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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구원의 좁은 문
조회수 | 2,685
작성일 | 07.08.24
대청도는 백령도, 소청도와 함께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섬입니다. 조선 명종 때 수목이 무성한 큰 섬이라 하여 대청도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백령도의 유명세에 가려져 아시는 분이 드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천에서 쾌속선으로 4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하지만 그만큼의 수고와 노력이 다 보상될 만큼 아름다운 섬입니다. 한 낮에는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가 반기고 한 밤 중에는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가 보는 이의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요즈음은 너무나 깨끗한 하늘과 바다가 모든 이로 하여금 순수한 초록의 기운을 느끼게 해줍니다. 외딴 섬이기에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하늘의 변화와 바다의 변화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 안에서 생활의 지혜 또한 얻게 되는 것이 섬생활의 값진 보물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육지생활과는 다르게 기도 장소의 변화가 저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할 때 해변가로 가서 산책을 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넓은 해변을 홀로 걸으며 수평선을 향해 저무는 붉은 해를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루 일과를 정리하게 됩니다. 또한 자연이 가져다주는 경이로운 모습 속에서 저의 모습이 한 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끼고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은 더욱더 커지게 됩니다.

해변을 걷고 있으면 묵주기도를 하는 저의 행보가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한 발 한 발 모래사장에 새겨진 제 발자국이 저의 외면과 내면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신부로서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중요시하고 그런 모습을 가꾸는데 힘쓰지 않았나 가만히 반성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먼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되어 뒤돌아보면 어느 순간 파도와 함께 모래바람에 저의 발자국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입니다. 지금은 꼴찌의 삶 같이 보이지만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과 입으로만 하는 신앙이 아닌 실천을 통한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내면의 모습을 가꾸는데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 자녀인 우리들에게는 지나온 발자국, 즉 과거 죄인으로서의 모습에 연연해하는 것이 아닌 미래에 만들어 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발자국이 중요합니다.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즐거움에 붙잡혀 있던 모습을 성령의 바람과 주님 사랑의 파도로 지워버리고 왼 발에는 사랑, 오른발에는 회개라는 발자국을 모래사장에 깊게 새기듯 자신의 인생에 깊게 새겨 넣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두가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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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미카엘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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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인천의 간석4동 성당 주임신부로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에 부임할 때부터 이 성당이 그리 낯설지가 않았어요. 아니 성당 뿐 아니라, 본당의 관할 구역 모든 곳이 낯익었지요. 왜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 놀았던 동네가 바로 이곳이랍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동네이다 보니 어떻게 낯설겠습니까?

하지만 이 동네에 살았던 때가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이니 변한 것이 전혀 없을 수가 없겠지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에서 20년이면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요? 하긴 많이 변했습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저층 아파트는 모두 고층 아파트로 탈바꿈을 했고요, 제가 살았던 집은 빌라로 변해 있더군요. 또한 없었던 넓은 도로가 생겼으며, 논과 밭만 있던 곳에는 인천의 젊은이들이 즐기는 유흥가로 변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모습은 어떨까요? 20년 전의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제 모습 역시 많이 변했지요. 그래서 오랜만에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친구들이 말하곤 합니다. “너 이렇게 변했니?” 하긴 저 역시 과거의 사진을 보면서, ‘내가 이럴 때도 있었는데…….’라면서 스스로 미소를 지으니까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서, 문득 과거에 제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해 봅니다. 보물 1호로 취급했던 많은 우표들, 이 우표를 모으기 위해서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새벽부터 우체국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단 한 장의 우표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제게 있어 소중한 보물은 탁구라켓이었지요. 탁구장에 갈 때마다 반드시 챙겨서 가지고 갔던 탁구라켓. 탁구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신나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탁구라켓을 잡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변하는 것들에 목숨을 걸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때는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기에 목숨을 걸고서 그것을 간직하려고 하지만 과연 영원히 내게 필요한 것일까요? 과연 물질적인 부와 권력이 천년만년 내게 꼭 필요할까요?

바로 이렇게 잠시의 기쁨만을 생각하고 쫓아가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주님께서는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통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현세의 생활이 영원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만큼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서도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비결이 아닐까요?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8.26
민경덕 1 7.2%
연중 21주간 주일 강론

찬미예수님, 가을이 다가오려는지 볓이 굉장히 따갑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렵게도 들리지만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답니다.
오늘은 여느 강론과는 다르게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 네 사람이 나옵니다.
여인과 목사님, 그리고 문지기와 신부님이 나옵니다.
이들의 생각과 말을 제가 부족하지만 목소리를 바꿔서 강론을 하려 합니다.


