 자신의 예언서를 마무리합니다. 물론 그 예언은 단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예고가 아니라 그들의 현재에 대한 예언자의 요청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시작하는 교회의 영광송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훈육’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는 그리스어 파이데이아(ươƩƤƥƟơ)의 번역인데, 이는 아이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교육 또는 훈련을 뜻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헬레니즘의 파이데이아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닥친 시련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육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련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바른길’을 달려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문’이라는 문학적 표상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 문을 통해 주님의 집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의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에 나온 신학적 개념과 문학적 표상을 한데 묶어 요약해 본다면, 하느님의 ‘훈육’에 따라‘바른길’을 달려가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그분 나라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한 문장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 문장이 삶의 순간순간 무척이나 무거운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 우리 교회의 믿음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일의 삶을 시작하며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이유이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623   [마산] 잃은 자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3] 2443
622   [부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9] 2461
621   [대구] 아버지의 마음  [3] 2380
620   [원주] 머리의 논리보다 가슴의 논리로 살자  [3] 2649
619   [춘천] 주님께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2] 98
618   [대전] 하느님 앞에 좀 뻔뻔해집시다.  [2] 2119
617   [청주]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73
616   [광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2715
615   [제주] 화해와 용서  65
614   [전주]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1] 82
613   (녹) 연중 제24주일 독서와 복음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4] 1894
612   [수도회] 제자됨의 길  [4] 2432
611   [수원] 제자들의 선택  [5] 2327
610   [인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7] 2488
609   [서울]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려놓아야 할 것들  [9] 2717
608   [마산] 적극적인 포기  [4] 2577
607   [대구] 동행  [3] 2397
606   [춘천]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3] 2486
605   [원주] 천국행 네비게이션  [2] 68
604   [대전] 이제는 내려놓아라.  [4] 2350
603   [청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라.”  83
602   [의정부] 사랑이란, 하느님을 위해 온갖 피조물을 벗어버리는 것  [2] 2486
601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2] 54
600   [제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1] 2393
599   [전주] 신앙생활  116
598   [광주] 삶을 헤아리면서…  62
597   [안동]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5] 2748
596   [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9] 2362
595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제자는 소유를 버리고)  [3] 1880
594   [수원] 참된 사람살이  [4] 2320
593   [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7] 2658
592   [청주] 겸손으로의 초대  [1] 418
591   [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6] 2526
590   [대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낮춤을 배우자  [7] 2234
589   [수도회] 낮은 자리 높은 자리  [5] 1963
588   [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8] 2579
587   [부산] 초대와 윗자리  [7] 2289
586   [안동] 낮아지고 내어줌  [3] 2232
585   [광주]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살자  [2] 2792
584   [전주] 초대  [3] 77
[1][2][3][4] 5 [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