어느 커다란 개신교에는 엘리베이터가 하나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 곳 신도가 예배 시간에 늦을 듯 싶어서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탔답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어떤 중년의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먼저 타고 올라가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 고민을 했답니다.

그런데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엘리베이터를의 문을 지금 닫고 올라가면 나는 예배시간에 늦지않아.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랬잖아. 좁은 문으로 빨리 들어가라고”. 그래서 그 여인은 과감히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먼저 올라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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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시간에 늦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했던 여인은 한 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늦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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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의 반전) 나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조금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막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고, 저를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더니 잠시 미소를 지으면서 머뭇거리기에 “아 살았구나”하며, 숨을 돌리려는데, 그만 문을 닫으며 올라가 버리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원망하며 계단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예배를 들어가기 위해서 계단과 복도로 연결된 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마구 두드렸는데,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늦었으니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라고..., 그래서 “나 목사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챙피해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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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의 반전) 나는 교회의 문지기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기 예배시간에 늦게 들어오는 사람을 무척이나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고용해서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어떤 사람이 문을 심하게 두드리면서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자기는 꼭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늦었으니 절대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조용해졌습니다. “역시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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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의 반전) 큰일입니다. 오늘은 종교간의 대화로 천주교 신부님을 초대해서 나의 설교를 들려주고, 천주교의 입장을 들어보기로 한 날인데, 내가 늦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다시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 목사야. 문 열어”라고 했더니, 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가 목사면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다시 큰 소리로 “나 이 교회의 목사란 말이야. 문 열어”라고 소리쳤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이 열렸고, 그 얼간이의 놀란 눈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예배가 끝나면 사람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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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의 반전)나는 신부님입니다. 오늘 종교간의 대화를 하려고 이웃한 개신교 교회당에 왔는데, 목사가 늦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설교단 위에 앉아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그냥 눈을 감을까? 아니야 그럼 잠자는 줄 알겠지. 성경을 펼쳐볼까? 아니야. 개신교 성경을 본다고 수군거리겠지. 가만히 앉아있을까? 아니야 사제가 멍하게 있다고 뭐라 하겠지. 그래 묵주기도를 하자”
묵주기도를 마칠 시간정도에 목사가 뒤쪽 문에서 뭐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설교단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늦으면 미안한 줄 알아야지, 뭐가 그리 당당한지 한심하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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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 설교단 위에 앉아계셨습니다. 그래서 급히 숨을 돌린다음 저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구하여라 얻을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나의 멋진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의 강론은 이것이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껏 노력해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행동이 따르는 그리스도인이였고, 오늘 교회의 문을 지킨 문지기는 하느님의 천사로써 뒤늦게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말씀 신자 여러분, 우리는 정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때론 미사에 늦게 들어와서도 산만한 행동을 하거나, 그도 모자라서 핸드폰 벨을 울리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마음아파 하실까요? 진정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신다)이기에 그 이름이 결코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음을 우리는 잊지않고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아멘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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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한참 전의 일이 기억납니다. 신학교 동창들과 물놀이장으로 함께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 수영장에서 놀던 우리들의 눈에 워터슬라이드(미끄럼틀)를 신나게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너무나도 즐거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저거 타자!”, “무섭지 않을까?”, “뭐 무섭겠어? 다 타기다.” 우리는 신이 나서 노란색 튜브를 하나씩 들고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꽤 높은 계단이어서 어떻게 내려오나 걱정을 하면서, 마음도 조마조마하면서 올라갔지요. 이제 내려갈 때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준비하세요.”라는 안전요원의 소리도 들리고, 눈을 감을까 뜰까 고민도 하면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윽고 저희 일행 앞으로 안전요원이 다가왔습니다. “화이팅!” 앞에 있는 동기에게 소리치는데, 안전요원의 말이 “고객님들은 안됩니다.”, 왜 올라왔느냐는 식으로 쳐다보면서 글쎄 70kg 이상은 안전상의 이유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올라오는 계단에 쓰여 있었는데 신 난 우리들은 그 문구를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내려가요?”, “계단으로 걸어가세요.” 하는 수 없이 뒤돌아선 우리들에게 “난 70kg 안 되는데!”라는 동창의 소리가 들렸고, 두 명의 동창은 신 나게 타고 내려오고 나머지는 그냥 높은 계단을 걸어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찌나 부럽던지….

오늘 복음 말씀 중에 좁은 문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그러면서 내 자신은 ‘나는 아니겠지, 하느님 나라의 문을 나는 통과할 수 있을 거야’라고 미리 김칫국 먼저 마시는 모습이 현재의 나의 모습이 아닌지를 반성해봅니다. 분명히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을 보면서, 만약 내가 들어가지 못한다면 미끄럼틀을 타지 못한 것에 비할 것 없이 아쉬워하고, 아니 땅을 치며 통곡을 할 텐데 그 일들이 지금 나에게 닥치지 않았다고 해서 너무 안일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반성을 해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자녀들입니다. ‘주님의 자녀들’,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의 자리가 한 자리씩 다 마련되어 있다는 이야기지요. 마치 예약을 한 식당에 가면 출입구에서 “누구 이름으로 예약을 했는데요.”라고 하면 아주 좋은 예약된 자리에 안내를 해주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게 되면 이미 마련된 복된 자리로 인도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격이 되질 않으면 그 자리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겠지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 이 시간이 그 자격을 마련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말씀대로 실천을 잘 못 하기에 주님의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말씀대로 이 세상을 마친 다음에 주님의 자비를 청한다면 이미 늦어 버린 것이기에, 내가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금,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면서, 더욱 신앙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윤자면 빈첸시오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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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꼴찌 되는 실수 범해선 안돼"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주님은 구원받을 사람들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주님과의 형식적 관계가 아니라, 긴밀한 내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회개의 여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주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는 삶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만 두려고 해도 되풀이 되는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인정하며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한탄하는데서 방향을 전환시켜 주님의 자비에 맡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바라는 '악'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께서 바라는 '선'으로 향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키고 변명의 구실을 늘어놓는 것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의 삶을 희망하며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 여정을 걸어가듯이, 주님은 우리가 누구나 당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삶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 되풀이 되는 죄 때문에 주님 앞에 서기가 합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 자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사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다만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두드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의지와 필요성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문 밖에 서 있을 것입니다. 문 밖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 밖의 세상이 주는 사라질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두드림은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용서와 자비의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문을 제시하십니다. 아마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기에 좁다는 뜻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문은 들어가기에 결코 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삿짐 옮기듯 많은 것을 등에 지고 손에 움켜쥐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좁을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겨 가져가고 싶어 하는 가치들이 오히려 문에 걸려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이라는 교만, 자신만이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자만, 그런 장애들을 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바로 좁은 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문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며 열려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문이 닫히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문 밖에서 외칠 것입니다.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은 아담을 부르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주님을 피해 두려워 숨기만 했습니다. 주님이 애타게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주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더 이상 찾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말씀 안에서, 주님 성찬례 안에서, 주님을 안다고 변명해도 주님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과 필요에 따라서만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우리는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픈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준다는 사실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홍승모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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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좁은 문 그러나 기쁜 길

복음(Evangelion)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고대 희랍에서 큰 경사, 예컨대 왕의 탄생과 같은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이를 전하는 것을 지칭했습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으로 초대되었기에 이 소식을 담은 책을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곳곳에서는 기쁨보다는 근심과 걱정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마태 16, 24),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한다.”(마태 20, 26),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루카6, 20-21)하시더니 오늘 복음에서는 급기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즉,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고 종이 되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 눈물 나게 힘겨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행복이라 말씀하십니다. 쩔쩔매고 십자가를 진 채 종이 되어 험한 길을 가야 하는 삶,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기쁠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저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등산을 좋아하는 지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족들도 다복해 보이고 직장도, 삶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휴일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산에 오릅니다. 국내에 있는 산이란 산은 거의 다 올랐고 이제는 틈만 있으면 더 높은 산을 오르려 해외의 험한 산들을 찾아다닙니다. 등산길은 평탄할 때보다는 가파르고 넘기 어려워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때론 천 길 낭떠러지와 마주 서야 하고 눈길, 절벽 길을 목숨 걸고 올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삶의 기쁨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그게 참 좋고 행복하답니다. 제게는 어쩌다 한 번 가게 되도 죽을 인상을 쓰며 겨우 따라가는 고행의 길인 등산이 그것을 좋아하는 그에게는 행복의 길이 됩니다. 벼랑길도, 죽음의 크레바스가 입을 벌리고 있는 설산도 그에게는 기쁨의 길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몸소 먼저 걸어가시고 우리에게 따르라 하시는 그 길이, 때론 험하고 십자가 짊어진 채 걸어야 하는 아주 좁은 문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행복의 길이 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함께 걸어가시며 용기를 주시고, 휘청거릴 때마다 부축해주시는 그 길은 참 기쁜 파스카의 길입니다. 좁은 문의 길을 좋아하려면 예수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힘겹게만 느껴지지만, 그분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 길은 아주 기쁜 길이 되며 좁은 문도 신나는 문이 됩니다.

<인천교구 이완희 스테파노 신부>
  |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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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우리에게 열린 문에 기뻐합니다!”

중국 연태에서 한인사목을 하다가 들어왔습니다. 짧은 해외생활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중국 공항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입국심사 통로만 지나갈 때면 얼마나 불안하던지 그 문이 마치 좁은 문 같았습니다. 늘 신앙 서적이나 성물을 갖고 들어갔기에 그 양에 상관없이 늘 조심해야했지요. 중국은 아직도 약간의 종교적 제한성이 있어, 종교에 관련된 것은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미 중국에서 살아가는 한국 신자들은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했고, 노하우와 웃지 못할 에피소드까지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한 자매님이 성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가 수화물 검사에 걸리자,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중국말로 설명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십자성호를 그어서 바로 빼앗겼던 적도 있었지요. 어쩌면 그 자매님은 빼앗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 안의 두려움이 때로는 주님께 대한 두드림이 되기도 합니다.

한번은 저도 생활 성가 노래 CD를 많이 갖고 들어가다가 수화물 검사에 걸려서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화물 검사에서 공항직원들이 바로 알아본 것은 바로 생활 성가 노래 CD의 표지에 있던 ‘십자가’였습니다. 현 교황님 사진이 들어간 서적도 몇 권 있었지만, 그것은 다행히 걸리지 않았지요. 속으로 ‘교황님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십자가는 꼭 알아보는구나!’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비신앙인에게조차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장 큰 상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단 한 가지 바로 주님을 향한 마음은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해외에서 함께 사는 신자들이 있는 곳에 필요한 것은 다른 것도 많았지만, 만약 사제인 제가 들어가지 못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닫힌 것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열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늘 열려 계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는 그분께서 지상에서 당신의 온 생애에 걸쳐 살아오신 방식의 정점입니다.” 『복음의 기쁨 269항』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굳게 닫힌 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문을 열어야 할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문을 찾고 두드리고 있을까요?

▮ 인천교구 정하선 베드로 신부 2016년 8월 21일
  |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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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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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국방부 조달본부 박모 군무원이 수입 항공기부품의 고가 납품 비리를 폭로했다. 그는 각종 불이익을 받고 조달본부를 사퇴했다. 2002년 공군 항공사업단 조주형(가브리엘) 대령이 수조 원대 차세대 전투기 도입 과정의 의혹을 제기했으나 군사기밀 누설죄로 기소되어 2004년 유죄를 확정받았다. 2009년 계룡대 근무지원단 김영수 소령이 직접 방송에 출연해 조직적인 군납비리를 고발했다. 그는 타 부대로 전출되었고 이후 전역했다. 영화 <일급비밀>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 글입니다.

군 내부에서 발생하는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철저히‘배신자’로 내몰리는 사례들을 우리 국민들은 종종 심층 보도를 통해 접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2009년, 김영수 소령은 군 비리를 밝혀낸 후, 좌천되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계룡대 근무지원단에서 전출된 곳엔 업무를 볼수 있는 책상이 없었고, 모든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책상과 의자 모두 행정업무를 보는 사병과 같이 쓰라는 지시 외에 어떤 조치도 없었다.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김 소령을 인격적으로 모자란 사람, 부적응자로 낙인찍었다. 투명인간 취급이 견디기 힘들어 매일 출근하면 옥상에 올라가 줄담배를 피웠다. 하루 세 갑은 기본이었다. 생각이 많으면 잠을 못 잤기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술의 힘을 빌렸다. 난생처음 자살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런 생활이 6개월 동안 반복됐다.”(기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걸고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극히 적습니다. 그 길을 선택하
는 사람들은 악의 사슬을 유지하는 사람이나 조직으로부터 인생의 쓴맛을 톡톡히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양심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군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초년병 때부터 배운 군인의 길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렇게 양심적인 선택으로 좁은 문에 들어서는 분도 계신 데, 우리는 신앙인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냐고 위안을 삼고 있을지 모릅니다. 곳곳에 성당이 있고,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중요 기관들이 있고, 이 기관들이 사회적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신자라는 존재만으로 한국 사회를 아름답게 바꾸어 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호된 가르침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 말씀이 생애 마지막에 듣게 되는 벼락과 같은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예수님의 말씀은 실천하라고 있는 것이지 말 잔치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생기는 구절입니다.

신앙과 무관하게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의 선택이 이러한데,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라도 더욱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타협하는 일이 없이 진리에 충실히 머물고자 하는 신앙인에겐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문인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피해가 돌아올 줄 뻔히 알면서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설 수 있을까요?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은 비좁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그 길을 선택하기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살아내기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힘쓰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영원한 생명은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에 틀림이 없습니다.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은 예수님의 말씀 실천에 목숨을 걸고 살아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 삶의 첫 번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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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병석 요셉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451 23.6%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이 생각납니다. 고3 때에 분기별로 모의고사를 보게 되는데, 자신이 지원하는 대학명과 과 이름을 적으면 몇 명이 지원했고 그중에서 몇 등인지가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저는 늘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적어냈고, 그때마다 합격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원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정원보다 조금 넘거나 미달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굳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고3 시절이 제게는 가장 많이 놀았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학력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놀라운 정보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는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것입니다. 즉, 정원 미달이 되어도 성적이 낮으면 불합격된다는 것이었지요. 몇 명이 합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점이어야 합격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지원자가 적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점수를 무조건 올려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무사히 신학교에 합격했고 이렇게 신부도 되었지만, 만약 그때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혹시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신학교는 어느 정도 정원에 맞추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점수가 되지 않으면 미달이라고 해서 합격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 정원이 몇 명이고 몇 명이나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몇 명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말씀하시지요. 즉, 얼마나 많이 구원받느냐보다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함께 식사했다고 해서 종말의 잔칫상에 앉는다는 보장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미사에 열심히 참석했다고 해서, 성당에 얼굴을 자주 비췄다고 해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반하는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구원에 정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달이라고 불의를 저질러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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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451 23.6%
[인천]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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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지차 천리지류(毫釐之差 千里之謬). 털끝만큼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착오를 낳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가갈 수 없을 만큼의 거리로 벌어진다는 뜻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지 적당히 옳고 적당히 그른 것이란 없다. 애초에 털끝의 차이라 해도 차이는 차이이며 극복할 수 없는 간격도 거기서 비롯된다. 그러니 첫발을 어떻게 떼느냐가 그 이후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거리끼는 미세한 가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오늘 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던 자들이 집주인에게 했던 말이다. 언뜻 보면 이들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견상 주님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서먹함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 비난할 구실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주인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그들이 조금 부족하다 해도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그 비난의 수위가 높다. 하지만 그들의 어정쩡하고 방관자적인 삶은 시작부터 이러한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주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주인의 삶에 깊이 동참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주님의 기쁨과 슬픔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던 사람들. 처음의 미온적 태도가 비록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을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인과 항상 함께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 비난받으며 거부된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질문한 그는 아마도 유다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공허한 이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유사 이래 계속돼 온 이데올로기다.

귀족인가 아니면 평민인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정략적 결혼과 인간적 욕망, 위선, 거짓을 감추기 위한 몇 가지 교양 있는 태도를 익히는 것뿐이다. 구약의 후계자라 자처한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율법을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인생을 진심으로 책임지고 한발 한발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을 생략하고 글자와 이념에 숨어 사는 삶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사되는 우아함만으로 내면의 위선과 욕망을 감추는 정도가 그들에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적당한 선에서 단절된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고고한 자세로 바라보거나 점잖게 훈계하려 들 뿐 참으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던 자기들만의 리그에 할당된 영토는 너무나도 협소하다. 그들은 정말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그들이 사는 세계를 대다수의 평민들은 알지 못한다. 주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선택됐다는 우월감으로 좁은 문에 서 있던 자들은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렇게나 좁았던 문이 어느새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대문으로 변모하는 아이러니를 오늘 복음에서 만난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사방(四方)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란 선민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에게서 배척된 이들이다.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잡기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잔치에 초대됐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에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는 특정한 자격 요건이 필요하지 않다.

제1독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라고 한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초대됐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 그 문을 스스로 좁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던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든 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신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정말로 좁다는 말이라기보다 너희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좁은 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분 상승을 어렵게 만든 귀족적 혈연이나 우리사회의 상류계급이 세워 놓은 계층 바리케이드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좁은 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수많은 이방인들과 좁은 문을 통과하기 녹록지 않은 이스라엘의 차이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삶으로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이념과 계급에 가둬 둘 것인가의 차이다.

특권 계층에 속해 있다는 이념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조차도 보장해 줄 수 없다. 세련되지 않고 투박하더라도 진지하게 일궈 나가는 매일의 삶 안에 구원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좋은 가문과 배경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의 맵시보다 햇볕에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과 노동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마디가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그런 것이다. 계급사다리의 상층부라고해서 그것이 하늘과 가까운 것도 아니요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위치에 오르지 못하게 한 좁은 문이 스스로를 가둘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천 리나 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은총은 우리에게 허락된 넓은 문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인생은 짧고 하느님 나라의 시간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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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강휘 신부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25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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